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넓어진 천하(9)
“이봐, 좀 더 물량을 좀 더 늘릴 수 없나?”
“몰래 숨겨서 들여오는 것인지라, 말씀하신 만큼을 가져오긴 어렵습니다.”
부간은 조세이에게 화약을 더 사들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일부러 물량을 줄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봐, 북방의 말을 가져가면, 그 쿠보인가 유키나가인가 하는 자를 상대하기가 쉬워질 거라고 하지 않았나?”
“저희 주군께서는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적의 세력을 깎아서 이쪽으로 돌리는 방법도 생각해보라고 전해라. 들어보니, 우리 여진족이나 왜인들이나 별 차이도 없는 모양이더만…….”
조세이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자기가 화약을 더 먹고 싶다고, 이쪽더러 사지로 들어가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여진족과의 교류가 절실했다. 그게 조세이가 발휘하는 인내심의 근간이었다.
그가 부간에게 화약을 전달하는 길은 복잡했다.
먼저 에조치 동쪽 쿠슈르에 베르나르두라는 상인이 물자를 가져온다. 그리고 에미시들이 카르 푸트라고 부르고, 발음하다보면 가라후토(사할린)이 되는 이름의 섬으로 조심스럽게 옮겨야 했다.
고니시 수군의 초계망은 얇았지만, 에조치 전체를 둘러싸다시피 하고 있었다. 에미시 어부로 위장해서 소량씩 옮긴 다음, 다시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서 아무르 강 하구까지 가져와야 했다.
말을 가져가는 건, 그 이상으로 어려웠다. 고기잡이 배에 큼직한 짐승을 싣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금 조세이가 사들인 여진족 준마는 대부분 가라후토에 머무르고 있었다.
경로가 확보된 이후로는, 베르나르두가 카르 푸트로 직접 오면서 여건은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잘게 쪼개진 놈들을 휘어잡는 게 별건가? 힘을 보여주면, 알아서 기게 마련이잖나.”
“족장의 말씀,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조세이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 * *
“부산포가 많이 번화해졌군. 예전에는 변방의 요새 같은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물론 그때에 비하면 사카이, 그러니까 지금의 나니와쿄나 스모토도 상당히 변했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부산포는 전에 보았던 한양보다도 훨씬 대단했다.
내 감상을 들은 소 마사나가가 입을 열었다.
“조선 측이 들인 공이 상당합니다. 공인을 불러 모아서 온갖 공방을 꾸렸지요. 그렇게 사람을 모으니, 또 사람이 사람을 부르더군요.”
“동양 무역회사가 가져가는 상품의 양도 상당하겠지.”
요즘은 인삼과 모피 같은 다른 상품도 늘었지만, 조선 교역의 본질은 도자기였다.
명나라는 유럽 상인들에게도 똑같이 조공 무역의 틀을 강요했다. 거래할 수 있는 수량에 한도를 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양을 줄여서 압박을 걸었다.
그나마 생사와 비단은 밀무역으로 나오는 양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도자기는 그렇지가 못했다.
농산물은 상대적으로 수량을 속이기가 쉽지만, 공업품은 파악이 쉬웠다. 밀무역으로 나올 수 있는 물량에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조선의 도예 기술은 중국에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동양 무역회사를 통해 회청까지 들여올 수 있었기에, 원래 걸렸던 제약마저 풀려 있었다.
유럽 상인들 역시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는 명나라보다는 조선의 도자기를 더욱 선호했다.
어쨌든 지금은 유람이나 사업 목적으로 온 게 아니었기에, 나는 화제를 돌렸다.
“여진족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다던 일본인, 혹시 용모파기를 알 수는 없겠나?”
“쉽지는 않을 겁니다.”
“상세한 외양을 알 길이 없다 하더라도, 먼발치에서 체구를 확인할 수는 있지 않은가 말일세.”
내가 채근하자, 마사나가는 난색을 표했다.
“조선 측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성군 대감조차도 제 앞에서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역시 직접 조선의 국왕을 알현해야 일이 풀리겠군.”
그렇게 대화를 하는 동안, 검문선이 접근해왔다.
“소속과 용건을 말하시오.”
“동양 무역회사의 무역선이고, 안에는 경공방(境公方, 사카이 쿠보)께서 타고 계시오. 조선에 입조하러 오셨소이다.”
이쪽의 선원 하나가 그렇게 답하자, 조선의 검문선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군관 하나가 나왔다.
“소장은 해운포 만호 이순신이라 하오이다.”
“이순신? 이번 일에 연루된 장수의 이름이 이순신이라 들었소만.”
따라왔던 베드로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상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질문을 받았다.
“본관과 사용하는 글자가 다르오. 나는 왕실의 선파가 되는 사람이고, 지금 한양에 압송된 이순신은 본관이 덕수라 하더이다.”
“그렇구려.”
아무래도 이번에 검문을 나온 장수는 무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던 입부 이순신인 듯 했다.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마사나가가 부산포의 사정을 귀띔해 주었다.
“부산포 일대의 문무 관료들은 모두 왕의 신임을 받거나, 왕실과 친척이 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랬나…….”
전에는 하성군이 부산포 일대의 총책임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사정 때문에 한양으로 돌아갔고, 부산 판윤이라는 관리가 맡고 있다고 했다.
“판윤? 부윤이 아니고?”
“그렇습니다, 쿠보. 이 지역을 다스리는 관직이 동래 판윤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조선의 지방 조직은 부목군현으로 나뉜다. 물론 거기에 대도호부와 도호부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체계는 그렇게 짜여 있었다.
그리고 단위별 지방관의 관직명은 각각 부윤, 목사, 군수, 현감이었을 터였다.
판윤이라는 관직은 오직 하나, 도성에 해당하는 한성부에만 있었다.
어지간히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군관이 내게 다가왔다.
“일본국 경도(境都)의 공방을 뵙습니다.”
“수고가 많군. 이제 부산포에 배를 대면 되겠나?”
“그게 말입니다…….”
입부 이순신은 내 질문에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건 아닙니다.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입항하셔도 좋습니다.”
검문을 맡은 군관은 그렇게 말하며, 자기 나라 임금의 말을 전달했다.
“전하께서는 이 배로 강화부까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부산포에서 채비가 끝나는 대로, 속히 올라오라는 어명이십니다.”
“그런가?”
내가 되묻자, 입부는 품에서 교서를 꺼내어 내밀었다.
겉봉과 안에는 조선 국왕의 어보가 찍혀 있었고, 내용 역시 입부 이순신이 전달한 것과 일치했다.
“강화부라면 조선의 군사적 요충지인 것으로 아는데…….”
“사안이 시급하니, 지금에 한하여 특별히 허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알겠네. 그리 하도록 하지.”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배는 남만양선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갤리온이다. 과연 서해의 극악한 환경을 지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뚫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국왕이 초청을 한 상황, 문제가 생기면 적극 도와줄 터였다. 그러니 한번쯤 갤리온을 몰고 가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했다.
저쪽에서 뱃길을 열어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부산포에서는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물과 식량을 채운 뒤, 다시 서해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이틀간의 항해를 거쳐, 배는 강화도에 닿았다. 거기서부터는 다시 조운선을 타고 한양을 거슬러 올라, 마포진에 내렸다.
전에는 열흘도 넘게 걸렸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고작 나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 * *
노이합적, 음차가 아닌 본 발음은 누르하치라는 이름의 족장은 조선의 도성에 들어와 있었다.
울라부의 손길은 단순히 조선의 북변에만 뻗어 있지 않았다. 여진족이 힘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부족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많은 여진족들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부간에게 고개를 숙이고 울라부의 일원이 되거나, 조선 또는 명의 번호라 쓰고 충실한 개라고 읽는 무언가가 되거나.
일단 울라부는 그가 의탁할 그늘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간은 그와 같은 반열에 선 일개 족장에 불과했다.
그런 자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누르하치가 참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가 판단한 바로는, 결코 여진족은 홀로 일어설 수 없었다.
초원에는 식량이 부족했고, 동시에 사람도 부족했다. 아무리 여진족을 끌어 모은들, 조선이나 명나라 중 하나라도 상대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원래 대명제국의 요동총병관 이성량이 그의 후원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을 죽인 원수이기도 했다.
마침 조선과 명의 관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그 틈새야말로 누르하치가 끼어들 자리였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조선에 손을 내밀었다.
“언제쯤이면 입조할 수 있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구려. 전하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신지라, 시일이 걸릴 거요.”
지금 누르하치는 북평관이 아닌, 동평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원래 그는 조선에 전부터 귀부해왔던 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여진족에게 배정되는 북평관 대신, 동평관을 숙소로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열흘 가까이를 하릴없이 기다리는 동안, 그에게 역관 하나가 찾아왔다.
“드디어 허락이 떨어진 것입니까?”
“그건 아니오. 동평관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올 예정이라, 그걸 전하러 왔소이다.”
“왜인이라도 오는 모양이군요.”
그 말을 들은 역관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다.
“물론 속어로 왜라고도 하지만, 결코 그 앞에서는 왜인이니 왜국이니 하는 말을 쓰지 마시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저들의 국호는 일본이니, 일본국에서 온 일본인이라 알고 있으면 될 거요.”
누르하치는 일본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일본(日本). 그럴듯한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 일본에서 왔다는 사신이 부럽게 느껴졌다.
역관이 따로 찾아와서 주의를 줄 정도면, 조선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손님으로 다룰 터였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여진인도 아닌 여진족이었고, 야인이며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물론 조선의 관리들은 그를 정중하게 대했지만, 그 기저에 깔린 태도라는 것은 사소한 부분으로 와닿는 법이었다.
“어떻게 생긴 자인지 참 궁금하기도 하구만.”
“별거 있겠습니까. 왜인들은 키가 작고 뻐드렁니도 심하다고 하니, 그대로겠지요.”
같이 온 동생 슈르하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다. 역관이 따로 찾아와서 우리에게 주의를 줄 정도니, 얼마나 우대를 받는 자가 왔을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역시 일본인 하나를 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이 말하는 것처럼 흉측한 외모를 지닌 자가 아니었다.
누르하치의 호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역관이 다녀간 그날 저녁, 동평관의 빈방에 예고된 손님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외부 출입이라면 몰라도 객사 내부에서는 통제가 덜했기에, 누르하치는 일본에서 왔다는 자들을 방문했다.
“누구시오?”
“나는 건주위에서 온 노이합적이라 하네. 혹시 일본에서 온 손님을 만날 수 있겠나?”
자기소개를 들은 하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왔을 때의 얼굴은 실로 가관이었다.
“쿠보께서 누르하치 공을 귀히 모시라 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정확히 말하는군.”
“쿠보께서 그렇게 부르셨을 뿐입니다.”
불청객은 정중하게 안내를 받으며, 일본에서 왔다는 사람과 마주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뜻밖의 얼굴이 있었다.
“너, 너는 부간과 붙어먹은 왜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