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야인의 땅(1)
녹둔도 만호 직위를 박탈당하고 백의로 종군하라는 처분을 받았을 때, 이순신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새 배속지가 어디인지를 확인한 이후,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무슨 이야기요? 내가 일본으로 가야 한다니…….”
“말 그대롭니다. 공께서는 백의종군하는 동안, 경공방 소서행장의 밑으로 들어가 있으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병조의 낭관 하나가 그렇게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내심 부럽다는 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하께서도 공을 중히 쓰시려는가 봅니다.”
비록 품계 상으로는 그가 낭관보다 약간 높았지만, 무관과 병조 직속 관료의 격차는 엄연히 존재했다.
그러나 방금 다녀간 벼슬아치는 마치 끈이라도 대려는 것처럼, 시종일관 사근사근한 태도를 유지하며 돌아갔다.
그것만으로도 이순신은 자신이 어떤 상황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백의종군을 변방도 아닌, 타국에서 하라는 이야기.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내용이다.
하지만 낭관의 말에는 일체의 비꼼이나 비아냥 따윈 없었다. 그리고 이순신 스스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일본과 관련된 직책을 맡으려면 둘 중 하나에는 해당이 되어야 했다.
서인이거나, 종친이거나.
아무리 이순신이 청탁이니 뇌물이니 하는 조직 정치에 어둡다고는 해도, 그 이치만큼은 모를 수가 없었다.
하나를 받으면 열을 도와야 하고, 그러다가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그게 싫었던 이순신은 일체의 선을 긋고, 당파와는 무관한 행보를 밟았다.
처음에는 같은 가문이었던 이이와의 만남을 거부했고, 그 다음에는 상관 서익의 요구를 물리쳤다. 그리고 근래에는 이일과 척을 진 적도 있었다.
다만, 하필이면 이들 모두가 서인인데다, 친구였던 유성룡은 동인의 중진급 인사였다.
그런 이유로, 이순신 본인도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모르지는 않았다.
비록 그가 당색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그간의 행적은 하필 서인과 거리를 두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이이가 죽은 이후, 서인 측 인사들은 드러내 놓고 이순신을 싫어하는 추세였다. 정확히는 서인이 당색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것에 더 가까웠지만.
병조의 낭관이 나간 뒤, 이순신은 자신의 처지를 깊이 반추했다.
“내가 경공방에게 보내진다고……?”
그리고 그날따라, 아직 옥에 갇힌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이현? 공사가 바쁠 터인데, 어찌 이런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당분간 조선을 떠나 있어야 할 듯하여, 얼굴이나 보러 왔네.”
“명에 주청사로 가는 모양이군.”
아직은 명목상으로나마 조선 내에서는 해금령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문관이 타국으로 나간다고 한다면, 명에 사신으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친우 추측에 고개를 저으며, 뜻밖의 장소를 말했다.
“아닐세. 내가 갈 곳은 일본국의 주본이라는 곳이라 하더군.”
“주본이면…….”
“일본국에는 난파경(難破京, 나니와쿄)라 하여 도성이 따로 있네만, 경공방의 도읍이 따로 있다 하더군. 거기에 공사라는 직책을 받아서 얼마간 상주하라는 어명을 받았네.”
간단하게 설명을 들은 이순신은 방금 그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우연은 아닌 모양일세.”
“자네의 새 근무지 말인가?”
“그렇다네.”
유성룡도 언질을 들을 만한 위치였다. 아직 대감 소리는 듣지 못해도, 고작해야 한 품계 차이에 불과했다.
일개 무관의 향방 정도는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경공방이 자네를 달라고 지목했다더군.”
“나를? 무슨 연유로?”
“일본인 상인에게 공정한 판결을 한 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왕 백의종군을 시킬 거라면, 자신에게 보내 달라. 전하께 그렇게 청을 넣었다더군.”
“고작 그런 이유로 말인가.”
이순신은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그와 친구를 호출한 자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짐작이 가는 게 없지는 않네만…….”
“당파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군.”
“나도 그리 생각한다네. 율곡 대감과 송강 그자의 전례가 있으니 말일세.”
이 두 사람이 당사자이긴 했어도, 결국 그들 선에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유성룡이 다녀가고 잠시 후, 마지막 손님이 감옥을 찾아왔다.
“자네로군?”
“대감께선 누구신지……?”
이순신은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갓끈에 달린 자그마한 옥관자를 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종1품에 해당하는 고위 인사일 터였다.
정승으로서 그만한 벼슬에 오르려면 나이도 상당해야 했다. 그러나 방문객의 연치는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노인은 또 아니었다.
이립과 불혹의 중간 정도쯤 될까. 그 정도에 1품관이라면, 종친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나는 이연이라는 사람일세. 과분하게도 종친으로 태어난 덕에, 하성군이라는 군호까지 받았지.”
“무슨 일로 소장을 찾아오셨습니까?”
“내가 나름 소서 공방과 친밀한 편이지만, 도저히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워서 말일세. 그가 자네를 콕 집었으니, 어떤 인사인가 좀 보려고 왔네.”
당금 종친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옥에 갇힌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대감, 비록 소장이 파직된 몸이라 하나, 조선의 신하이올시다.”
“알고 있네. 허나 어쩌겠나. 호기심이 예를 잊게 만들 정도이니……. 어쨌든 상당히 꼿꼿한 인사로군. 과연 전하께서도 눈여겨보실 만한 자야.”
“대감.”
아무리 왕의 신임을 받는 하성군이라고 해도, 명백히 실례인 행동이었다. 이순신은 순간 눈꼬리를 치켜올렸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하성군 역시 그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지만, 굳이 상대를 책하려는 눈치는 아니었다. 애초에 잘못이 그에게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미 여긴 조선의 모든 이목이 모인 자릴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감옥이 아니라 자네에게 쏠린 것이지만.”
하성군은 그렇게 말한 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이렇게 생각 없는 모습도 보여야 목숨이 안전한 법이거든.”
“대감?”
“겸사겸사 개인적인 호기심도 채우고.”
하성군은 세자를 제외하면 대권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흠 잡힐 일을 일부러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상대가 속내를 드러낸 만큼, 이순신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어쨌거나 하성군이 그를 이용하려는 모양새였기에.
“스스로의 구명을 위해, 소장을 욕보이시는 겁니까?”
“말했잖은가. 경공방의 속내를 모르겠다고.”
그간 경공방과 왕실이 약정한 바가 있어, 유성룡의 일본행은 그리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굳이 죄를 지은 무관을 집어서 데려가겠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성군은 그렇게 자신의 호기심 밑에 깔린 이유를 밝혔다.
“전하께서도 궁금해하시더군.”
“어명입니까……?”
“그저 속편하게 다녀오되, 경공방의 곁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잊지 말게. 이게 내가 자네에게 전해야 하는 어명일세.”
어명이라는 글자를 들은 이순신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미 하성군은 자신의 말을 모두 마친 뒤였다.
“이제 일어나시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아니 될 것이네. 자네의 친구라 할지라도 말이야. 명심하겠나?”
“어명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따를 일입니다.”
* * *
조선 측은 내게 상당한 특혜를 베풀었고, 그중 하나는 연락선의 자유로운 출입이었다. 원래 강화도의 경계는 삼엄하고, 외국의 선박은 출입이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은 내게 다섯 개의 어기를 주었고, 그걸 지닌 연락선에 한해 조선 내 어디든 입항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그 쾌속 연락선으로 마사노부가 그간 있었던 일을 알려 왔다.
“낭인들이 변을 일으키려 했다…….”
“그렇습니다, 쿠보.”
서신에는 모든 것이 세세하게 적혀 있어, 전령에게 따로 물어볼 것은 없었다.
회유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 했다. 서신을 보낸 시점에는 벌써 반 이상이 넘어왔으니, 나머지도 곧 칼자루를 고쳐 잡을 것으로 보인다고도 적혀 있었다.
“훌륭하군. 좋은 본보기가 되겠어.”
모든 일에는 흐름이 있는 법이다. 반란도 한번 불발로 끝나고 나면, 나머지 불온한 무리들도 망설이게 마련이었다.
내게는 상당한 호재로 작용할 터였다.
“혼다 공은 쿠보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여쭈라 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곧 갈 생각이기는 했다만……. 이쪽도 사정이 제법 복잡하게 돌아가서 말이야.”
다행히도 남겨 둔 사람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태가 종식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당분간은 떠나 있어도, 별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덕원(오늘날의 원산)으로도 연락선을 띄우라고 덧붙였다.
“덕원이 어디입니까?”
“조선의 동쪽 바닷가는 그 지세가 완만하지. 그 가운데에서 가장 깊은 곳이 바로 덕원이다. 한양에 비교하자면, 북으로 한 사오십 리 길쯤 되겠군.”
“하오면…….”
“마사노부에게는 입에 발이 달렸다고 말해라. 그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방금 한 말은 글자로도 남기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나는 구두로 지시를 내렸다. 전령은 그 말을 곱씹은 뒤, 다시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그렇게 하나의 일이 끝나자, 심부름꾼이 내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쿠보, 조선의 손님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이순신이라고 하는데…….”
“이런,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어서 모, 아니 들이게.”
마침 올 때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의종군 중이기는 했어도, 그 표현은 어디까지나 상징에 불과한 것. 철릭을 입은 방문객은 영락없는 조선의 군관의 행색이었다.
“어서 오시……게. 내가 일본국 경공방, 소서행장이라 하네.”
무심코 극존대를 할 뻔했다. 물론 상대의 위상을 생각하면 상관은 없을 거 같지만.
“소장,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이라 하오. 어명을 받들어, 경공방의 휘하로 배속되었소.”
“다시 한번 환영하네.”
나는 그렇게 이순신을 맞아들인 뒤, 교통정리부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전히 불편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 휘하로 들어왔다고는 하나, 엄연히 이 공의 신분은 조선의 신하일세.”
만약 내 지시나 요청, 요구, 그 외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조선의 이익과 배치된다고 생각된다면, 따르지 않아도 좋다.
굳이 조선의 이익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스스로에게 해롭다는 생각이 들면, 거부할 수 있다.
당분간은 조선의 북쪽 국경을 돌아볼 것이며, 그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갈 예정이다.
이러한 것들을 객장에게 알려 주었다.
“조선의 북쪽 국경이라면?”
“아무래도 내 손으로 끝을 맺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일세.”
“소장이 들을 수 있겠소이까?”
“돌아간 뒤에. 그때는 말하도록 하지.”
아무리 내가 조선에 믿을 만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고는 해도, 북변에 가는 진짜 이유는 드러내기가 곤란했다.
비록 추정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어릴 적에 다른 집으로 입적했다고는 해도, 어쨌든 동복형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자가 여진족과 손을 잡고 조선의 국경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에.
내 말을 들은 이순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질문을 바꾸었다.
“혹여 소장과 관련이 있는 일이오?”
“이 공하고? 딱히……. 그렇지는 않군. 물론 길안내를 좀 부탁하고 싶긴 하지만, 전적으로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일일세.”
아무래도 이순신은 자기가 불려온 것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진실을 밝힌다면, 날 미친놈으로 보겠지만.
당신이 번개숨결을 날리는 조선 최강의 수군통제사요. 그렇게 말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 쪽 사람이 누명을 쓸 뻔한 것을, 제대로 판결해주었다고 들었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소.”
“그 마땅한 걸 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
이야기가 계속 늘어질 것 같은 모양새라, 나는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나는 닷새 후에 덕원을 거쳐, 이 공이 근무했던 북변으로 갈 예정일세. 약간의 말미가 있으니, 가족들을 만나고 와도 좋네. 혹시 따라오겠다는 이가 있다면, 같이 와도 상관은 없고.”
“혹여 소장의 편의를 생각하시는 거라면…….”
“조선의 북변은 춥고 험하다고 들었으니, 채비를 단단히 갖추어야겠지. 일본국은 꽤 따뜻한 편이라 말일세.”
이순신이 도망갈 인사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를 믿고 약간의 여유를 주었다. 과연 닷새가 지난 뒤, 그는 다시 동평관에 나타났다.
나는 한 사람이 늘어난 일행을 대동하고, 목적지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