165화 악연의 끝(1)
저쪽에서 오는 일행의 우두머리는 다름아닌 누르하치였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부간이 사람을 보내서, 도움을 청하더군요.”
아마 내가 울라부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다음 타겟은 누르하치의 건주위였을 터였다.
그러나 부간은 이쪽에 전력을 쏟아 부어야 했고, 그래도 같은 여진족이라고 건주위에 손을 내밀었던 것 같았다.
“원래는 응하지 않으려 했는데, 전에 하셨던 말씀도 생각나고 해서 계략을 좀 써 봤습니다.”
같은 여진족이라는 명분으로 부간의 요청에 응한 뒤, 건주위를 환영하는 연회에서 모조리 잡아버렸다고 했다.
“보통은 의심할 법도 한데, 지나칠 정도로 반가워하더군요. 제가 형님의 공을 빼앗은 게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으면, 일이 매우 지루해질 뻔했어.”
다른 부족들이 늑장을 부렸을망정, 언젠가는 부간의 깃발 아래 합류했을 터였다.
결국 사람은 낯선 타지인보다는 오랫동안 투닥거려 왔던 이웃을 먼저 돌아보게 마련이니까.
그 뒤처리까지 생각하면, 누르하치의 등장은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마음을 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는 누르하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참으로 고맙네.”
“아, 그리고 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던 누르하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선군의 장수들이 먼발치에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자를 잡았습니다. 소란스러울지도 몰라서 따로 가둬 놓았습니다만,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자기가 형님의 혈족이라고…….”
“음……. 자네에게 꼴불견을 보이고 말았군.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기는 한데, 내가 여기로 온 이유이기도 하지.”
내 말을 들은 누르하치는 단순히 일족 간의 권력다툼으로 여긴 듯했다.
“뭐, 권력은 형제끼리도 나눌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셈이지.”
뒷수습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부간과 그 아들들의 목은 이미 소금에 절여져 있었다. 살아남은 것은 부잔타이 하나였으나, 역시 목 잃은 시신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 외의 피붙이들은 조선으로 압송되어 노비로 삼을 예정이었고, 다른 부족들에게는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조선의 장수들은 국경을 어지럽힌 원흉의 목을 얻은 것과 울라부의 해체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으로 조선 측의 용무는 끝났으나,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승전 연회를 거하게 베푼 뒤, 나는 술에 취한 척 빠져나와 누르하치의 숙영지로 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님.”
“오늘의 배려는 내 결코 잊지 않을 걸세.”
그렇게 누르하치의 마음 씀씀이를 칭찬한 뒤, 나는 옥에 갇힌 야주로, 아니 이제는 도토야 조세이를 자칭하는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연 누르하치가 놀랐을 정도로 내 얼굴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걸로 그의 정체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오.”
그렇게 말을 걸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주 먼 길을 돌아서 이제야 보게 되었구려.”
“나는 그대와 볼 일이 없다.”
“내가 있소.”
“한낱 상인 놈이 무사를 모욕할 셈이냐!”
그 말에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그러나 상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아까는 내 혈족이라 우겼다던데.”
“병가에 속임수는 꺼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게 통하지 않아 잡혔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어서 죽여라.”
그래도 누르하치에게 뻗댔다는 말을 생각해서, 형으로 대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야주로와 야쿠로로 있을 필요는 없는 듯했다.
“말하기에 따라서는, 원하는 방식으로 죽게 해 주지. 아니면 풀어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궁금한 게 아주 많아.”
히데요시의 행방과 속내도 중요하겠지만, 당장 궁금한 것은 조세이가 왜 멀고 험한 길을 돌아가려 했는가. 그것이었다.
그가 오다 가문 밑으로 들어간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만약 입신양명을 원했다면, 그는 야주로가 되어 내게 왔어야 했다.
여러 이유를 최대한으로 끌어내봐야, 오다 노부나가와 하시바 히데요시의 인품에 감복했다는 것 정도가 한계일 터였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는 야주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망설임 없이 잡은 것을 기억했다.
어린 나이에 무사 가문에 입적하겠다고 나선 것을 떠올려 보면, 당시 야주로의 신분 상승 욕구는 매우 강했다고밖에 보기 어려웠다.
백배 양보해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시점까지는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때까진 오다 가문도 멀쩡한 거대 세력이었으니까.
그러나 굳이 춥고 척박한 홋카이도, 그리고 험한 바다를 넘어 여기까지 와 가면서 이랬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게 가장 궁금했다.
“이토록 악착같이 내게 칼을 들이댄 이유가 뭐냐?”
조세이는 내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다른 것들을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눈치였다.
여진족에게 넘긴 화약의 출처, 혹은 하시바 히데요시의 소재 같은 것들.
그러나 지금의 질문은 그런 게 아니라 온전히 도토야 조세이라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정말로 뜻밖이라 생각했는지, 한참을 웃기만 했다.
“으하하하, 하하하, 정말로 그게 궁금한 거냐?”
“적어도 내게는 그렇지.”
잠시 시간이 지나고 웃음이 가라앉은 뒤, 조세이가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죽기 전에 앙금을 풀어놓고 가도 좋겠지.”
그렇게 운을 뗀 뒤, 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무사가문에 입적할 기회를 움켜쥔 것부터, 우키타 가문의 멸망까지. 거기까지는 나 역시 조사한 바가 있어, 약간 알고 있었다.
“나는 고작해야 멸망해 가는 가문의 말단에 불과한데, 너는 어느 새 천하를 호령하는 사카이 쿠보가 되어 있더군.”
“그게 불만이었나?”
“그 자체는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나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설익은 생각이요, 치기어린 억지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답은 된다고 생각했다.
“너도 보았겠지만, 이제 무사의 시대는 갔다.”
적어도 일신의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여러 종류의 힘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건일 터였다.
아마 내가 없었더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좀 더 느린 속도로 조율했겠지만, 어쨌든 지금 일본의 패권을 쥔 건 그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네가 죽으면, 아직은 아니게 되겠지.”
“그럴 일도 없지만, 생각이 너무 짧군.”
도토야 조세이는 내가 거꾸러지기만 하면, 다시 무사들의 세상이 올 거라고 믿는 듯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선택에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우기는 것에 가까웠지만.
“너도 잡혔고, 하시바 히데요시도 여기 어딘가에 있겠지. 그는 일본땅을 밟지 못할 거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조세이는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너야말로 모든 걸 잃게 될 거다. 운이 좋으면 네 사람들을 살려서 도망 나올 수는 있겠지.”
“그게 무슨 소리냐?”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니, 기다려 봐라.”
죄수는 그렇게까지만 말한 뒤, 입을 다물어버렸다. 마치 내가 궁금해서 미치기라도 바라는 듯했다.
뭔가 씨를 뿌려 놓았다는 것은 확실한데, 이제 그의 입이 다시 열릴 가능성은 없을 터였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를 더 질문했다.
“부모님은 보고 싶지 않나? 네가 도토야 조세이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신다.”
“아버님께선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친정으로 가셨겠지. 고니시 일족을 말하는 거라면, 그들은 나와 상관이 없다.”
죄수는 끝까지 자신이 도토야 가문의 조세이임을 고집했다.
“그렇군.”
아무래도 그와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아마 고문을 해도,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말하지 않겠지. 나도 마음을 정해야 했다.
“잘 가라.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품에 지니고 있던 와카자시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피를 닦아내고 장막 밖으로 나온 다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누르하치에게 처리를 부탁했다.
“자네 덕에 역도를 처단할 수 있었네. 달리 챙길 건 없으니, 깨끗하게 태워 주게나.”
“알겠습니다, 형님.”
누르하치의 솜씨는 깔끔했다. 조세이가 갇혀 있었던 장막에 기름을 붓고, 통째로 불살라 버렸다.
“저, 형님…….”
“말하시게.”
“새어나와서 본의 아니게 조금 듣긴 했습니다만, 급히 돌아가셔야 하는 게 아닐지…….”
나와 조세이는 일본어로 대화했다. 그러니 누르하치는 그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일본말을 할 줄도 알았나?”
“어조와 맥락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죽음을 앞둔 자가 형님을 비웃었으니, 필시 다른 수작을 부렸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온전히 믿기는 어려웠지만, 그의 말에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뭐, 비밀로 할 것까지는 없지만, 꽤나 민망한 이야기란 말이지. 나는 꽤나 부끄러운 형을 두었던 모양이야.”
“형님의 형이었습니까?”
그렇게 슬쩍 떠보았지만, 역시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적어도 대화를 알아듣고 속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게 됐네. 아무래도 본국에 뭔가 수작을 부린 모양이야.”
* * *
오슈에서도 에조치와 마주하고 있는 츠가루, 여기는 격동의 전국시대 중에도 큰 전란을 겪지 않은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백성들은 전례 없는 환란을 겪어야 했다.
“도토야 조세이가 목숨을 버려 가면서 만든 기회다. 어서 몰아쳐라!”
털옷을 입은 에미시와 오다 가문의 깃발, 그리고 덩치가 큰 말을 탄 전사들은 언뜻 보기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셋의 위용만큼은 진짜였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도 저렇게 싸울 수 있다니…….”
“요괴다! 오다 놈들이 요괴를 타고 쳐들어왔다!”
일본의 무사들은 오랫동안 기마전투를 겪어보지 못했다. 고작해야 신사의 신관이 의례적으로 말을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는 정도였다.
이 시대의 무사들은 말을 자신의 이동수단 정도로 여겼다. 그 이상의 의미라고 해 봐야, 전장에서 더 높이 볼 수 있게 해 주는 받침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이끌고 온 기병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창을 들어라!”
“아니, 내려서 적을 향하게 해야 한다!”
기괴한 무리에 맞서는 병사들은 상반된 명령에 갈팡질팡했다.
한 무사는 지금까지의 전법을 요구했고, 다른 누군가는 저들을 상대하기 좋은 전법을 즉석에서 만들어 외쳤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다름아닌 혼란 그 자체였다.
창을 든 병사들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기병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무기를 높이 들어 올린 자들은 말의 속도에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면에서 치여 버리고 말았다.
창을 내밀고 있었던 자들의 신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얄팍한 대열은 기병들이 파고들기 좋았기에, 헛된 저항이 될 뿐이었다.
“다이묘를 잡아왔습니다!”
츠가루의 다이묘, 오우라 타메노리가 히데요시의 앞으로 끌려왔다.
“공은 대체 누구시오? 어째서 오다 가문의 깃발을 들고, 나를 공격한 거요?”
“나는 하시바 히데요시, 헛되이 돌아가신 간토간레이의 복수를 할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