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넓어진 천하(1)
“자네, 조선에 다녀올 생각 없나?”
“제가 말입니까?”
사부로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상회의 일원으로서, 조선에 다녀온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 햇병아리 행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 기회를 받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방은 사부로의 반문을 망설임으로 보았는지, 조선으로 가는 길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했다.
“뱃길이 험하다고는 해도 옛날 이야기고, 오히려 구로카와로 가는 항로가 더 험할 정도지. 그래도 내키지 않는다면…….”
“가겠습니다! 가고말고요."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로군.”
그렇게 사부로의 조선행이 정해졌다.
조선 상행은 다나카 상회의 사업 중에서도 알짜 중의 알짜였다. 다시 말해서, 책임자격인 행수로서 참여한다는 것은 상회의 중진으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조금 촉박할지도 모르겠네만, 출항은 닷새 뒤라네. 그리고 꼬박 석 달 일정이 될 것이니, 미리 주변에 이야기를 해 두게나.”
“상인에게 먼 길을 가는 게 대수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다나카 상회의 도방은 사부로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실무를 맡은 서기를 소개시키고, 스모토의 치소에 다녀오게 했다.
“소인, 료스케라 합니다요.”
“잘 부탁함세.”
다나카 상회에도 선박은 많았지만, 조선에는 오직 ‘동양 무역회사’ 선적만 출입이 가능했다. 게다가 타국에 다녀오는 것이니만큼, 절차가 까다로웠다.
다행스럽게도 이미 료스케는 상회의 서기로서, 그리고 사부로는 행수로서 치소의 관료들과 안면을 터놓은 상태였다.
“이번에는 좀 멀리 가는가 보구려.”
“멀다고는 해도, 쿠로카와에 다녀오는 것과 비슷하지요.”
“타국이란 가까워도 먼 법이 아니겠소이까. 여기 새 통행증이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사부로는 나머지 나흘을 정신없이 보냈다.
조선의 물산이 흔해졌다고는 하나, 역시 낯선 곳에 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상회에 출근해서는 가져갈 물목을 세심하게 살피고, 집으로 퇴근해서는 일가친척에게 먼 길을 다녀올 것이라며 인사를 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출항일, 다나카 상회의 행수 사부로는 서기 료스케와 짐꾼 열 사람을 인솔하여 배에 올랐다.
“다나카 상회에서 오셨구려.”
“그렇습니다.”
“번거롭겠소만, 짐을 푸시오. 절차는 절차니 확인 좀 합시다.”
‘동무’ 소속 서기는 다나카 상회 사람들에게 검문을 요구했다.
사부로 역시 상회 소속 선박에 외부인을 태울 적에는 반드시 검문하는 것을 보았기에, 선선히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시지요. 이보게들, 짐을 풀어 놓게.”
이번에 상회에서 준비한 물목은 주로 사치품이었다. 바다거북 껍질이며, 유리그릇, 그리고 각종 회화 따위 가볍고 비싼 상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역시 사전에 신고한 목록 그대로군. 좋소. 다나카 상회는 이 배의 을호 선실을 쓰면 되오.”
사부로가 승선한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승선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드디어 배가 스모토를 떠났다.
그걸 본 사부로는 이번 상행의 총책임자로서,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꺼냈다.
“배 안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네. 하지만 뭍에 닿았을 때는 반드시 나와 여기 료스케를 따라야 할 것일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짐꾼들 중 몇몇은 조선에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중간관리역을 맡아 준 덕에, 사부로와 료스케의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동무’의 남만양선(南蠻洋船, 갤리온)에서는 사부로도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갑판 위로 올라가서 바다를 구경했다.
료스케는 행수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듯이, 사부로의 옆에 찰싹 붙어 다녔다.
세 척의 남만양선은 쏜살같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다나카 상회에 속한 배들 중 가장 빠른 것조차도 세토해를 빠져나오려면 꼬박 하루가 걸릴 터였다. 하지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 그들이 타고 있는 남만양선은 어느새 방향을 우현으로 틀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남만양선은 참 빠르단 말입니다. 우리 상회도 이런 거 하나쯤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료스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도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무료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의 상관은 조선행이 처음이라고 하니, 이것저것 말할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사부로도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잡담을 받았다.
“아, 자네는 모르는 모양이군. 이미 우리 상회도 남만양선을 건조 중이라네.”
“그게 정말입니까?”
“이 배가 오천 석짜리라고 하던가. 물론 이렇게 큰 건 아니지만, 일천 석짜리로 남만식 조선 기술을 적용한 배를 발주한 상태라네.”
“그렇군요. 저는 계속 이 일만 하다 보니, 상회의 다른 사업은 잘 알지 못해서…….”
다나카 상회는 이렇게 큰 배를 갖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경계나 사지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그런 점에서 적당한 규모의 배를 사들이기로 한, 도방의 결정은 현명했다. 처음에 사부로는 단순히 배의 숫자를 늘리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남만양선은 작게 만드려고 해도 제법 비싸더군. 돛대를 튼튼하게 고정시키려면 그만한 비용이 든다던가. 그래서 나는 처음에 반대했다네.”
“지금은 생각이 바뀌신 모양이군요.”
사부로는 료스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빠른데 반대할 이유가 없잖나.”
토사에 입항하기 전까지, 사부로는 료스케와 이런 류의 이야기로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시 배가 떠나고 시코쿠가 보이지 않을 무렵에는, 소재조차 다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지루한 시간은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
“이곳이 조선인가.”
“예, 행수어른.”
부산포는 매우 번화한 항구였다. 사부로가 보기에 배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인구만큼은 스모토 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처음 그들이 승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조선의 군관이 배를 검문했다. 료스케는 물론이고 사부로 역시 조선말은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기에, 따로 통역을 사이에 두지는 않았다.
“전중 상회라……. 어떤 것들을 가져왔는가?”
“대모(玳瑁, 거북이 등껍질)와 남만에서 들여온 유리그릇, 그리고 그림을 좀 가져왔습니다.”
사부로의 말을 들은 조선의 군관은 회화에 주목했다.
“그림이라? 혹시나 묻네만, 공서양속(公序良俗)에 저해되는 내용은 아니겠지? 요즘 민화랍시고 음란한 것들을 가져오는 자들이 있어, 아주 골치가 아프다네.”
“저희는 선량한 상인일 뿐입니다. 이왕 보시는 거, 조선에서 어떤 반응일지도 좀 알려주시지요.”
다나카 상회의 행수는 품에서 은화를 꺼내, 군관의 품속으로 찔러 넣으려 했다. 하지만 료스케가 눈짓으로 말리고는 그의 귀에 입을 가까이 붙였다.
“이곳 군관들은 상당히 엄합니다. 함부로 선물을 주었다가는, 오히려 뇌물죄로 잡힐 수 있으니 주의하시지요.”
서기의 조언을 들은 사부로는 고개를 끄덕인 뒤, 검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애초에 문제가 될 만한 여지는 최대한 피해서 물목을 선정했기에, 검문에서도 잡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금지된 걸 가져오진 않았군.”
군관은 그렇게 말하며, 확인증을 사부로에게 넘겼다.
부산포에서는 쿠보가 발급한 통행증과 부산포 첨사 명의의 이 증서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만 운신이 가능했다.
“풍경을 그린 그림은 양반들도 좋아할 법하지만, 대개 중인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들을 가져왔군.”
“그렇습니까?”
군관은 뇌물을 받지 않고도, 간단하게 회화를 품평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봤던 그림 한 점을 가리키면서, 사부로에게 가격을 물었다.
“이 건 얼마쯤 하나?”
그가 지목한 그림은 와카야마 앞바다의 파도를 그린 것이었다.
“은 한 냥이면 됩니다.”
다나카 상회가 가져온 그림은 모두 판화였기에, 한 장의 가치는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조선의 화폐와 일본의 화폐는 그 형태가 달랐지만, 근본적으로 무게가 가치를 보증한다는 점은 같았다.
군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은화 한 닢을 내밀었다.
“여기 있네.”
“어이쿠, 감사합니다.”
사부로가 생각하기에, 이번 상행은 마수걸이가 좋았다.
검문도 그리 까다롭지 않았고, 심지어 그 검문을 하러 온 사람에게 제값을 받고 상품을 팔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예감은 아주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다나카 상회가 가져온 물건은 불과 하루 만에 모두 팔아치울 수 있었다.
“이래서 조선행이 알짜배기라고 하는 모양이군.”
“그렇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특히 운이 좋았습니다. 그림 같은 건 항상 잘 팔리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료스케는 그렇게 이번 상행을 평한 뒤, 주막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주모, 나 왔소!”
“어휴, 이게 누구야? 올 때가 됐다 싶었더니 바로 찾아오네그려.”
“여기는 이번 상행을 맡으신 우리 상회 행수어른이오. 그러니 쿠파 좀 푸짐하게 말아주시구려.”
주모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사부로는 조선에 온 경험이 전무했기에, 료스케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입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필요가 있었다.
“쿠파가 뭔가?”
“혹시 돈부리를 드셔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스모토 사람이 돈부리 한번 안 먹어 봤겠나?”
밥 위에 반찬을 얹어주는 음식은 스모토에서 무척이나 흔했다.
사먹는 입장에서는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수단이었고, 파는 쪽에서도 1즙 3채(국 하나에 반찬 셋)를 일일이 차려내는 것보다 쉬웠다.
어느새 유행하기 시작한 이 음식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돈부리라는 이름이 되었고, 이제는 스모토의 일상이 된지 오래였다.
“그거랑 비슷합니다. 대신 밥 위에 반찬을 얹는 게 아니라, 국 하나에 밥을 말아서 먹지요.”
“국이라니……. 너무 인심이 박한 거 아닌가?”
사부로는 자신이 아는 국물요리를 떠올렸다. 미소시루부터 요즘 흔히 보이는 우동까지, 간식거리는 몰라도 결코 끼니를 때울 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을 주막으로 이끌고 온 료스케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행수 어른이 아시는 그 국하고는 다를 겁니다.”
“흠, 일단 한번쯤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도 좋겠지. 그보다도 여기 차는 주지 않는 건가?”
“조선에서는 차보다도 그냥 냉수를 마십니다.”
조선이 처음인 상인은 다시 충격에 빠졌다.
재난 하나 사라지니 또다른 재난이라던가. 그 속담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쿠파라는 음식이야 그렇다 치고, 차도 없이 무슨 수로 목을 축인단 말인가.
“행수 어른, 걱정하지 마시고 한번 들이켜 보십시오.”
어느새 짐꾼 하나가 주막 앞의 우물에서 냉수를 길어왔다. 그의 태도도 서기만큼이나 능숙했다.
“아니?”
사부로는 자신의 혀를 의심했다. 차를 끓이지 않고도 이렇게 맛이 좋을 수가 있다니.
놀란 그는 물바가지를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료스케는 자신이 예상했던 바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상관의 행동을 말렸다.
“곧 쿠파가 나올 겁니다.”
때마침 그들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국밥 열두 그릇 나왔소.”
“고맙소, 주모.”
방금 전에 혀를 의심했다면, 이번에는 눈을 의심할 차례였다. 상회의 행수는 체면도 잊어버린 채, 자신의 눈을 문질렀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아닙니다. 조선의 인심은 매우 후하지요.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