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뒷정리(4)
시마즈 가문이 정리되면서, 큐슈의 일도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내가 의도했던 변화들이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나를 무척이나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로군.”
오다 노부카츠가 나를 찾아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자신의 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그는 오다 가문을 자신의 형인 노부타다에게 넘기고, 은거 중이었다. 하지만 새로 가주가 된 노부타다는 자신의 아우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고 했다.
원래 노부카츠가 지니고 있던 영지는 그대로 유지하게 했고, 그 결과 노부나가의 차남은 오만 석 가량의 석고를 지닌 무사로 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네 형은 꽤나 관대한 처분을 내리지 않았나. 그것도 부친을 죽인 아들에게 말일세.”
“쿠보, 제 말을 부디 들어주십시오.”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노부카츠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자신은 단지 가문을 구하기 위해 나섰을 뿐이고, 노부나가의 죽음은 시바타 카츠이에의 실수에 불과했노라고.
“지금 오다 가문의 다른 가신들은 저를 죽이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네 형 밑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살려 주신다면, 쿠보의 개가 되겠습니다!”
노부카츠는 고개가 땅 밑에 파고들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문자 그대로 도게자(土下座 토하좌)를 연상케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 손에 들어와 있는 정보에 의하면, 그의 말에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다 노부타다나 그 가신들이나 애초에 노부카츠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본인의 망상이거나, 혹은 아직도 야심을 버리지 못했거나. 내가 보기에는 후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시범타로 쓸 재료치고는 상당히 큰 건수가 들어온 셈이었다.
“물론 자네도 협정을 체결한 상태지. 보호를 요청할 자격은 충분해.”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차를 잔에 따랐다. 동양 무역회사가 명나라에서 들여온 발효차였다. 오룡(烏龍)이라고 했던가. 기존의 녹차보다 묵직한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졌다.
“하지만 자네는 아직 오다 가문의 가신인 신분이 아닌가?”
제 딴에는 머리를 굴린다고 사전에 도움을 청하러 온 꼴이었지만, 그래서는 내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커지게 될 터였다.
“먼저 독립을 하게. 오다 가문의 가신이 아니게 된다면, 내가 보호를 해 준들 누가 뭐라 하겠나.”
“하, 하지만…….”
“고작해야 자네 성에 며칠만 틀어박혀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노부카츠는 똥 씹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배신을 교사하고 자신은 세에 밀려 마지못해 가문을 등진다. 이런 그림을 만들고 싶었겠지만, 너무 잔머리가 얕았다.
“그렇게 한다면야 내가 보호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결과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선후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남들의 시선도 달라지게 마련인 법이다.
내가 먼저 움직인 다음 노부카츠가 오다 가문에서 떨어져 나오면, 누구라도 내가 주도한 일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노부카츠가 먼저 가문에서 나온 다음 내가 협정에 따라 보호해 준다면, 세상은 노부카츠의 욕망에 주목할 터였다.
“개가 되겠다고 했나? 그런 건 필요하지 않네. 협정이나 잘 지키게.”
* * *
노부카츠는 돌아가자마자 오다 가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내게 다시 사자를 보내 보호를 청해 왔다.
동시에 오다 노부타다도 곧바로 나를 찾았다.
“쿠보, 협정에 따라…….”
“협정은 상호방위조약이 아닌가. 공격을 같이 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노부타다는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자기 부친을 가장 닮은 아들이라는 것인지, 머리는 꽤 잘 돌아가는 부류인 듯했다.
“혹시 노부카츠를 도우실 생각이십니까?”
“누군가가 공격한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노부카츠는 배신자입니다!”
노부타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자네의 관점이겠지. 하지만 노부카츠는 이제 오다 가문의 가신이 아니니, 그의 보호 요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나.”
“큿……!”
상당히 온화하다는 평을 받는 노부타다였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여전히 침착한 태도였다.
“쿠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노부카츠는 혈족을 두 번이나 배신했습니다. 그런 자가 쿠보의 밑에 순순히 남아 있으려 하겠습니까?”
“언제부터 그가 내 밑에 있었나? 협정을 체결한 사람들은 모두 대등한 위치에서 동의한 걸세. 자네도 그 당사자 중 하나가 아닌가 말이야.”
내 말을 들은 노부타다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물론 자네가 그 누구에게 공격받아도, 나는 협정에 따라 원군을 파견할 걸세. 하지만 협정을 맺은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는 건 이야기가 달라.”
“……알겠습니다.”
협정의 대상은 한 해 세입이 일만 석을 넘는 모든 무사였다. 그리고 누구의 위거나 아래에 있는 건 상관없었다. 그렇게 조건을 설정한 결과가 지금 이 자리에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저 역시 쿠보의 보호는 확실히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내게 등을 돌리지만 않는다면.”
“제가 죽은 뒤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입니까?”
“갱신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걸세.”
노부타다는 힘없이 기요스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다 가문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를 비롯한 몇몇 무사들이 추가로 이탈했다.
* * *
오와리에서 있었던 일은 소문의 형태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다른 대가문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다테 마사미치는 영지의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들은 아직 쿠보와 협정을 맺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난 전쟁에서 같이 발을 맞췄던 아시나 가문, 그리고 역시 참전했다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온 몇몇 가문을 제외하면, 동북면 일대는 공백 상태나 다름없었다.
영지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은, 도박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수중의 판돈을 걸고 얻거나 혹은 잃는다는 점에서.
하지만 사카이 쿠보의 보호가 있다면, 한 두 번의 패배가 멸문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마음을 정한 마사미치는 곧바로 서신을 작성해,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는 스모토로 보냈다.
- 주변의 정세가 어지러워, 쿠보의 군대가 주둔하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답은 매우 신속하게 돌아왔다.
고니시군이 일천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동맹이라는 도쿠가와 가문의 군대가 오천. 나름대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다테 가문의 본거지인 쿠로카와(黒川 흑천) 성에 입성했다.
“미카와노카미(종5위하 三河守 삼하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토리이 모토타다라 합니다.”
그 막강한 고니시군의 숫자가 다소 적은 편이었지만, 합치면 육천의 병력이 다테 가문의 영지를 지키러 온 셈이었다.
마사미치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그들을 맞이했다.
“잘 오셨소.”
“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쳐들어오진 않았지만, 주변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 말이오.”
도쿠가와 군을 이끌고 온 장수의 낯에는 실망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마사미치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크게 개의치 않고 고니시군의 장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드리외다.”
“생각보다 다테 가문의 영지가 위태로워 보이진 않군요.”
마사미치는 그 말에 긴장했다. 벌써 눈치를 챘다면, 앞으로의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오히려 상대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쿠보께서는 다테 공께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그렇다면?”
“자세한 내막은 저도 잘 모릅니다. 단지 그리 전하라 하셨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사미치는 상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다지 높은 지위의 무사는 아닌 듯했다. 같이 온 도쿠가와군의 장수가 상당히 고위급 인사로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게다가 고니시군의 분위기는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쿠보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시오.”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테 마사미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괘씸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장기말이 된다고 해도, 가문의 영달과 숙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마사미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법. 마사미치는 망설임 없이 군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첫 번째 목표는 남쪽에 인접한 니혼마츠 일족이었다.
* * *
“다음에는 또 언제 오는가?”
“워낙 찾는 사람이 많아서 말입니다. 다음 달 말이나 되어야겠네요.”
보통은 거래에서 돈을 내는 쪽이 우위에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부로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그럼 물건이라도 넉넉히 가져와 주게. 없어서 못 팔고 있다네.”
“물량은 최대한 확보해 보도록 하지요.”
쿠로가와 성 아랫마을의 상인은 스모토에서 온 이방인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하지만 사부로 역시 이곳의 사정만 생각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다녀야 할 지역이 갑자기 몇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음은 어디였지?”
“오다와라 성에 들렀다가 오미나토로 갈 예정이우.”
상회에 속한 항해사가 사부로의 질문에 답했다.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모토?”
“그렇수.”
그나마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사부로의 마음을 달랬다.
처음에 덴노가 사카이, 아니 이제는 나니와가 된 수도에서 도망갔다고 했을 때, 사부로는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닌가하고 두려워했다.
무시무시한 무사 나으리들이 한데 모여서 사카이 쿠보를 공격하려 한다. 이건 스모토의 상인들에게 결코 이로울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잠시 사누키에 다녀온 사이, 다시 세상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시 오미나토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동국의 대부분이 스모토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사카이 쿠보의 직인이 찍힌 통행증만 있으면, 얼마든지 상행이 가능해졌다.
“거래는 잘 마쳤는가?”
“예, 도방 어른. 다음에는 물건을 좀 더 많이 가져와 달라고 하더군요.”
“공장에 이야기를 해야겠구먼.”
사부로가 속한 다나카 상회는 원래 어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시장의 규모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스모토의 상회들은 종류에 상관없이 물건을 내다팔기 바쁜 상태가 되었다. 당장 이번에 싣고 왔던 상품 역시 목면과 비단을 비롯한 직물이 대다수였다.
“다른 지역도 사정이 비슷하다면, 쉽지는 않을 듯합니다만…….”
“그렇다면 더더욱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먼저 약속한 쪽에 우선적으로 물건을 공급할 수밖에.”
공장에서 상품을 대량으로 찍어낸다고 해도, 한계가 없을 수는 없었다. 지금 스모토의 상인들은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버느냐가 중요했다.
“하여간 스모토로 건너오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알지?”
“물론이죠.”
스모토의 공장들은 노동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일할 사람을 데려오는 상회에게는 납품을 우선적으로 해주겠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스모토로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 역시 많았다.
사부로와 도방이 대화를 하고 있는 가운데, 선원 한 사람이 도방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지?”
“수군 선단이 내일 출항한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도 떠날 준비를 해야겠군.”
아직 이 일대의 바다는 치안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고니시 수군은 여기까지 항로를 순찰하러 오가고 있었고, 그 덕에 다나카 상회는 안심하고 상행을 다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