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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64화 (164/225)

164화 야인의 땅(9)

탐색전이 끝난 뒤, 전장은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조세이는 호위 겸 감시역을 맡은 전사들과 먼발치에서 적진을 살폈다.

“튼튼하게도 쌓아 놨군. 게다가 철포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구조야.”

그가 처음 일천의 철포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드디어 고니시 유키나가가 죽을 자리로 온다고 생각했다.

철포는 직사 화기였기에, 그 활용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화력을 쏟아 부으려면, 대열을 넓고 길게 펼칠 필요가 있었다.

짧지 않은 장전 시간과 무너지기 쉬운 얇은 포진, 이 두 가지가 결정적인 약점인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다이묘들은 교대로 사격하거나 분업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그 간극을 메웠고, 보병끼리의 싸움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여진족은 대부분이 기병이었고, 당연히 기동력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조선군이 합세했다고는 해도 철포의 약점은 어디 가지 않을 터, 조세이는 승산이 충분할 거라고 보았다.

사실 지금도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닐 터였다.

단지 부간이 그의 의견을 받아주느냐는 별개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고니시군의 진채는 야트막한 언덕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경사진 지형에서는 후방의 철포수도 얼마든지 조준과 사격이 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적진에는 빈틈이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저렇게 단단한 적을 상대하려면 방법은 두 가지 정도였다. 오랜 시간을 들여 말려죽이거나, 혹은 상처를 내고 물고 늘어지거나.

그러나 부간은 그 어느 쪽도 택하기 어려운 입지에 서 있었다.

지금은 울라부 밑에 건주위를 제외한 모든 부족이 복속한 상태였다.

부간은 그들을 호령하며 제법 위세를 자랑했지만, 실상은 쭉정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믿을 수 있는 부대는 고작해야 원래 울라부에 속한 기병 이천 정도. 그나마도 얼마 전, 적지 않은 숫자가 허망하게 소멸하고 말았다.

여전히 세력의 규모 자체는 다른 부족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 대 일 대응일 경우에 불과했다.

족장들이 작정하고 파벌을 모아 일어선다면, 그게 울라부의 최후가 될 터였다.

그런 점에서 전자는 쓰기 어려운 계책이라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시간을 끌게 된다면, 다른 족장들은 점차 딴 생각을 먹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후자 역시 속편하게 고를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철포를 활용하기 좋다고 해도, 결국 근접전에서는 그 효용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한 점에 집중적으로 달려들어 근접전을 강요한다면, 적은 그 피해를 감당키 어려울 터였다.

이러한 장점이 있었지만, 그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도 만만치 않았다.

전군이 한데 뭉쳐, 한 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러니 누군가는 앞장서야만 했다.

앞장선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고기방패가 된다는 것이었기에, 역시 누군가는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도 피해를 감수하려 하지 않겠지.”

조세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공격 측은 저쪽이었을 터인데, 돌아가는 상황부터 전장의 위치까지 모든 게 반대로 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얻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기에서 뼈를 묻어야겠지만, 주군께서 잘해 주시길 바랄 수밖에.”

정찰을 마친 조세이는 부간의 군막으로 돌아갔다. 이미 다른 족장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논의가 한창이었다.

“하다부가 적진의 동편을 맡고, 예허부는 서편을 맡으라. 그리고 로툰은 돌아서 남쪽을 공격하라.”

“공격할 시간은 내일 정오, 그때 전군이 일시에 몰아쳐야 할 것이다.”

사실 부간 혼자 떠들 뿐, 나머지 족장들은 잠자코 듣기만 하는 모양새였다.

이미 울라부의 병력 일부가 꺾였다는 소문은 퍼져 있을 터, 지금 이들은 외인이 여진의 땅에 쳐들어왔다는 것 하나로 아슬아슬한 결속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족장들은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고, 부간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게 각 부족 병력의 위치를 정한 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 이리들 소극적인가?”

부간의 질책에, 울라부 다음으로 세력이 큰 예허부의 족장이 나섰다.

“우리는 이미 그대의 소집에 응했고, 맞이하여 싸울 태세를 갖추었소이다. 대체 무슨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이오? 잃을 것은 많은데 얻을 게 없는 싸움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한단 말이오이까?”

부간은 나름대로 자신의 위신을 세워 보기 위해, 변화를 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른 족장들은 거기에 끌려가는 대신, 역으로 받아쳐 버렸다.

우두머리의 의도가 어긋나 버린 만큼, 장내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갔다.

조세이는 속으로 탄식했다.

‘달래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강경하게 몰아대니, 내일이면 결판이 나고 말겠군.’

이미 다른 족장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어쩌면 예허부와 말을 맞췄을지도 모를 일, 그는 아무래도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부간이 뜬금없이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뭇 부족의 어버이로서, 내가 어찌 그대들에게 희생만을 강요하겠나? 왜국 쿠보의 목을 가져오면, 수레 하나에 황금을 가득 채워 줄 것이다. 좋은 계책을 내어놓아도 그리 할 것이고, 가장 많은 목을 가져오는 자 역시 그만큼의 상을 받을 것이다.”

부족의 어버이 운운하는 시점에서, 분위기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다른 족장들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정말이오?”

“약속하지.”

대부분의 참석자가 탐욕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러나 개중에는 아직 머리가 돌아가는 자가 남아 있었다.

“일단 황금부터 보여 주시오.”

그 말을 들은 부간은 궤짝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렸다.

“지금 군중에 있는 것은 이정도이나, 이번 싸움에서 이기면 더 많은 황금이 들어올 것이다. 그걸 나 혼자 먹지 않겠다는 말이다!”

고작해야 수레를 반도 채우지 못할 분량이었지만, 일단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가 중요한 문제일 터였다.

의문을 제기했던 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더 이상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장내의 분위기를 살핀 조세이는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간이 제멋대로인 자이긴 해도, 나름대로 능력은 있는 자였던 것이다.

‘이만하면 백중세는 이끌어낼지도 모르겠군.’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리라. 조세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경원부사가 오려면 앞으로 사흘 정도라고 했던가.”

“그럴 겁니다.”

한극함은 부상자들과 그 호위대를 이끌고 국경 안으로 돌아간 상황, 그가 교대 병력과 돌아오려면, 약간의 시일이 필요했다.

물론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그 규모는 미미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 한줌 병력조차도 아쉬운 게 사람 마음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가 싸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지부터 미지수였다.

“적은 싸움을 오래 끌려 하지 않을 겁니다.”

“역시 그렇겠지. 대신 아주 맹렬하게 쳐들어올 걸세.”

내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이억기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겁니다. 부간의 위세가 대단하기는 해도, 다른 부족을 복속시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빈틈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겠군.”

“아주 많겠지요.”

온성부는 최전방 중에서도 돌출된 만큼 가장 여진족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부사라는 자리는 요지를 맡은 일종의 총독이라는 점에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그는 이간책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논의가 나오기도 전에, 이억기의 생각은 반론에 부딪쳤다.

“온성부사의 말씀은 너무 안일하다 생각됩니다. 여진족의 습성이 분열하기를 좋아한다 해도, 사세는 어찌 바뀔지 알 수 없는 것. 지금은 마땅히 적이 전력으로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순신다운 말이었다.

“과연 참군의 말이 옳습니다. 제 생각이 너무 짧았군요.”

“아닐세. 여진족을 가장 많이 접했을 터이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러나 주장으로서 나는 참군의 의견에 마음이 가는 건, 어찌할 수가 없군. 온성부사의 계책은 추후에 활용할 길이 있을 걸세.”

나는 이억기를 그렇게 달랜 뒤, 이경록을 돌아보았다.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그가 이끄는 창병은 지금까지의 기병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경흥부사가 짊어진 책임이 가장 막중할 걸세.”

“소장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죽기로 본대를 보호하겠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임무가 정해지고, 신경을 곤두선 가운데 하룻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침이 밝자, 여진족은 대오를 갖추고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전투와는 달리, 기병들이 사방에서 맹렬하게 몰아쳐 왔다.

아군의 철포는 언덕 위에서 맹렬하게 불을 뿜었고, 그때마다 적은 픽픽 쓰러져나갔다.

다행히도 적은 얇고 넓게 접근했기 때문에, 철포수들이 최대한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탄약을 아낌없이 퍼부어 주어라!”

여진족의 조총은 그 몸통을 반으로 갈라서, 말 위에서 사용하기 좋게 만든 것. 아군보다 사거리가 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과연 말이라는 짐승의 기동력은 인간의 발을 아득하게 상회했고, 일부 여진족은 아군 목책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적진이 코앞이다! 끼요오옷!”

달라붙기만 하면, 적은 수수깡처럼 무너질 것이다. 사전에 그렇게 이야기를 들은 전사들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허점이 존재했다. 일단 접근이 가능해야 뭐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십 보, 쏴라!”

준비는 끝났지만, 길게 말할 여유는 없었다. 조선의 군관들은 정해진 군호를 외쳤고, 그때마다 나팔총이 불을 뿜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조선군의 기병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말에서 내린 뒤, 최종 화망을 구성하고 있었다.

납탄의 폭풍이 몰아칠 때마다, 여진족은 말 위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쏘면 맞는구나! 장님조차도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되겠어!”

정오부터 시작된 싸움은 해가 살짝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는 반면, 사방에 여진족의 시체가 가득했다.

“족히 반은 사살한 듯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적은 집결 중이니 숫자가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화약은 넉넉하네. 병사들을 교대로 쉬게 하고, 다음 싸움을 준비하세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모두 규합했을 때는 그 군세가 이만에서 삼만까지도 육박했다던 기억이 났다.

물론 아직 울라부 밑에 들어가지 않은 부족도 있겠지만, 부간도 족히 일만까지는 끌어모을 수 있을 터였다.

대체 무슨 술수를 부렸기에 이렇게 맹렬하게 달려든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아직 승산은 충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적진에서 백기를 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 중 몇몇은 포박된 상태였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일단 온성부사를 돌아보았다. 만약 적이 이간계에 당한 거라면, 그가 손을 썼을 가능성이 높을 터였다.

그런데 이억기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내분이라도 일어난 듯합니다만…….”

“이렇다 할 만한 계기가 없지 않소.”

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고, 조선의 군관들은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냈다. 당장은 아무것도 확실치가 않았다.

그러나 여진의 사절단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형님, 아우가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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