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넓어진 천하(4)
우스꽝스러운 소란을 뒤로 하고, 사부로 일행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중인 선원이 말한 대로, 조선 상인들이 여진족과 거래하는 중이었다.
“먼저 이곳의 만호 나으리께 허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지금 사부로가 들고 있는 문서는 부산포 첨사의 명의로 된 것이었다. 이곳에서 교역을 하려면, 다시 여기에 녹둔도 만호의 직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부로는 지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 어서 가세.”
성문에서 만호영(萬戶營)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미 영문 앞에는 동양 무역회사의 사람들 몇몇이 하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그들은 진문 앞에서 용건을 이야기했다.
“부산포에서 온 일본인 상인 천삼랑이라 합니다.”
“교역을 허가받으러 오셨소?
“그렇습니다.”
사부로의 말을 들은 군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초관 나으리, 소림차랑이 인사올립니다요.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지…….”
“오, 차랑이 자네도 와 있었군. 그렇잖아도 다른 선원들은 이미 얼굴을 비추고 갔는데, 자네는 좀 늦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네.”
지로와 문지기는 서로 안면이 있었다. 사부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은 그리 순탄하게 풀리지 않았다.
“조금만 일찍 오지 그랬나.”
“예? 무슨…….”
“오늘이 부산포에서 병장기가 들어오는 날이라, 병사 영감께서 점검 차 오셨다네. 하여 만호께서도 지금 성문에 계실 터인데, 오는 길에 보지 못했나?”
그 말을 들은 지로는 낭패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허가는…….”
“만호께서 오셔야 될 일이지. 지금 이 앞에 있는 사람들도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네.”
사부로가 아무리 북변이 초행길이라고는 해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다음 수순은 뻔했다.
“아무래도 오늘 받기는 그른 모양이군.”
일본인끼리 말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조선 사람은 알아듣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언제나 상황 속에 맥락이라는 것이 있었고, 초관 역시 사부로의 표정과 어투만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하기는 가능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지간하면 병사 영감이 돌아가신 연후에나 오라고 하겠소만, 잠시 기다려 보시구려.”
“혹시……?”
“나도 장담은 못하오. 단지 우리 만호께서는 상당히 성실하신 분이고, 오늘 일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들었소이다. 여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거요.”
다나카 상회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사부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군관이 권하기도 했으니, 한번 기다려 보세. 어차피 여기에선 달리 할 것도 없지 않나.”
“많이 추울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에는 조선의 언어에 능통한 사람들을 교대로 남겨놓고, 여각에라도 들어가 있는 편이…….”
이곳의 사정을 잘 아는 지로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사부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한다 해도, 내가 책임자이니 남아 있는 게 옳겠지. 자네들이 적당한 숙소를 잡아서 들어가 있다가, 교대로 나오면서 말동무나 해 주게.”
사부로가 생각하기에, 이번 상행은 첫 끗발이 개끗발이었다. 오는 배 안에서 원균이란 군관과 엮여 골치가 아프기도 했고, 지금 이렇게 또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는가 말이다.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여각에 들어가 있다가 엄한 일에 불똥이라도 튄다면, 영락없이 밀수꾼으로 걸릴지도 모를 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상단의 책임자로서 여기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거라고 여겼다.
“아이고, 저희가 무슨 염치로 행수 어른만 밖에 두겠습니까?”
“어허, 나는 괜찮대두.”
하지만 그의 위치가 위치였기에, 누구도 따뜻한 숙소에 들어가 있으려 하지 않았다.
졸지에 실랑이를 벌이게 된 사부로는 서기인 료스케에게 눈짓을 보냈다. 일행의 2인자로서, 적당히 총대를 메라는 의미였다.
상관의 눈치를 확인한 료스케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성문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전포를 입은 장수 하나와 병사들의 무리가 만호영을 향해 오고 있었다. 문지기를 하고 있던 초관도 그들이 오는 방향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병사 영감께서는 아예 병영으로 돌아가신 모양이군. 만호께서 오셨으니 어서들 채비를 하게.”
영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인들은 발 빠르게 자리를 비켰다. 하지만 역시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기에, 조선의 군관이 먼저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저들은 누구인가?”
“동양 무역회사 사람들입니다.”
“그렇군. 병장기가 동양 무역회사의 배로 왔다 했으니……. 안으로 들여보내게.”
녹둔도 만호는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영문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오느라 욕들 보셨소.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시구려.”
그 말을 들은 일본인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섰다. 그리고 잠시 후, 사부로 일행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 처음 왔다고?”
“그렇습니다, 만호 나으리.”
“‘동무’에서 사람을 붙여 주었다고 하니 잘 알거라 믿네만, 법에 어긋나지 않게 주의하도록 하게.”
만호는 사부로가 지니고 있던 통행증을 확인한 뒤, 자신의 직인을 찍었다. 그리고 사부로는 그걸 건네받으면서, 은화 한 닢을 상대의 품에 찔러 넣으려 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작은 정성이니 모쪼록…….”
일본에서 온 상인은 녹둔도로 오면서, 원균이라는 군관에게 불평을 들어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는 적당히 뇌물을 바쳐도 되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판단은 정답에서 어긋나 있었다.
“행수어른 대체 왜…….”
“아니, 어째서…….”
지로와 료스케가 아연실색했고, 뒤이어 녹둔도 만호의 호통이 떨어졌다.
“여봐라, 이자를 끌고 가라! 조선의 군관을 매수하려 한 것을 보니, 간자임에 틀림없다. 내 직접 문초할 것인즉, 당장 하옥하라!”
“나, 나으리!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부로는 뒤늦게 애원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와 그를 따라온 일행은 전부 만호영의 감옥에 갇혀야 했다.
료스케도 지로도 모두 사부로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사부로 역시 억울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아니, 부산포에서는 제 말을 잘 따르시더니, 갑자기 여기서는 왜 그러셨습니까.”
“일이 어찌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여기 만호는 공명정대하지만, 동시에 매우 엄격한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뇌물을 주다가 걸렸으니…….”
지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물론 그는 동양 무역회사에 속한 선원이었고, 선장이 나서면 풀려날 터였다.
하지만 옥에 갇힌다는 것 자체가 결코 좋은 일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들었던 녹둔도 만호에 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제대로 해명이 되기 전에 반병신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일행들이 모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동안,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그리고 바깥에서 밥 짓는 냄새가 풍겨왔다.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면, 지금쯤 쿠파를 먹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사부로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옥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죄인 천삼랑을 끌고 오라고 하셨다.”
사부로가 그들에게 이끌려 나가는데, 지로가 안면이 있는 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호, 혹시 동양 무역회사에서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자네들이 된통 걸린 것만은 사실인 듯하이.”
남은 사람들은 고개를 떨궜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사부로는 만호영 마당에 세워졌다.
“죄인은 할 말이 있느냐?”
아까 사부로 일행을 가두었던 만호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만약 그대로 간자 취급을 받게 된다면, 그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을 수 없게 될 터였다.
일본에서 온 상인은 마지막 발버둥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만호 나으리, 소인은 간자가 아닙니다! 부디 해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사부로는 그렇게 운을 뗀 뒤, 부산포에서부터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다행스럽게도, 녹둔도 만호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넘기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까, 같이 배를 탔던 다대포 만호라는 자가 뇌물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렷다?”
“그렇습니다, 만호 나으리.”
사부로의 심문은 그렇게 끝났다. 그가 다시 하옥된 뒤, 나머지 일행들도 차례차례 끌려 나가 전말을 고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해가 거의 다 졌을 무렵, 사부로 일행 모두가 다시 마당에 세워졌다.
이번에는 동양 무역회사의 선장이 녹둔도 만호 옆에 서 있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였다.
“죄인들은 들으라.”
판결은 비교적 간단했다.
“간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하였으나, 천삼랑이 조선의 군관을 매수하려 한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온 자들은 억울하게 휘말렸을 뿐이니 무사방면하고, 천삼랑에게는 곤장 열 대를 내려 엄히 경계하고자 한다.”
“가, 감사합니다. 만호 나으리.”
형은 즉시 집행되었다.
“한 대요!”
“두 대요!”
다섯이라는 숫자는 일견 작아 보이지만, 넓적하고 거대한 나무 막대에 그만큼을 맞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철썩 소리가 날 때마다 사부로는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의 엉덩이는 푸르딩딩하게 죽어 있었다.
“아이구, 아이구야…….”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 쓸데없이 뇌물을 줘가지고는…….”
“일이 어찌 이리 될 줄 알았나.”
사부로는 부하에게 타박을 받았지만,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로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초리가 결코 곱지 않았다.
“미안하게 되었네.”
그때 동양 무역회사의 선장이 사부로에게 다가왔다.
“이런 일도 아주 없지는 않소. 액땜한 셈 치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통행증을 전달했다.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부터 상품을 찾아보시구려.”
“아니, 이건…….”
조선행은 이번이 처음인 상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곤장까지 맞았으니, 교역 허가는 받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부로는 곤장을 맞는 동안, 부산포에서 빠르게 매입할 수 있는 물목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길이 아예 막히지는 않았다.
“처음은 실수이니 봐준다고 하시더구려. 한번 겪어 봤으니, 앞으로 어찌 처신해야 할지 잘 알 거요.”
그는 감옥에 갇힐 때도, 곤장을 맞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긴장이 턱 풀린 나머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할 거 같으면, 뇌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구려. 쿠보께 말씀드리면 될 일을 이리도 번거롭게 한단 말이오.”
“쿠보는 멀리 계시고, 여기는 만리타향이 아닙니까.”
“거, 울면서도 말은 잘하시는군.”
한바탕 촌극이 끝난 뒤, 다나카 상회 일행은 여각 한 곳을 숙소로 잡았다. 이제 조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사부로는, 문득 녹둔도 만호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이보게, 지로.”
“무슨 일이십니까?”
지로의 어조는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낮에 그가 받았던 은화의 효력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곳 만호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줄 수 있겠나?”
“녹둔도 만호 나으리 말씀이십니까?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이름은 이순신이라고 했던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