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뒷정리(3)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껏 불러서 왔더니, 이미 시마즈의 무사들을 박살내셨다고요?”
“일이 그리 되었다네.”
야규 무네요시는 시마즈군이 사용한다는 검법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그가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의 옛 주군이기도 했던 상관,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나 역시 이렇게 쉽게 끝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네. 사소한 거 하나 바꿨다고 그 지독한 놈들이 픽픽 쓰러졌단 말일세.”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군이 쉽게 이긴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게다가 그 역시 제자들에게 효율성을 강조했고, 칼의 움직임은 언제나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하지만 지금 무네요시는 깊은 허무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네…….”
* * *
여느 때처럼 시마즈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근접전을 강행해 왔다. 이번에도 역시 고니시군은 상대를 격퇴시켰지만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야만 했다.
“꽤나 지독한 놈들이야.”
“누가 아니래나. 어지간한 놈들도 이 나팔총에 한 방 맞으면 꼼짝을 못하는데, 그걸 버텨내면서 달려드는 녀석들이 아닌가.”
멀면 보통의 철포를, 가까우면 나팔총으로 적을 사살한다. 그게 고니시군의 전법이었다.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이끌고 온 병사들은 숙련도가 높아, 장전 속도도 상당히 빠른 편에 속했다.
보통 적의 피해가 커지는 시점은 후자였기에, 고니시군의 병사들이 중점적으로 훈련하는 부분 역시 나팔총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필 시마즈군의 무사들도 나팔총에 유독 강세를 보였다.
그게 지금 고니시군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점이었다.
“대체 너희들은 무슨 수로 나팔총에 얻어맞고도 움직이는 것이냐?”
“우리 무사들은 전신전령으로…….”
“그 이야긴 지겹다. 그런 정신론 말고, 대체 무엇 때문이냐는 거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도 포로들을 심문하면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캐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유를 물어본다고 해도, 딱히 생각나는 게 없소이다.”
“이봐, 세상이 이유 없는 일이 어디에 있나?”
“명을 받아서 싸우러 나왔고, 싸울 만하니 싸우는 거요. 우리라고 해서 뭐 특별한 게 있는 줄 아시오?”
마츠나가는 포로들을 협박과 회유부터 온갖 수를 동원해 심문했지만, 별 뾰족한 답을 얻지 못했다.
나날이 소모전을 강요당하면서 야규 무네요시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중, 한 무장의 방문을 받았다.
“그래, 지금 시마즈군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마츠나가 공. 대신 제 조언이 도움이 된다면…….”
히사히데는 자신을 찾아온 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시대에 여자의 몸으로 전장에 나오는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매우 보기 드문 사례인 것만은 확실했다.
“타치바나 부인이라고 했던가. 걱정 마시게. 부인의 종군이 끝나면 약속한대로 남편은 석방될 것이고, 공을 세운다면 그 역시 논공행상이 이루어질 것이니. 하지만 만약 속임수가 있다면…….”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 입화은천대), 남편을 구명하기 위해 대신 종군을 자처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히사히데의 의심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한번 깃발을 정한 이상, 속이는 일은 없습니다.”
“좋네. 말해 보시게.”
히사히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요구했다.
“고니시군이 자랑하는 나팔총은 생각보다 그 위력이 약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분명 가까이 붙은 사람을 손쉽게 살상하기에는 나팔총만 한 게 없었다. 하지만 긴치요의 말에 의하면, 작은 탄자는 두꺼운 갑옷에 취약하다고 했다.
“이보게,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 군대가 승승장구해 온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물론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쓰러트리기에는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든다면, 지금처럼 피해가 없을 수는 없지요.”
“결국은 정신론이라는 건가?”
히사히데는 시간을 버린 셈 치기로 했다. 대단한 수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은 포로들과 비슷한 수준의 정신론이라니.
“잘 알겠네. 하지만 부인의 말만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본론은 지금부터입니다.”
조그만 탄자를 여럿 흩뿌리는 대신, 큼직한 탄환을 사용한다면 시마즈군의 무사들을 단번에 쓰러트릴 수 있다. 그게 긴치요가 내놓은 해법이었다.
“어차피 납탄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 녹여서 도로 뭉치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대철포하고 다를 게 뭔가?”
“다르지는 않겠지요. 만약 대철포도 갖춰두셨다면, 그걸 쓰시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요는 나팔총의 산탄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니까요.”
히사히데는 턱을 쓰다듬으며, 긴치요의 이야기를 복기했다.
“좋네. 대신 다음번 싸움에는 타치바나 일족이 앞장서야 할 것일세.”
“기꺼이 그리하지요.”
어차피 피해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항복해 온 오토모 가문의 옛 가신들을 달랜다는 차원에서도, 히사히데는 아주 들어주지 못할 조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기와 화약을 빌려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납탄을 녹여서 새로 조정하는 일은 온전히 타치바나 일족의 군대가 맡았다.
그리고 그 성과는 아주 명확하게 드러났다.
“타치바나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제대로 겨눠라!”
시마즈군은 이전처럼 대태도를 들고 원숭이를 연상시키는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갑옷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쓰려지고 말았다.
“호오……. 효과가 상당히 괜찮군.”
그날로 히사히데는 모리 테루모토에게 타치바나 긴치요의 남편,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입화종무)의 석방을 요청했다.
* * *
“이리 된 걸세.”
“아쉽군요.”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 야규 무네요시는 입맛을 다셨다.
그도 결국은 무사였고, 난세가 온전히 끝나기 전에 한번쯤은 적수를 만나 자신의 칼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걱정 말게. 아직 잔당은 남아 있으니, 그들을 마저 토벌하는 건 자네 몫으로 주겠네.”
“그나저나 그, 타치바나 부인?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남편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석방되자마자 자기 가문의 영지로 돌아갔네. 그런데 남편쪽도 상당히 걸물이더군.”
긴치요의 조언으로 시마즈군의 기세가 꺾인 뒤, 오히려 타치바나 일족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섰다. 무네시게가 앞장서서 시마즈군을 토벌했고, 결국 시마즈군은 사쿠라지마에 갇힌 채 운명을 기다려야 했다.
“일이 그리되었으니, 사쿠라지마 공략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겠군요.”
* * *
야규 무네요시는 자신의 몫을 챙기기 위해, 시마즈군이 버티고 있는 사쿠라지마로 향했다.
“여기에 뛰어난 검객이 있다고 들었다. 여기 야규 신자에몬(新左衛門 신좌위문, 무네요시의 통칭.)이 왔으니, 자웅을 가려 보자!”
무네요시가 나노리를 마치자, 시마즈 측에서 한 무사가 나왔다.
“야규 공의 명성은 들은 바 있소. 이름난 검호와 칼을 섞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오.”
“그대는 누구인가?”
“시마즈 가문을 섬기는 토고 시게카타(東郷重位 동향중위)라 하오.”
상대가 들고 온 칼은 유난히 길고 두꺼웠다. 야규 무네요시의 관점에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는, 나름대로 실력이 있음을 의미할 터였다.
무네요시는 상대의 무기를 관찰하며, 어떤 식의 검법이 나올지 고심했다. 그러는 중에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부탁이 하나 있소.”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들어주지.”
“내 주군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해 줄 수 있겠소이까?”
“그건 내가 확답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관례상, 성이 멀쩡한 시점이 항복을 인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정작 시마즈 가문은 고니시군의 화포를 피하겠다며 야전을 강행했고, 그 결과가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물론 내 요청이 염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고니시군을 상대로 농성을 한다는 건, 오히려 자살행위지 않소이까.”
“그렇다면 진작 항복을 했어야지.”
“싸우기도 전에 고개를 숙인다는 것을, 야규 공은 용납할 수 있소이까?”
“물론이지.”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질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네요시는 즉답으로 반응했다.
“이기지 못함을 알고도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지.”
“그런 것이오이까…….”
시마즈군의 무장은 마음을 정리한 듯, 칼을 높이 치켜 올려 상단세를 취했다. 그리고 특유의 기합을 내지르며 무네요시에게 달려들었다.
‘저건 막으면 죽는다……!’
무네요시는 순식간에 판단을 끝낸 뒤, 행동으로 옮겼다. 그가 뒤로 빠지자마자,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시게카타의 검이 짓이기다시피 했다.
“무지막지하군.”
“칭찬 고맙소.”
“자네가 속한 유파는 어디인가?”
“음, 일단은 타이샤류이긴 하오만, 지금 내 검술은 스승님과는 조금 다른 편이외다.”
잠깐의 대화가 끝난 뒤, 다시 시게카타는 맹렬한 기세로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역시 흘려낸다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기세였다.
상대는 칼을 휘두르고, 무네요시는 그 궤적을 읽어서 피했다. 피할 수 없는 검격은 가속도가 붙기 전에 검극을 갖다 대는 것으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
“참 위력적이기는 한데,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법이지.”
“상관없소. 이 검에는 내 의지가 들어 있으니, 누구도 꺾지는 못할 것이외다.”
“그런가?”
시게카타의 숨은 거칠어졌지만, 그의 검은 여전히 정면으로 맞대기 어려운 수준의 기세를 자랑했다.
무네요시는 이리저리 몸을 피한 끝에, 마침내 상대의 왼쪽 어깨를 베었다.
“크윽…….”
“아직 싸울 마음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상대가 시마즈의 무사들을 가르친 자라면, 어깨의 상처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터였다.
무네요시는 빠르게 발을 움직였고, 역시 그가 있던 자리를 시게카타의 검이 공간째 찢어발길 기세로 지나갔다.
“쳇, 방심은 하지 않는구려.”
“오기 전에 자네가 가르친 무사들의 이야기를 들었거든. 의미 없는 싸움은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나.”
“그럴 순, 없소이다.”
다시 시게카타는 원숭이 같은 기합소리를 내며, 무네요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지쳐 있었고, 큰 동작은 필연적으로 큰 빈틈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는 그의 손목이 날아갔다.
“자네의 검법이 아군을 애먹였다기에,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네. 하지만 말이야. 너무 일격에 치중한 나머지, 상승의 검법이 되진 못한 모양이군.”
무네요시가 보기에, 시게카타의 검술은 자살특공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걸 익힌 무사들이 고니시군을 상대로 피해를 강요했다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이기지 못했을 터였다.
“아쉽게 되었군. 경험이 좀 더 쌓였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먼 길을 온 보람이 없는 것 같네.”
“내 운명은 이제 끝난 모양이오. 목을 가져가시구려.”
“목을 가져가 본들 무슨 쓸모가 있겠나. 무의미한 칼질을 할 순 없지.”
무네요시는 그렇게 말한 뒤, 병사들에게 진격을 명했다. 이미 시마즈군은 시게카타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고, 그들의 지독한 저항도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