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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51화 (151/225)

151화 넓어진 천하(10)

누르하치가 누구를 말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와 비슷한 외모를 한 사람이 여진족과 같이 있다면,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외다. 나는 경공방 소서행장이라는 자이고, 방금 전에 한성에 들어왔소.”

“그,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너는…….”

눈앞의 여진인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 와 있었던 하성군이 나서자, 일단 입을 닫는 모양새였다.

“그대가 어디에서 누굴 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 있는 사람은 북변에 갈 일이 없었네.”

상대는 하성군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눈치였으나, 복색에 위축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일단 하성군을 진정시킨 뒤, 다시 누르하치를 보았다.

“하지만 누르하치 공이 누구를 보았는지 짐작은 되오이다. 물어볼 이야기가 아주 많으니, 일단 앉으시구려.”

“실례가 많았소이다.”

누르하치는 멋쩍게 합석했다. 하지만 여전히 물어볼 게 많은 듯한 눈치였다.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려고 해도, 그게 해결되지 않으면 이 자리 자체가 붕 뜰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간단하게 언질을 주었다.

“내 적 중에 나와 외모가 비슷한 자가 있소. 공이 보았다는 사람이 아마 그일 것이오.”

“그렇, 습니까?”

딱 그 정도면 적당할 터였다. 괜히 옛 이야기를 세세하게 말하다 보면, 까다로워질 이야기가 많았다.

가령 조선에 처음 왔을 때, 신분을 속인 일 같은 것들 말이다.

괜히 조세이가 누구며 나와 어떤 관계일지 하나하나 짚어주는 것도 까다로울 터였다. 사람이란 전부 말해줘도 일부만 기억하고, 자기 편한 대로 혓바닥을 놀리는 동물이 아니던가.

당장 조선에도 조세이가 나와 형제라는 걸 알면, 그걸로 물어뜯을 자들이 많았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자를 어디에서 보았소?”

“부간이 여러 족장을 자신의 부족에 부른 일이 있었소. 그 스스로가 직접 앞으로 나온 적은 없었으나, 먼발치에서 본 얼굴은 분명 그대의 것이었소이다.”

“하지만 나는 조선의 북쪽 국경을 넘은 일이 없고, 조선에 해가 될 일은 더더욱 할 수가 없는 몸이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뒤, 누르하치에게 술을 권했다.

“어쨌든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소. 공이나 나나 먼 길을 와서 이리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소이까. 한 잔 받으시오.”

“나 또한 실례가 많았소이다. 내 잔도 받으시구려.”

그렇게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나는 상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내가 아는 그 이름이 맞다면, 이 사람도 그냥 넘길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정말 역사대로 누르하치가 날뛴다고 해도, 일본에는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조선과 긴밀하게 엮인 지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정말 왜국, 아니 실례. 일본에는 높은 사람들의 대역이 존재한단 말이오?”

“그렇소. 워낙 권모술수가 판치다 보니, 생긴 일이라 하더구려. 그래서 변장에 능한 자들도 적지 않소.”

누르하치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건 아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소한 주제가 오갔다.

그는 편한 태도를 가장하면서, 내게 바짝 붙는 모양새였다. 계속 술잔을 주고받은 끝에 은근슬쩍 호형호제까지 할 정도로.

물론 유목민 문화의 ‘안다’라고 하는 그 의형제까지 간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게도 끈을 대려는 듯한 태도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 역시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굳이 쳐낼 이유는 없었기에, 어느 순간 호칭이 바뀌는 것에 맞춰주었다.

“소서 형장께서는 조선에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우리 상인 중 하나가 첩자 혐의를 받아서, 그걸 해명하러 왔다네. 자네는?”

“이 동생이야 결국 조선에 도움을 청하러 왔지요. 그 부간이라는 자 때문에 말입니다.”

밤은 이미 깊었고, 하성군을 비롯한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서인지, 누르하치는 한결 편한 모습이었다.

“형장께서는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히 존중받으시는 듯했습니다.”

“뭐, 오랫동안 교류한 세월이 있어서겠지.”

“고작 그런 걸로 조선 사람들의 태도가 속까지 정중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모든 조선인들이 누르하치가 보는 것처럼 대하지는 않았다.

역시 그들을 동인이라고 부른다던가. 어쨌든 붕당의 존재는 여전했고, 왕실을 견제하기를 바라는 자들도 그대로였다.

하필 그 반대편에 정철이나 윤두수 같은 자들이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호의를 베풀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런 속사정까지 알지는 못했을 터였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우리 족속은 조선과 명 사이에 끼어서, 그저 억눌리기만 할 뿐입니다.”

“풍문에 의하면,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힌다고 하던데?”

은근하게 정곡을 찌르자, 여진족의 젊은 족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도 제 딴에는 나름대로 명분이라고,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원래 조선과 명의 일부는 우리가 살던 터전이었습니다. 척박한 땅으로 내몰렸는데, 발버둥은 쳐야 했지요.”

“그렇다면 말일세. 내가 식량을 대어주면, 자네는 노략질을 하지 않을 수 있겠나?”

“농도 지나치십니다. 저 먼 일본에서 어찌 그리 하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물론 공짜로 주겠다는 건 아닐세. 하지만 자네들이 값만 잘 치른다면, 수량에 제한 없이 거래를 할 수는 있지.”

나는 그렇게 말을 맺은 뒤, 그대로 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주었다. 여진족은 교역의 제한으로 통제를 받고 있었으니,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일 터였다.

과연 누르하치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의문을 제기했다.

“조선이나 명이 그 꼴을 두고 보겠습니까?”

“조선이야 내가 설득하면 되고, 명은 자네가 주의하면 되겠지.”

내가 자신 있게 말하자, 상대의 기색도 온전한 의문에서 반신반의로 기울었다.

“당장 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차차 생각해보시게.”

*       *       *

다음 날, 나는 바로 궁에 불려갔다. 신하들이 모여 있을 대전은 아니었고, 한 구석에 있는 작은 전각이 알현 장소였다.

사관은이나 내관은커녕,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왕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를 정한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뵈옵니다, 전하.”

“편히 있게. 이제는 자네도 일본국 대군이 아니던가.”

조선은 막부의 정이대장군을 대군이라 칭했다. 그리고 나는 정이대장군과 동격 또는 이칭에 해당하는 공방(公方)이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처음 조선에 왔을 때를 생각하며, 위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어쨌든 조선의 신하는 아니었기에, 나 역시 사양 않고 권하는 대로 격식을 바꾸었다.

그렇게 예를 정한 뒤, 조선의 국왕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사실 내게 사실 관계를 묻기보다는, 자기 고민을 상담하는 듯한 모양새에 가까웠다.

“사실 이치대로만 처리를 하자면, 이일에게 책임을 묻는 게 맞겠지.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네.”

“소인도 상인들 편에 들은 바가 있기는 합니다만…….”

“집안의 추한 꼴을 바깥에게 보이게 되어 민망하네만, 자네 정도면 아주 남이라고는 할 수도 없을 걸세.”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왕이 급발진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왕이 내게 보이는 친근감도 이해가 가능한 범주에 속했다.

화약의 안정적인 공급이 왕권 강화로 이어졌다던가.

골골거리다 죽었을 사람이 저렇게 건강한 걸 보면, 역시 손에 쥔 힘이야말로 만병통치약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걸 처방한 게 내가 아니던가.

흘러간 일을 속으로 되짚는 사이, 조선의 국왕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조선의 조정은 두 패로 나뉘어 있네.”

“그런 걸 소인에게 말씀하셔도…….”

“자네와도 연관이 없지 않기에 하는 말일세.”

왕의 설명에 의하면, 동서 양당의 성격은 내가 알던 것보다 선명한 색을 띄고 있었다.

일단 기원은 그대로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이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원래대로 흘러갔다면, 유교 경전의 해석과 임진왜란을 거쳐 갈등이 심화되어야 했을 터였다.

그러니 지금은 붕당의 색채가 옅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붕당은 그 색채가 원래의 역사와는 조금 달랐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일본에 다녀갔던 이이와 정철, 그리고 그들과 엮인 사람들이 서인을 형성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부산포에서 벌어지는 일을 탐탁찮게 여기는 자들이 모여서 동인을 이루었다고 했다.

물론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여말선초의 개판은 사대부들에게는 천지창조 직전의 흑암 같은 것일 테니까.

게다가 사람은 한번 태도를 정하면, 그걸 바꾸기보다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는 동물이기도 했다.

게다가 부산포에서 벌어지는 교역이 양 붕당의 거리를 더욱 갈라놓았다고 했으니, 왕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왕은 붕당의 형성과정을 짤막하게 설명한 뒤, 한숨을 내쉬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줄곧 서인에게 무게를 실어줄 수밖에 없었네. 동인은 교역을 줄이자고 하는 자들이니, 섣불리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왕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직접 올 정도니, 상인 천삼랑이 간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야. 그런데 달리 말하면…….”

“전하께서 신임하시는 장수 이일이 거짓을 고한 셈이 되지요.”

“고한 셈이 아니라 거짓을 고한 것이지.”

굳이 편가르기를 하자면, 서인이 근왕파에 가까웠다. 지금 왕의 고민은 거기에서 기인하는 듯했다.

“동인이 세를 얻는 게 두려우십니까?”

“그렇지는 않네. 어느 쪽이든 조선의 신하이니.”

“하오면?”

내 질문을 받은 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산포의 교역은 이제 와서 축소할 수는 없겠지. 그러니 동인에게 힘을 실어주어도 상관은 없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서인이 너무 커져서 문제로군.”

“전하께서는 조선의 지존이 아니십니까?”

“왕이 어디 혼자서 왕이던가.”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말한 것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탕평책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세도정치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런 미래의 일을 보지 않고도 통찰할 수 있다면, 충분히 현자라고 해줄 만했다. 물론 아직 본인이 붕당에 휘둘리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왕은 동서 양당 사이에 완만하게 균형을 맞추고 싶은 눈치였다.

“그, 이순신이라는 장수는 어떤 자입니까?”

“이순신? 자네도 들어서 알겠지만, 무척이나 고지식한 장수지.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가네만…….”

역시 붕당이 엮인 문제였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혹시 지금 동인 중에서 장래가 유망하고 능력이 뛰어난 자는 누구입니까?”

“흠, 아무래도 동지사 유성룡이겠지.”

내 질문에 마침 원하던 이름이 나왔다. 유성룡이라면 이순신의 친구요, 그를 후원하는 입장일 터였다.

왕이 그를 심중에 두고 있다면, 이야기는 더욱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소인이 전하를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기꺼이 경청하겠네.”

“부산포의 관료들 중에는 간혹 부패한 자들이 있다고 하니, 증언을 모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쪽은 서인들이 주로 있다고 하니, 억제할 명분이 될 터였다. 그리고 예전에 이이와 정철이 그러했듯, 동인도 키워주면 그만이 아니던가.

“유성룡이라는 신하와 이번 일에 관련된 이순신이라는 장수를 제게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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