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넓어진 천하(6)
동양 무역회사의 총관인 베드로가 아침 일찍부터 나를 찾아왔다. 옆에는 낯익은 소년 하나가 붙어 있었다.
“소씨 일족의 마사나가(宗正長 종정장) 쿠보께 인사 올립니다.”
“도주가 섬을 비우고, 여기는 어쩐 일인가?”
전 도주였던 소 요시시게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도 상당히 늙어서, 일족 중에서 적당한 사람에게 넘겼다.
그가 지금 나를 찾아온 마사나가, 사카이로 끌려왔던 마사모리의 막내아들이었다.
물론 요시시게가 완전히 은거한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의 마사나가는 쓰시마 도주 견습 정도라고 보면 될 터였다.
어쨌든 유즈야 야스히로도 아니고, 도주 본인이 직접 왔다. 이 이야기는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쿠보, 소인은 조선의 요구를 전하러 왔습니다.”
마사나가는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 이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조선의 북변에서는 여진족이 날뛰었다 하는데, 거기에 일본인이 개입된 정황이 있다 합니다. 하여, 관련자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우리와 여진족이 무슨 상관이 있어서?”
“소인도 하성군 대감께 전달만 받은지라…….”
중간에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사안이 엄중하다는 것만은 짐작이 가능했다.
나는 마사나가에게 두 통의 서신을 넘겨받았다. 하나는 조선 왕실의 국서였고, 나머지 하나는 하성군이 직접 쓴 편지였다.
‘조선의 국왕 이환이 일본국 경(境, 사카이)의 공방 소서행장에게 보낸다.’ 이렇게 시작된 국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얼마 전, 녹둔도에 다녀간 천삼랑이라는 자에게 여진족과 내통한 의혹이 있다. 그러니 문초를 위해 보내주기 바란다.
약간의 미사여구를 제외하면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하성군의 서신은 조금 더 자세했다.
[천삼랑이라는 자가 다녀한 시기가 공교로워 생긴 일일세.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극력 보호할 것이니, 사태가 커지지 않도록 그 상인을 보내주기 바라네.]
천삼랑(千三郞). 그러니까, 센 사부로라는 상인이 엮인 일이라고 했다. 그 한 사람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조선의 요구는 잘 알겠네. 나도 좀 조사를 해야겠으니, 잠시 쉬고 있게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 마사나가를 내보낸 뒤, 베드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선에 다녀올 일본인이라면 동양 무역회사의 배를 쓰지 않을 수 없지.”
“필요하실 듯하여, 센 사부로라는 자에 관해 조사를 해왔습니다.”
역시 전임 시정봉행이라는 것인지, ‘동무’의 총관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곧바로 자신이 들고 온 자료를 내밀었다.
“다나카 상회의 행수고, 부친은 도안(道庵 도암)……?”
갑자기 아는 이름이 나왔다. 본인과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부친, 그러니까 사부로의 조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소에키 선사의 손자로군.”
“그렇습니다, 쿠보.”
나도 모르게 턱으로 손이 갔다. 하지만 옛 생각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기에, 곧바로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소에키 선사는 본인의 대에서 성을 센으로 고쳤지만, 원래 다나카 일족이었지. 그러니 사부로라는 친구도 거기 속한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을 테고…….”
“바로 보셨습니다. 소에키 선사께서 사카이를 떠나시면서, 그 가족들은 선사의 여동생이 거둬들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간자가 아닐 가능성은 높겠군.”
사부로의 나이는 상당히 젊었다. 그런데도 벌써 상회의 행수까지 되었다는 것은, 일생을 전부 쏟아붓다시피 했다는 이야기가 될 터였다.
그런 사람이 여진족과 내통해서 간자 노릇을 한다?
에고슈의 전례가 있으니, 가능성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인으로서 도박을 걸었다 치더라도, 뜬금없이 여진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맞지가 않았다.
“문제의 장소는 녹둔도라는 곳이군. 당시 거기에 다녀온 관련자들을 모두 불러들이게.”
“지로라는 수부가 사부로 일행의 길안내를 맡았다고 합니다. 그자와 선장도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다나카 상회에도 사람을 이미 보냈다고 했다. 과연 능수능란한 솜씨였다.
“그럼 그들은 들어오게 하고, 소에키 선사의 손자가 올 때까지 잠시 기다리지.”
* * *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소장은 이미 아는 것을 모두 말하였소. 병사 영감께서는 어찌하여 사실을 곡해하려 하시오?”
녹둔도 만호 이순신은 경성의 북병영에 갇혀 있었다.
두만강 너머 훈춘의 둔전촌을 휩쓸고, 녹둔도에 육박해온 여진족은 조총을 사용했다. 그로 인해서 북병영과 거기 속한 제진이 발칵 뒤집혔다.
여진족에게 화약이 넘어갔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함경북도 국경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북병사 이일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하……. 이보게, 이 만호. 어찌하여 이리도 말귀가 어둡단 말인가. 여진족이 사용했다는 화약이 어디에서 나왔겠나.”
때마침 그가 써먹기 좋은 소문이 둘이나 있었다.
여진족 부락에 일본인이 다녀갔다. 그리고 녹둔도에 처음 온 상인 하나가 간자로 붙잡힌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 상인은 병장기의 운송을 맡았던 원균에게도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물론 화물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은 것은 온전히 원균의 책임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일과 같은 당파에 속한 자였다.
사실이 어떻게 되었건, 이일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책임을 떠넘길 액막이 인형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당시에 판결을 내렸던 이순신과 입을 맞춰야 했다.
“자네만 도와주면, 이번 사안은 쉽게 끝날 일일세. 어찌하여 그걸 모르는가 말이야.”
부하 장수에게 한참을 윽박지르던 이일은 태도를 바꿔서, 은근한 어조로 달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녹둔도 만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나 붙잡고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쉬운 일이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진족이 사용하는 화약의 출처를 캐낼 수 없소이다.”
“이 만호!”
그러나 이 문제는 이일이 단독으로 덮기에는 너무나도 커진 상태였다. 아무리 병마절도사라고 해도, 부하 장수를 임의로 처형할 수는 없었다.
이미 조선 조정에서는 녹둔도 만호 이순신을 한양으로 압송하라고 명했다. 그대로 보낸다면, 이일에게는 기군망상의 죄까지 더해질 판이었다.
이제 북병사에게 남은 수단은 하나였다.
“죄인이 바른 말을 토할 때까지 형신을 멈추지 마라!”
그의 지시에 따라, 군졸들이 이순신의 주리를 틀었다. 그 비명소리를 뒤로 하고, 이일은 밖으로 나갔다.
죽은 자는 입을 열지 못한다.
조선의 국법이 지엄하다고는 해도, 이일은 전장에 나온 장수였다.
몇 가지 재량권 정도는 있었고, 죄인에 대한 기초적인 신문 역시 그의 몫이었다. 고문 끝에 죽는 정도는 꽤 흔했다.
마침 이순신은 서인의 중진급 인사인 유성룡의 친구라 했던가. 여러 가지로 밉상인 부하를 치우는 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 * *
“꽤나 골치 아프게 생겼군.”
내 말을 들은 센 사부로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쿠, 쿠보! 소인은 결코 여진족과 내통하지 않았습니다. 상품도 조선인을 끼고 거래했고…….”
“알고 있네. 그래서 더 골치가 아프다는 이야기일세.”
“예? 그럼…….”
내가 머리를 싸맨 이유는 하나였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못하는 내 신세. 사부로가 결백하다는 걸 알지만, 그걸 입증하기가 마땅치가 않았다.
녹둔도에 만호영이 설치된 것이나, 훈춘에 둔전촌이 형성된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의 이름을 듣고 난 뒤에는, 막막하기만 했다.
함경북도 병마절제사가 이일이고, 그 부하 장수가 이순신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성군 대감은 피해가 미미하다 했지. 그런 일에 뒤늦게 자네를 불렀다는 게 이상하군. 혹시 짚이는 바가 없나?”
“쿠보,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말씀드렸을 겁니다.”
사부로 역시 자기 가슴을 치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상당히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그 균과 한 배를 탔다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병장기의 유실 여부는 국경의 문제라기보다는 동양 무역회사의 신용과 엮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피해가 미미하다고 하는데, 간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건 행간에 숨은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진정하고 이거로라도 속을 식히도록 하게.”
머리에 열이 올라서는 입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 나는 소에키의 손자에게 차갑게 식힌 차를 권했다.
사부로가 찻잔을 들이키는 동안, 소 마사나가가 지나가는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여진족이 화약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만, 혹시 관련이 있을지…….”
그 말을 들으니, 눈이 번쩍 떠지는 듯했다.
“그 이야기를 왜 이제 꺼내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습니까?”
“뭐라고?”
마사나가는 중요한 말을 내뱉고도, 그게 어떤 무게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쿠보, 화약은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잖습니까. 불꽃이나 선향불꽃만해도 스모토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다른 참석자들, 그중에서도 관료와 장수들의 낯빛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당장 나조차도 길게 들어줄 수가 없었기에, 일단 끊었다.
“이보게, 도주.”
“예, 쿠보.”
“그런 장난감은 유통량을 엄히 통제하지만, 본디 화약이란 병기일세. 그것도 개인의 무력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만드는 그런 무기지.”
장난감이라 해도, 대량으로 사들인 자는 반드시 적발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마사나가 역시 도시에서 평범하게 생활한 기간이 긴 나머지, 밖에서 어떻게 비치는가는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 그렇지요. 소인이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화약이라는 것은 상당한 전략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어쨌든 조선이 저렇게 민감하게 나오는 이유를 알 듯도 했다. 여진족이 화약을 사용한다면,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지금 조선에서 사용하는 화약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건너간 재료로 만들어지고 있을 걸세. 그러니 이쪽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곤 할 수 없겠지.”
“저어, 쿠보.”
이번에는 사부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생각나는 거라도 있나?”
“녹둔도에 도착한 셋째 날에, 모피를 가져온 야인이 소인과 흡사한 외모의 사람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참석자들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역시 뒤늦게 말했기 때문일 터였다. 사부로도 흉흉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뒤늦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천하가 넓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많으니 그들이 일본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야인들 중에는 남만 출신이 아니면서도 색목인이 있었다. 그러니 세상 어딘가에는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인종도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이번 사건의 주인공이 내놓은 변명이었다.
사부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단서가 주르륵 끌려나온 게 다행이었다.
“사부로, 자네는 안심하고 조선에 다녀오게.”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심부름꾼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치로와 쿄타로를 호출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