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야인의 땅(2)
“입에 발이 달렸다……. 정말 그렇게만 말씀하셨나?”
“그렇습니다.”
혼다 마사노부는 전령을 채근했지만, 다른 답이 받지는 못했다.
물론 중대한 일은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법이니, 쿠보의 전언은 아주 맥락에 어긋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아예 전달조차 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언급한 의미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서신에 적힌 내용은 간단하기만 했다.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의 일은, 남은 사람들에게 맡기겠다.
이 외에 다른 내용은 없었다.
결국 마사노부는 쿠보의 전언에 담긴 뜻을 찾기로 했다.
“입에 발이라…….”
“돌아오신 다음에 말씀해주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소?”
옆에서 듣고 있던 시마 카츠타케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마침 동석하고 있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거라면, 애초에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겠지. 분명 저 문구 자체에 의미가 있을 거다.”
같이 들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댄 가운데, 마사노부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수수깨끼를 푸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결국 직접 해보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입이라면 ‘口’ 자다. 그리고 거기에 발이 달렸고 했다.
그 형태를 현실로 끌어내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只(다만 지)’ 자였다. 하지만 그 뜻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고니시군의 책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발의 형태를 바꿔보았다. 그러니 나오는 글자는 ‘兄(형 형)’이었다.
“형……?”
옆에서 보고 있던 카츠타케가 그 글자를 입에 올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마사노부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생각났다.
“설마…….”
“혹시 쿠보의 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거요?”
그러나 거기에 답한 사람은 마사노부가 아니라, 히사히데였다.
“흠……. 쿠보가 형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하나 밖에 없지 않나.”
“도토야 조세이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는…….”
“에조치에서 다시 종적을 감추었지.”
군봉행은 그렇게 말하며, 고니시군의 배치가 표시된 지도를 돌아보았다.
수군 함대가 작성한 지도는 꽤 넓은 범위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에조치에서 도이(刀伊, 여진족)의 땅은 의외로 가까웠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 아무래도 병력을 좀 보내야겠군.”
“하지만 조선에 군대를 보내도 되겠습니까?”
어쨌든 타국에 파병하는 일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조선과 친밀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왜구의 기억은 남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대수롭지 않게 답을 냈다.
“가려 뽑은 철포수 일천.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미 쿠보가 도이의 땅으로 가고 있다면, 조선과는 이야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철포에 능한 소수의 정예 병력과 현지 협력자의 보조부대. 히사히데에게는 익숙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건 고니시군의 다른 장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뭐, 조선에서 거부해도 상관은 없겠지. 그때는 쿠보를 직접 모셔오면 그만이야.”
“쿠보를요……?
“그래. 어쨌든 타국의 국경인데,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도토야 조세이도 중대한 문제지만, 우리에겐 쿠보의 안위가 더 중요해.”
그렇게 말하면서 히사히데는 자신이 직접 가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쿠보께서 자리를 비우신 상태입니다. 그러니 군봉행께서 무게를 잡아주셔야지요. 더구나 인척이 아니십니까. 소장이 가겠습니다.”
결국 그렇게 시마 카츠타케가 덕원에 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 * *
“형님께서는 동북으로 가시겠습니다그려.”
“그렇지. 자네는 어쩔 참인가?”
“일단 부족을 챙겨야지요.”
나와 누르하치는 창의문 밖에서 갈라지기 전,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전에 형님께서 말씀하셨던 거는…….”
이 젊고 야심찬 여진의 족장은 내가 내밀었던 제안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새였다.
“손을 내밀면, 얼마든지 잡아 주겠네. 하지만 아직은 명나라가 멀쩡하니, 자네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야겠지.”
“당연히 그래야지요, 형님. 우리 부족은 조부님 때부터 명나라와 요동총병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누르하치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고 있었다.
“하지만 요동총병 이성량, 그자는 기어이 우리 부족을 몰살시키려 했지요. 이 원한은 반드시 갚고야 말겁니다.”
여진의 젊은 족장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한 뒤,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의주 방면으로 향했다.
지금의 그는 그래도 건주위를 통합한 상태였기에, 나름대로 세력이 있다고 할 만한 위치였다.
겉으로 말하기에는 일족의 원수를 갚겠노라 했지만, 어쨌든 그는 요동총병의 비호를 받으며 세력을 키웠다.
과연 누르하치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기대해봄직한 일이었다.
“공방께서는 정말로 노이합적을 도우실 생각이십니까?”
“그가 내게 신의를 지킨다면, 나 역시 그리할 것일세.”
어쨌거나 누르하치와 만난 곳은 조선 땅이었고, 당연히 조선의 언어로 대화를 해야 했다.
당연히 서로의 말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 중간에 있는 조선의 언어는 둘 다 구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일행들은 누르하치와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거기에서 예외였다.
“노이합적은 사나운 자입니다. 어린 나이에 고작 13기만 가지고,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도 했지요. 당시 이일 장군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끝내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말에는 정중하되, 서릿발 같은 냉엄함이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원교근공. 조선은 누르하치와 가깝고, 일본은 멀다. 그러니 혹여 내 도움으로 힘을 키워, 조선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후대의 이순신은 수군 제독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원래 그 이전의 경력에는 여진족을 상대한 적이 훨씬 많았다. 그러니 그가 누르하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일이면 지금의 북병사로군? 자네 상관이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일은 조선의 이름난 명장이라 하던데, 그가 놓칠 정도라면 보통 인물은 아니겠군.”
“공방.”
이순신의 어조가 살짝 올라가자, 나를 따라왔던 수행원들의 분위가가 흉흉해졌다.
조선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섞여 있었지만, 언성이 높아지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손을 휘휘 저어 그들을 안심시킨 뒤, 이순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애초에 내가 조선에 해가 될 일을 하려고 했다면, 굳이 조선의 군관을 빌려달라고 했겠나?”
“그건…….”
“뭐, 이 이야기는 접어두고. 자네가 보고 겪은 이일이라는 장수가, 정말로 노이합적을 잡을 만한 자였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걸세.”
얼마간을 고민하던 이순신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조선의 입장에서 좋은 협력자이긴 했어도, 부외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일은 개새끼이긴 해도, 조선의 개새끼일 터였다.
결국 그가 선택한 행동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다.
“쿠보, 저렇게 오만불손한 자를 왜 굳이…….”
“오만불손한 게 아니라, 자신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자인 것일세.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행하지.”
물론 이순신의 언행은 조선의 군왕이나 고위 관료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나마 윗사람이 그릇된 길로 가면, 목숨 걸고 뜯어말리는 게 조선의 충(忠)이라서 벼슬길에 남은 것이겠지만.
일본에서는 윗사람이 그릇된 길로 가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뜻대로 하게 만드는 것을 충이라고 했다던가.
그런 관념으로 보면, 이순신이 오만불손하게 보이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내 부하들은 어떨지 궁금해진 나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돌격하라는 명을 받는다면, 자네들은 어찌하려는가?”
“기꺼이 그리 할 것입니다.”
“내가 앞장서서 천길 낭떠러지로 달려간다면?”
“당연히 쿠보의 뒤를 따릅니다.”
두 질문은 모두 즉답을 받았다. 과연 내가 기억하는 통념에 어긋나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일행 중의 한 소년 무사는 이 문답이 석연치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낯은 익은 듯한데, 모르는 얼굴이라 갑자기 관심이 갔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먼저 이해득실을 따질 것입니다.”
일단 첫 마디부터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득이 된다면, 기꺼이 천길 낭떠러지로 달려갈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면, 우선 쿠보께 간언을 올리겠습니다.”
“무사가 이해득실을 논하는가?”
“혼자라면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일군을 이끄는 장수라면, 따르는 병사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일국의 다이묘라면, 자신의 영지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네.’를 말할 때, 혼자 ‘아니오.’를 말하는 사람은 결코 쉬운 인생을 살지 못한다. 바로 이 소년 무사가 그런 경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내력을 물어보았다.
“잘 배운 모양이군. 어느 집안 출신이며, 누구에게 학문을 익혔는가?”
“야규 무네요시의 아들, 무네노리라 합니다. 다른 스승은 없고, 가친께 검술과 군학을 배웠습니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다 싶었다. 비록 무네노리를 대면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그는 자기 부친을 고스란히 빼닮은 듯했다.
그런데 조선으로 건너오기 전의 일을 돌이켜보면, 무네요시가 자기 아들을 언급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자네 부친은 내게 한 번도 아들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지금 저는 야규 무네요시의 아들이 아닌, 일개 코가시라(小頭 소두, 초급 간부)일 뿐입니다.”
“그런가……. 훌륭하군.”
원래의 역사에서,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통합을 위한 새로운 이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렇기에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성리학을 도입하고,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물론 여전히 각 번은 지방분권적 행태를 보였기에, 그다지 신통치는 않았지만.
그리고 야규류는 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막부가 원하는 이념을 군학과 검술에 담았다고 했다.
수많은 검술 유파 중에서 하필 야규류가 그랬다는 이야기는, 결국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중간의 궤적이 상당히 비틀리기는 했지만, 그 근원은 여전히 남아서 원래의 흐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야규류의 가르침과 같다.”
“황공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루한 시간을 때워가며, 우리 일행은 협곡 지대를 넘어 덕원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쿠보.”
“아니, 나니와쿄를 지켜야 할 자네가 왜……?”
“야규 공이 맡기로 했습니다.”
나름대로 꽤 오래 조선에 머물러서 그런지, 이 일본식 압존법이 살짝 거슬렸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카츠타케가 병력까지 이끌고 온 게 더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