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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44화 (144/225)

144화 넓어진 천하(3)

하시바 히데요시, 그리고 그를 따라온 가토 기요마사는 요코츠 산 정상에 서 있었다.

고기잡이배나 드나들던 츠가루 해협에는 고니시 수군의 함대가 드문드문 보였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행보가 언제고 드러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벌써 수군을 배치해놓았을 줄이야.”

“송구스럽습니다, 성주님”

“아니다. 너와 조세이가 날 찾지 않았다고 해도, 언젠가는 유키나가 그자가 경계를 했을 것이다. 오다 가문의 가신이 여기 있다는 것부터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니.”

고니시 수군은 단지 초계만 다닐 뿐, 에조치(蝦夷地 하이지, 홋카이도의 옛 이름) 깊숙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최남단 오다테(大館 대관)에 위치한 카키자키 가문과 접촉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버려지다시피 한 땅에 함대가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초계가 너무 허술하지 않나.”

“조세이가 나름대로 이목을 잘 끌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그의 경쟁자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 자체를 마땅찮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감마저도 아까운 상황이었다.

그조차도 무사로서의 긍지를 내던지고 에미시의 복색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혼슈에서 온 이방인은 이제 에미시 사이에서 야마토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닌, 에미시 족장 유후이 카무이로 통했다.

그렇게 신중하게 행동한 결과, 에조치에서 가장 가까운 오슈에서조차 에미시 족장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모을 수 있다면, 다시 오다 가문의 천하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기요마사는 하시바의 천하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오다 가문 자체는 둘로 쪼개진 상태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꺾기 위해 고생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직 그의 주군은 아직 간토간레이,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시절에 살고 있었다.

기요마사는 자신의 속내를 말하는 대신, 다른 것을 말했다.

“하지만 아직 아군에게는 고니시 수군을 상대할 수단이 없습니다.”

“반드시 내가 유키나가를 상대할 필요는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을 무찌르려면, 당연히 쳐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기요마사의 주군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키나가의 힘이 빠졌을 때, 그때야말로 내가 돌아갈 날이 될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이상으로 자세한 설명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생각은 주군의 몫이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무사의 본분일 터였다. 조세이가 별종일 뿐.

가토 기요마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산을 내려가는 주군의 뒤를 따랐다.

*       *       *

일본에서 온 상인과 조선의 군관은 이제 어느 정도 친해진 상태였다.

검문으로 안면을 튼 두 사람은, 배 위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잡담으로 때우고 있었다.

“아니, 자네가 호의로 선물을 주는 것도 문제가 되겠는가?”

“아니, 서기가 그렇게 말을 해서 말입니다.”

“나 원……. 내가 품평까지 해 줬는데, 적어도 그림 한 장 정도는 그냥 줄 거라고 생각했네.”

사실 양쪽이 서로 친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새였다.

사부로는 군관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조선의 군관. 그에게 얼마든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였기에,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자자, 소인이 조선 경험은 처음이라 말입니다. 이거 받고 진정하시지요.”

“험험…….”

결국 그는 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내 쥐어주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아직도 창을 병기로 씁니까?”

사부로는 선창에 가득 실린 무기를 보고,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창의 위치를 총검이 대체한지 오래였다. 이렇게 긴 장창은 병사들의 발만 느리게 할 뿐, 철포 앞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창을 쓰지 않는 모양이군.”

조선의 군관은 오히려 일본에서 창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이렇게 길어서야 거추장스럽기만 하지요. 게다가 요즘은 철포, 그러니까 조선에서는 조총이라고 하던가요? 그게 더 쓸모가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조총이야말로 아녀자가 항우도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병기이네만, 북변에서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네.”

“아니, 만호 나으리. 철포, 아니 조총으로 안 되는 싸움도 다 있습니까?”

일본에서는 근래 들어 많은 표현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무뎃포(無鉄砲 무철포)라는 말이었다.

철포도 없이 싸운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거기에서 이런 말도 나온 것이다.

일본에서 온 상인에게는 당연한 인식이었지만, 조선의 군관은 고개를 젓기만 했다.

“여진족은 모두가 기마에 능한 자들이라서 말일세. 조총만 가지고 상대했다가는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 버린다네.”

“기마라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로는 그 스스로가 직접 전쟁을 겪어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말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휘하는 장수에게 시야를 제공하고, 무사들이 급한 전장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게 하는 이동 수단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마에 능한 무사도 말 위에서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고작해야 활이나 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다케다 가문의 아카조나에(赤備 적비) 부대조차도, 싸울 때는 말에서 내렸다고도 했다.

사람이 땅에 발을 딛고 사격을 한 다음, 서로의 병장기를 맞대는 것. 그게 사부로가 아는 전장에서의 싸움이었다.

“이거 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무리 경(境, 사카이)의 공방(公方, 쿠보)이 조선과 친밀한 자라고는 해도, 조선군의 전술과 전법은 군국기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군관은 자신이 말해도 되는 범위 내에서 설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포기했다.

“자세한 내용은 군무라 말해 주기가 어렵군.”

“어이쿠, 그럼 지금까지 해 주셨던 이야기들은…….”

“그 정도까지는 여항에서 잘 아는 내용이라 괜찮다네. 조선에 자주 드나든 일본인들도 아는 것들이니 말일세.”

갑자기 묵직한 주제로 바뀌면서, 졸지에 대화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사부로는 이쯤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군관은 여전히 대화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시기적절하게 선원 한 사람이 군관을 찾아왔다.

“만호 나으리, 계십니까? 아, 다나카 상회의 행수 어른도 같이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

“한 시진 뒤에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하역을 준비할 때였다. 사부로는 돈만 챙기면 되었지만, 군관은 병장기를 내려야 했다.

선원이 선장의 말을 전달한 뒤, 사부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바쁘실 터이니, 소인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시게.”

상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조선에도 부패한 관리가 없지는 않구나. 그런 생각만이 유일하게 얻은 소득이었다.

사부로는, 여기에서 반드시 좋은 상품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척이나 억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두만강 하구에 도착한다고 하더군. 슬슬 내릴 준비를 하게. 지금 다른 데 있는 사람은 어서 불러오도록 하고.”

“알겠습니다요, 행수어른.”

그리고 배가 항구에 닿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기는 녹둔도라고 했다. 부산포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여기는 저도 처음입니다만…….”

“선장이 안내해 줄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 했네. 잠시 기다려 보게.”

그 말대로 되었다. 사부로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선원 한 사람이 따라 내렸다.

“다나카 상회의 행수어른이십니까?”

“그렇네. 자네가…….”

“예, 선장님께서 행수어른을 안내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소인은 지로라고 불러주십쇼.”

지로는 부산포에서 료스케가 했던 것처럼 능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먼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여기에서는 어떤 것들을 살 수 있나?”

사부로는 일부러 어리숙한 흉내를 냈다. 이 안내인조차도 잠재적인 경쟁자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모험심에 따라온 것처럼 굴었다.

질문을 받은 지로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여기에선 모피와 말이지요.”

“말이라……. 조선의 군관이 여진족은 기마 전술에 능하다더군.”

“일본의 말은 여기의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요. 저걸 보십시오”

마침 옆에서 말 수십 마리를 끌고 가는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과연 사부로가 들은 대로, 말들은 거대한 덩치를 자랑했다.

“허어……. 저런 말도 다 있었군.”

“그럼 마시장으로 가시겠습니까?”

지로는 냉큼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사부로는 짐짓 망설이는 척하면서 거부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배에 싣기는 어렵겠지. 다나카 상회에 배정된 선창도 그리 크지는 않고…….”

그러면 결국 남은 선택지는 모피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여진족에게 직접 구하는 것은 금지되었으니, 조선 상인들을 찾으셔야 할 겁니다.”

동양무역회사 선박의 녹둔도 출입은 허용되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여진족과 직접 접촉하는 것만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조선 정부가 중간 유통의 이점까지 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운송비만큼이 빠지는 일이었기에, 동양 무역회사 직속의 상인이나 뱃사람들은 종종 이런 일로 용돈벌이를 하곤 했다.

지금 사부로를 안내하고 있는 선원도 모피를 고른 것이 영 마땅찮은 눈치였다.

“그럼 모피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세.”

다나카 상회의 행수는 은화 한 닢을 쥐어주며, 선원을 타일렀다. 역시 금전의 위력은 대단하여, 안내인의 관점까지 바꾸어놓았다.

이제 사부로는 그의 경쟁자가 아니라, 인심 좋은 고객이었다.

“조선 상인들은 토성 안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니, 그리로 가시지요.”

지로는 녹둔도에 자리 잡은 토성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런데 성문 주변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자네는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겐가! 창이 분명 이백 자루가 와야 할 것인데, 열 자루나 비잖나?”

“소, 송구합니다, 영감.”

“송구하면 단가?”

하지만 사부로가 아는 척을 하기에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와 같이 온 군관은 그의 상관으로 보이는 장수에게 한창 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 위에서 사라질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겠나? 당연히 자네가 애초에 잘못 실은 게 아닌가 말이야!”

사부로는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꾹 눌러가면서 조용히 옆을 지나갔다.

그의 일행은 행수가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보게, 만호. 대체 왜 일을 똑바로 처리하질 못하는 겐가?”

“여, 영감, 조금만 목소리를 낮춰 주시면…….”

“목소리를 낮춘다고 될 일이냔 말일세! 자네 부친은 적어도 일만큼은 똑바로 했는데, 어찌하여 자네는 이렇게 엉망인가?”

호통소리가 문루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부친이신 원 병사 어르신의 체면을 생각하면 이럴 수가 없잖나!”

자신을 원균이라고 소개했던 군관은 어지간히도 무능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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