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도시의 공기(3)
난세의 마지막 바람은 기나이도, 서국도 아닌 오슈를 휩쓸고 있었다.
“쿠보를 뵙습니다.”
“협정에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다테와 아시나 가문이 광폭 행보를 보이면서, 동북면의 많은 무가들이 멸망하거나 혹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나를 찾아온 사람은 난부 가문의 중신, 카메나이 마사츠구라는 자였다.
“저희 주군이신 난부 노부나오 님께서는 쿠보의 질서에 동참할 뜻으로, 가족들을 전부 내려 보내셨습니다.”
“허,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될 터인데…….”
협정을 체결한 무사에게는 약간의 유예 기간이 약속되어 있었다. 가족들을 전부 상경시키려면, 최소한의 준비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부의 가주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자신의 일가붙이부터 나니와쿄로 보내왔다.
“다테와 아시나, 그리고 모가미까지, 세 가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 뒤에는 쿠보께서 계시다 들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의 영지를 보호하는 걸 조금 도와주고 있을 뿐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사츠구의 말은 진실을 정통으로 꿰뚫고 있었다.
지금 오슈를 비롯한 동북면에서는 때 아닌 영토쟁탈 경주가 벌어지고 있었다.
선발 주자는 역시 마사미치가 이끄는 다테 가문이었고, 그 뒤를 모리우지의 아들인 모리오키가 이끄는 아시나 가문이 뒤따르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이 둘과 인척 관계인 모가미 가문이 뒤늦게 눈치를 채고, 협정에 가입해 왔다.
그 일대의 무가들 중 상당수가 이미 멸망했거나 혹은 이 세 가문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일단 난부 가문의 입장은 그들이 공격해 오기 전에 내 손을 잡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다급한 움직임처럼 보였다.
나는 방문객에게 차를 새로 한 잔 따라준 뒤, 진짜 목적을 물어보았다.
“정말 그것뿐인가? 이미 나는 협정서에 도장을 찍었고, 그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도움을 줄 것이네.”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난부의 가신들 중에는 하극상을 노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군께서 일가를 먼저 보내신 까닭도, 결국은 그들의 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지요.”
“솔직히 말해 주어 고맙군. 난부 가문의 후사가 끊기는 일이 없도록 적극 보호하겠네.”
안전보장을 확인받은 마사츠구는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갔다.
동북 지역의 변화를 보고 있자니, 문득 우에스기 토벌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상당히 춥고 궁벽한 동네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땅에서조차 권력 투쟁은 끊이지 않는 듯했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자니, 혼다 마사노부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예전의 일이 생각났을 뿐이네. 그보다도 협정의 내용을 좀 더 다듬어서 갱신해야겠군.”
이케다 군(郡)에서의 사건으로 나를 찾아왔던 무사들은 약속했던 내용에 맞추어 협정을 새로 체결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오히려 빈틈 투성이의 허술한 내용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혹은 그걸 노리고 따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협정의 내용이 곧 새로운 질서의 토대가 될 터였기에, 제대로 된 이름과 형식을 갖춰 놓는 편이 좋을 듯했다.
내가 다소 먼 미래의 일을 구상하는 동안, 마사노부는 눈앞의 사안을 고심하고 있었다.
“쿠보, 언제까지 저 세 가문을 내버려두실 생각이십니까?”
사람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시야가 달라지는 법이고, 일만 석이던 시절과 십만 석이 되었을 때의 마음가짐도 다르게 되기 쉬웠다.
그런 점에서 다테, 아시나, 모가미의 확장에 제동을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혼다 마사노부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걱정스러운가?”
“그렇진 않습니다만, 불온의 싹은 미리 잘라 버리는 편이 좋겠지요.”
“자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네만……. 당분간은 내버려두는 게 낫지 싶군.”
원칙상 저 셋 역시 쪼개놓는 게 이치에 맞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내 예감은 그보다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혹시 근거가 있소이까?”
이번에는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역시 거기에 뚜렷한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히사히데는 오히려 내 태도를 긍정했다.
“전장을 다니다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소. 예감에 따라 움직였더니 죄다 적중하는 그런 거 말이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치로가 보고하러 들어왔다.
“쿠보, 하시바 히데요시와 그 가신들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예감이 적중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후보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가류 닌자들은 난부 가문의 협조를 받아, 홋카이도를 살필 거점을 꾸렸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탐문한 결과, 그들의 행방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 보고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에조치(蝦夷地 하이지, 오늘날의 홋카이도.)로 들어가 에미시들을 복속시키는 중이라 했다.
“에미시 말로 ‘얌 왓까 나이’라는 곳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치로가 입에 올린 지명이 묘하게 낯익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홋카이도 최북단인 왓카나이가 그런 이름이었다고 했던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히데요시의 행적에 혀가 내둘러졌다.
홋카이도는 매우 넓다. 섬 하나가 그 자체로 내가 살았던 남한의 면적과 비등할 정도였다. 그런 중에도 남쪽일 삿포로도 아니고, 춥디추운 최북단까지 가서 뭘 하려는가 싶었다.
“천하에 관심을 버리고 멀리 북쪽으로 숨어들어간 거라면, 차라리 좋겠는데…….”
“제가 보기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온데 쿠보께서는 달리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혼다 마사노부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리 쉽게만 돌아가지는 않을 터였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자신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와 정의가 아주 깊은 편이었지.”
나는 그렇게 운을 뗀 뒤, 차 한 모금을 삼켰다. 대화가 상당히 길어질 것 같았다.
“그가 종적을 감춘 시기는 아직 노부나가가 살아 있을 때였고, 그렇다면 명을 받아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네.”
“가능성은 충분하겠군요.”
“나 역시 그리 생각하오.”
혼다 마사노부와 마츠나가 히사히데, 두 사람 모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부나가가 죽었으니, 하시바 히데요시가 택할 길은 두 가지일 터.”
“하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숨어 지내는 것일 테고, 나머지 하나는…….”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겠다고 들고 일어서는 것이겠구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후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주저앉아 있을 거라면, 굳이 자기 주변의 에미시를 복속하고 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진짜 불온의 싹은 따로 있었군요.”
마사노부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리고 그 뒤를 히사히데가 받았다.
“하지만 워낙 궁벽한 곳이라 토벌하기도 어려울 거요.”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골칫거리라 할 수 있지요.”
“뭐, 그런 이유로 당분간 동북면의 무가들은 잘게 쪼개놓기보다는, 갑작스러운 변고에 대비할 수 있게 큰 덩치를 유지시킬 생각입니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드러냈다.
“이치로.”
“예, 주인님.”
“당분간 히데요시의 동향은 감시만 하도록. 남하하기 시작하면, 그때 대응해도 늦진 않겠지.”
에미시가 무척이나 날래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세에 밀려난 자들에 불과했다.
여차하면 직접적인 토벌 외에도 다른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눈 아래 있다면, 언제든 대비가 가능할 터였다.
* * *
사부로는 상회의 도방을 따라, 카나메 일족의 공장을 찾아갔다.
“그렇잖아도 요즘 일손이 부족했는데, 다나카 상회가 도와준 덕에 한 시름 덜었소.”
“다 돕고 살자고 하는 짓이 아닙니까.”
다나카 상회의 배를 타고 온 밀항자들은 모두 이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도시의 삶에 익숙해지고 나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을 터였다.
공장장과 상회의 도방은 새로 온 사람들을 소재로 잡담을 나누며, 그들끼리의 친목을 다졌다. 그리고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목면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물량을 두 배, 아니 세 배로 늘려주셨으면 좋겠군요.”
“이 사람아, 나도 그러고는 싶네만…….”
도방은 자신이 예측한 바를 토대로, 주문량을 책정했다. 하지만 공장장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재료야 어떻게든 들어오고는 있네만, 문제는 사람일세.”
“그래서 새로 온 친구들을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까.”
“고작해야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단 말일세.”
그간 막혔던 관동에 상행이 가능해졌다. 갑작스럽게 확대된 시장은 그 자체로 거대한 수요를 자랑했다.
공장에서는 쉼 없이 실을 잣고 목면을 짜냈지만, 그것만으로 폭발하는 수요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했다.
비단 목면만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농기구를 비롯한 온갖 철물을 원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조금 먹고 살만해졌다 싶으면 칠기 따위의 사치품에 눈을 돌렸다.
난세의 끝과 새로운 시장. 이보다 장사하기 좋은 환경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스모토의 체질이 단단하다 해도, 그 수요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공장의 노동자들은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네. 모두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이지.”
“하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이 아닙니까.”
“이미 노를 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젓고 있잖나.”
다나카 상회의 도방은 더 이상 자신의 요구 조건을 강요하지 못했다.
돈을 내는 쪽이 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물건이 모자란 경우라면 을도 초월적인 지위를 누리는 것이 세상 이치였다.
여기에서 공장장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면, 상품을 배분받는 과정에서 다른 상회에게 밀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카나메 성을 쓰는 노인은 품에서 길쭉한 막대를 꺼낸 뒤, 끝에 달린 쇠그릇에 말린 풀잎을 가득 채워 넣었다.
남만에서 들어온 타바코(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는데, 공장장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그 모습을 본 도방 역시 능숙한 솜씨로 부싯깃을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후우……. 이제 좀 정신이 드는군. 이 타바코가 없으면 이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야.”
노인의 말에는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일단 사람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목면을 사러 온 사람들은 우리가 쉬는 꼴조차 보지 못하더군.”
“그거 참 무례한 자들이 아닙니까.”
“어쨌든 자네가 원하는 수량을 찍어내려면, 인력이 지금의 세 배, 아니 두 배만 되어도 넉넉할 걸세.”
사부로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다음 배에는 사람을 만선으로 싣고 와 보게.”
“그럴 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마는, 노력해 보지요.”
도방은 공장장에게 작별인사를 했고, 그 도방을 수행 중인 사부로 역시 상관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인력을 어떻게 충원할 것인가는 이제 모든 공장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