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야인의 땅(5)
온성부사 이억기는 생각보다 순후한 인상을 지닌 자였다.
꼿꼿함과 온화함을 각각 좌우로 놓고 수직선으로 긋는다면, 순서대로 이순신, 이경록, 이억기쯤 되지 않을까 싶은 그런 분위기.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장수로 상당한 지위에 있는 만큼, 한편에는 굳은 심지가 엿보이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방. 배로 오신다는 이야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도보로 움직이기엔 시일이 오래 걸릴 듯해서 말이오.”
한극함을 비롯한 기병 군관들 역시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언제쯤 출발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먼 길을 오셨으니, 병사들을 조금 쉬게 할 필요도 있겠습니다만…….”
일본에서 건너온 철포수들은 물에 익숙했기 때문에, 그다지 필요없는 배려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 휘하의 병력만 생각해서는 안될 터였다.
경흥부사와 그가 이끄는 보병들 역시 같은 길로 오지 않았던가. 비록 그 거리가 짧다고는 해도, 아군에 대한 배려는 갖출 필요가 있었다.
내가 경흥부 소속 병사들을 슬쩍 둘러보자, 이경록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는 고작해야 하루 반 정도를 배에 있었을 뿐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루를 온성에 머무르면서, 편제를 가다듬고 싶군.”
그간 소속이 달랐던 부대의 합동 작전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 누구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일단 기병과 보병부터 확인을 하도록 하지. 북병사가 말하길, 온성부의 기병이 합류할 거라 들었네만.”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여, 도합 일천의 기병이 공방을 도울 겁니다.”
온성부사 이억기가 즉시 답을 냈다.
“그렇다면 온성부사와 경원부사가 나란히 기병을 이끌게 될 것인데, 누가 지휘를 맡게 되는가?”
“아직 정한 바는 없습니다. 다만 다섯 부대가 각자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이번에는 한극함이 나섰다.
“각자?”
“실질적인 주력은 공방의 부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나머지 부대는 그 보조 역을 맡게 되겠지요. 그러니 다섯 개의 부대가 각자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그의 말은 다소 뜻밖이었다. 내가 온전히 승리를 거두기 원치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나와야 했다.
한극함 본인이 이일의 명을 받아서 왔으니, 자기가 명령장을 받아서 지휘하겠다. 그렇게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는데, 의외로 일이 쉽게 풀렸다.
나 역시 한극함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다음은 각 부대의 역할을 정할 차례였다. 북병영에서 온 네 개의 기병 부대는 측면과 후방을 맡고, 이억기 휘하의 병력은 척후를 맡게 되었다.
“여기는 온성부의 관할이니, 척후에 더욱 적합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한극함이었고, 누구도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정작 앞으로 내몰리게 된 이억기라면 한 마디쯤은 할 법도 한데, 의외로 그조차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옳은 말이오.”
조선의 군관들이 서로 동의한 바에 내가 따로 토를 달 이유도 없었기에, 편성은 그렇게 결정 났다.
“그렇다면 편성은 끝났군. 내일 출진 전까지, 각자 병사들을 쉬게 하게. 그리고 척후를 맡은 온성부사는 잠시 남아줬으면 좋겠군.”
내 지시에 따라 군관들이 돌아가고, 장중에는 참군 이순신과 온성부사 이억기, 이 둘 만이 남아 있었다.
이경록은 이미 내막을 들은데다, 다른 군관들의 눈도 신경써야 했다. 그래서 그 역시 자기 병사들을 점검하러 나간 상태였다.
“온성부사의 병력이 척후를 맡았으니, 내가 특별히 지급할 무구가 있네.”
“온성부의 군비는 충분합니다.”
그러니 굳이 익숙치 않은 장비를 따로 갖출 필요는 없다. 이억기의 말은 그러했다.
“어쨌든 척후라는 어려운 일을 맡게 된 것이 아닌가.”
“공방, 국경 밖으로 나가면, 여진족은 어느 방향에서든 공격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거지에 가까울수록 위험한 것은 사실이겠지. 일단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시게.”
내가 그렇게까지 권하자, 온성부사도 더 이상 거부하지는 않았다. 상대의 동의를 받은 뒤, 나는 군막 한켠에 놓여 있었던 상자를 활짝 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무명옷 같은데…….”
“바로 보았네.”
“물론 북변이 춥기는 합니다만, 그렇기에 병사들의 대비 역시 충분합니다. 굳이 이걸 주시는 이유가…….”
이 시대의 무명옷은 방한용의 성격이 강했으니, 이억기의 반응도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예상과는 다른 답을 내밀었다.
“당연히 그럴 걸세. 이 무명옷이 추위를 막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져온 목적은 조금 다르다네.”
면제배갑, 이미 내 휘하의 병력들은 사용하고 있는 방탄복. 여진족이 화기를 사용하고 있으니, 더없이 유용한 방어 수단이 될 터였다.
“이건 총탄도 막는 물건이거든.”
“아니, 쇠도 뚫는 조총을 이런 천옷이 막는단 말입니까?”
“옛말에 이르길, 강한 화살도 부드러운 비단을 뚫지는 못한다 하지 않았나. 내 휘하의 병력들 역시 모두가 이걸 걸치고 있다네.”
상대의 지위를 생각해 듣기는 한다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억기는 그런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순신도 사전에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역시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미 내 밑에서 봉직한 사람들은 이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반응이었다.
이 맛에 신문물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는가 말이다.
나는 그 둘을 데리고 철포수들의 숙영지로 향했다.
“물론 말로야 누구나 항우가 될 수 있고, 기문둔갑을 펼칠 수도 있는 법이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니, 직접 보고 정하시게.”
이미 시연 준비는 끝나 있었다. 그리고 경흥부사 이경록에게도 몰래 사람을 보내, 동석하게 했다.
그리고 시연이 끝난 뒤의 반응 역시 혼자보기 아까웠다.
“세상에…….”
“설마 했지만…….”
“조총탄에 뚫리지 않았다고?”
기대했던 반응 그대로였다.
“이걸 자네들 휘하의 부대에 전부 지급할 것일세. 넉넉히 가져왔으니, 온성부에 속한 전마에 두르기도 충분할 것이네.”
“하오면, 다른 이들은…….”
“안타깝게도 그렇게까지 넉넉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물론 다른 수레에 더 실려 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좀 더 나중에 보여줄 예정이었다.
“그래, 전마에 씌우고 다닐 수 있겠는가?”
“다소 느려지기는 하겠습니다만, 충분히 버티리라 생각합니다.”
이억기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홀린 듯이 내 질문에 답했다.
“허허, 이 사람. 아직 끝난 게 아닐세.”
“또 무엇을 보여주시려 하십니까?”
“여진족이 조총을 잘라서 사용한다 들었네. 그 이야기를 듣고 떠올라서 고안한 것이지.”
역시 총열을 잘라낸 나팔총, 그리고 그 전용으로 쓰는 탄약. 그걸 이억기에게 보여주었다.
“화포에는 조란환이라는 방식이 있다지? 그걸 조총에 적용시킨 물건들이지.”
“위력이 약하지 않겠습니까?”
“의심스럽다면, 믿을 만한 병사 몇에게만 들려보도록 하게.”
이미 면제배갑을 본 군관들은 기병용으로 개조한 나팔총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 * *
“이봐, 도토야. 일본국 공방이라는 자가 왔다더군.”
울라부의 수장, 부간은 자신의 귀빈을 불러다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조선쪽 소문이 파다하니, 거짓은 아니겠지. 듣자 하니, 역도들을 잡으러 왔다고 하는데 말이야. 혹시 자네 이야기 아니겠나?”
조세이가 듣기에도 그럴싸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는 없었으니까.
“얼마나 이끌고 왔다고 합니까?”
“조총을 든 병사가 일천, 거기에 조선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군. 도합 이천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 하던데 말이야.”
이 정도면 상당히 고급 정보였다. 유키나가가 일본국을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써먹기 좋은데, 그가 이끌고 온 병력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상대의 태도는 이상했다. 조세이가 울라부에서 후대를 받고 있기는 했으나, 부간은 그를 쥐어짜는 만큼 화약을 내어놓는 그런 존재로만 대해왔다.
이렇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줄 리가 없었다. 거기에 생각이 닿은 조세이는 부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네는 왜국 쿠보의 몸값을 얼마나 줄 수 있나?”
결국 흥정을 벌이겠다는 의도였다. 그 밑바탕에는, 아주 음험한 속내가 숨어 있었다.
“조선이 유키나가에게 화약을 사들인다면, 나 역시 그리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제가 이미 공급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한 양을 누구 코에 붙이라고? 고작해야 서너 번 쓰면 끝날 분량이잖나.”
왜국 쿠보를 붙들어 놓는다면, 일본 상인들은 울라부로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다 건너의 일은 그가 알 바가 아니었으니, 억류만 해두고 조세이와 그 일당을 팽해버려도 상관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가 개척한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화약을 공급받는다.
그게 부간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조세이도 다른 세력을 배후로 두고 있다 했으니, 이왕이면 흥정을 붙이는 게 더 큰 이익이 되리라 보았던 것이다.
“다시 묻지. 왜국 쿠보의 몸값은 얼마인가?”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나는 지금 그쪽의 성의를 묻는 거야. 도토야, 자네가 내게 질문할 입장이 아니라는 거지.”
조세이는 바다를 건너온 이래, 다시 없을 난감함을 느꼈다.
부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천하 대세를 뒤집을 천지대패가 가까이에 와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그의 주군을 덜 수고스럽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그는, 가까스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려냈다.
“그렇다 해도 일단 소문이 아닙니까. 하물며, 아직 손아귀에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대역이 왔을 수도 있는 것이니, 진위부터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흠, 일리가 있군. 좋네. 하지만 사실 여부가 확실해진 뒤에는, 몸값을 더 비싸게 내야 할 것이야.”
“사실이라면 이 방을 가득 채울 황금을 드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일단 계약금으로, 이번에 온 분량의 대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부간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왜인이 한 말에는 입을 떡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울라부가 오랑캐 취급을 받는 여진의 한 분파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부간은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당연히 그가 머무는 처소는 상당히 넓은 편에 속했다.
그러니 조세이가 부른 황금의 양은 실로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뭐라고?”
“유키나가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요. 단, 무조건 그자의 목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만한 거금을 제시했으니, 흥정 따위는 더 붙이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한번쯤 의심을 해볼법한 제안이었으나, 이미 부간의 머릿 속에는 황금 생각만이 가득차 있었다. 목을 원한다면, 잡아서 참수해주면 그만일 게 아니겠는가.
설령 조세이가 약속을 어긴다 하더라도, 그땐 이미 유키나가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 있을 터였다.
울라부의 우두머리가 떠올린 구상은 빈틈이 아주 많았지만, 욕심이 이미 그 간극을 적당히 채워주고 있었다.
“전사들을 소집해라! 금덩어리가 굴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