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두 개의 태양(11)
세타의 다리 한복판에 회담장이 열렸다.
이쪽에서는 당연히 내가 대표로 나왔고, 저쪽 역시 사네히토가 직접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저하.”
“저하? 저하라 했는가?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나!”
내 말을 들은 사네히토는 얼굴을 찌푸렸고, 그 옆에서 시위하고 있던 무사 하나가 호통을 쳤다.
하지만 그래봐야 공허한 울림에 불과했다.
“안타깝게도, 저는 사네히토 저하를 일본의 왕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신하가 무서워 도망간 왕이라니, 너무 비참한 일이 아닙니까? 물론 왕자 중 하나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분위기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사네히토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 문제로는 입씨름을 할 생각이 없으나, 그렇다 해도 친왕으로서의 경칭은 전하가 아니었나?”
이런 중에도 끝까지 체면은 세우겠다는 것일까. 어쨌거나 사네히토가 떠난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설명해 줄 필요는 있었다.
“명에서 사신이 다녀가서 말입니다. 천하에 황제는 오직 하나뿐이니, 당장 참칭을 그만두라 하더군요. 하여 전하께서는 그 요구를 수락하셨습니다.”
“그대의 수작이겠지.”
“안타깝게도, 원래 명은 일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요. 그런데 류조지 다카노부가 사람을 보내 들쑤셔 놓았더군요.”
그리고 류조지 다카노부를 징치하기 위해 군을 일으키니, 사네히토가 그를 구하겠다고 일어섰다.
계속해서 저쪽이 황위 강등을 물고 늘어진다면, 나 역시 뿌리를 캐다 뿌려 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명에서 정벌군을 준비하는 동안, 공교롭게도 국력이 동쪽에서 새어나가고 있었지 뭡니까.”
“큼…….”
이런 부분에서도 사네히토가 얼마나 미숙한가가 드러나고 있었다. 조금만 정치적 역량이 있었어도 잡아뗄 일을, 왕자는 말문이 막힌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여 이제 일본의 지존은 전하가 되셨고, 그 뒤를 이을 분은 저하가 되셨습니다.”
“…… 알겠네.”
한참을 침묵하던 왕자는 가까스로 한마디만 내뱉고 도로 입을 닫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이 전쟁을 끝내고 질서를 세울지를 이야기해야겠군요.”
내가 격문에 붙였던 조건이라고 해 봐야, 사네히토의 즉위가 전부였다. 구체적인 협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사네히토와 그를 따르는 무사들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태도였다.
아시나 모리우지라고 했던가. 백발이 성성한 무사 하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면 그걸로 모든 게 끝나는 것 아니었소? 게다가 이번 일을 벌인 자들은 이미 포박되어 있으니, 그들을 넘겨드리리다.”
“정말 그걸로 끝이라 생각하나?”
저쪽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나는 조건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일단 읽어 보고, 충분히 논의한 다음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 * *
세타 강 동편의 본영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왕자는 이미 자신의 처우와 관련된 이야기를 끝냈기에, 회의장을 나가버리고 없었다. 중재할 사람이 없는 의논은 마냥 평행선을 달리기만 했다.
“이건 쿠보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이 조건대로라면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후계자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전부 인질로 내놓으라는 게 말인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제시한 조건은 모두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무사의 가족들은 예외 없이 나니와쿄에 거주할 것.
두 번째, 사카이 쿠보의 명의로 된 통행증을 지닌 자는 관세와 통행세 없이, 자유롭게 영지를 드나들게 할 것.
세 번째, 사카이 쿠보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
대상은 석고가 일만 석을 넘는 모든 무사들이었으며, 누군가의 위아래인 것은 따지지 않았다.
이 조건들에 위배되지 않는 한, 당사자가 자신의 영지에서 무엇을 하든지 관여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져 있었다.
모두가 논의에 뛰어들지는 않은 상태였다. 물론 여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자기네끼리 쑥덕거리는 사람들 역시 없지 않았다.
아시나 모리우지와 다테 마사미치가 바로 그러했다.
“이 조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네.”
“일단 급한 불은 끄자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마 받아들이고 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오지 않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마사미치는 외당숙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가문과 영지가 모두 보장되는 조건에, 행동의 자유까지 명시된 조건이었다. 그러니 뒤로 조용히 힘을 키우는 게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모리우지는 이 제안의 진정한 의도를 보고 말았다.
“생각해 보게. 첫 번째 조건이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 가짜를 보내 놓아도 될 거고,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후사는 얼마든지 영지에서 마련할 수 있네.”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를 보게. 쿠보가 상업을 장려하는 건 익히 알려졌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의심을 하지 않고 있네만, 사람이 오가면 정보 역시 사람을 따라다니는 법일세.”
협정을 체결한 자들이 음지에서 힘을 키우려 해도, 늘어난 눈과 귀에서 감추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만약 통행증을 지닌 자의 활동을 제한한다면, 그 자체로 사카이 쿠보의 경계를 사게 될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체결을 거부하면 그만이지요. 어차피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연이어 일으키기는 아주 어려운 법이잖습니까.”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세 번째 조항을 뭘로 보는 건가?”
모리우지는 세 번째야말로 가장 무서운 비수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보호를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장기적으로 이 조항 때문에 모든 무사들이 쿠보에게 고개를 숙이게 될 터였다.
“상호방위조약이라면, 공격받는 걸 막아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야 해석하기 나름이지. 적어도 이 제안을 받아들인 자는 전쟁에서 패배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마련된 셈이야.”
이 시대에서 패배는 보통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협정을 체결한 자는 최소한 자신의 영지만큼은 사카이 쿠보의 보장을 받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체결하지 않은 쪽에 비해 상당한 적극성을 띠게 될 터였다.
“그리고 꼭 군대를 보내야만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잖나.”
“그, 그렇군요.”
마사미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슈 제패는 그 부친 대부터 꿈꿔왔던 가문의 숙원.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안을 받아들인 무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오슈 제패는 불가능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의 말은 들을 거 없네. 받아들이고 아니고에 존망이 걸려 있는 걸세.”
* * *
다음 날, 대부분의 무사들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몇몇은 말없이 돌아가 버리는 것으로 거부의사를 표시했지만, 당장 그들을 붙잡지는 않았다.
이쪽 편에 설 자들에게도 약간의 먹이는 필요하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포로가 넷이 끌려와 있었다.
“대강 이야기는 들었을 것이다.”
내 제안은 이들에게도 전해졌다고 했다. 덕분에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우리를 참하지 않고 부른 까닭은, 결국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오?”
“물론이지.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조금 특별해서 말이야.”
이들은 나름대로 야심도 있고, 세력도 거대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뿌리도 결코 얕지 않아 단번에 해체해 버리기도 곤란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은거하고, 일족에게 가주 자리를 넘겨라.”
그리고 영지에서 내가 지목하는 자리를 상관(商館)으로 내어놓을 것. 다른 사람들이 받은 제안에 이 두 가지를 더했다.
내 말을 들은 호조 우지마사가 질문을 던졌다.
“만약 거부한다면?”
“멸망을 원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주지.”
우지마사가 입을 닫자, 이번에는 노부카츠가 질문했다.
“만약 일만 석 이상의 모든 무사들이라면, 내 가신들 역시 그리 해야 하오?”
“당연하지. 누구의 밑에 있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가 거느린 석고가 얼마나 되는가, 오직 그것만이 기준이 될 것이다.”
필요한 질문은 모두 나왔는지, 입을 여는 자는 이제 나오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결정을 마쳐 놓도록.”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그들이 갇힌 군막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진중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쿠보, 크, 큰일입니다!”
마침 병사 하나가 달려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렸다.
“승병들이 저하를 억류하고, 쿠보를 찾고 있습니다.”
“안내해라.”
사태의 전말은 이러했다.
사네히토 왕자는 자신의 지위를 되찾았고, 무사들은 협정을 체결하거나 혹은 거부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승병들은 여전히 내게 불만을 품은 채, 어떠한 결착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내게 손을 쓰기는 어려웠고, 마침 자신들이 사네히토의 친위대 노릇을 하는 상태였다.
마음을 정한 땡중들은 즉시 왕자를 인질로 잡고 소란을 피우는 중이라 했다.
승병들이 있는 곳으로 가니, 마침 시마 카츠타케가 상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가 이끄는 병사들이 범인들을 에워싼 상태였다.
“쿠보, 어찌할까요?”
인질이 인질이라, 카츠타케 역시 포위만 해 놓고 따로 손을 쓰지는 못한 듯했다.
“경고를 한차례 한 뒤, 모조리 처단하게.”
“예? 하지만…….”
“자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없을 걸세. 내가 결정한 것이니, 그대로 행하게.”
사네히토가 죽는다면,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 될 터였다. 목격자는 많았다.
“당장 저하를 풀어주지 않으면, 그대로 공격하겠다!”
“유키나가, 그자나 나오라 해라!”
카츠타케는 그대로 내 지시를 이행했다. 승병들은 철포 앞에 우수수 쓰러져 나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은, 실성한 사네히토였다.
“으으…….”
나는 죽지 않은 승병 하나를 붙잡고 질문했다.
“어쩌다 이리 되셨느냐?”
“그, 그것이…….”
동료들과는 달리 자기 목숨이 아까웠는지, 살아남은 승려는 순순히 심문에 따랐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사네히토는 지난 야습 이후로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광증이 도진다 했다.
“그런가.”
아무래도 셸 쇼크라 부르는 증상처럼 보였다. 한 나라의 지존이라는 자도 역시 한낱 사람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되었다. 이제 전쟁은 끝이다.”
그 길로 나는 몇 가지 조치를 마저 취한 뒤, 나니와쿄로 개선했다.
* * *
“그게 사실이냐? 정말, 정말 주군께서…….”
비보를 들은 하시바 히데요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눈을 피해 에미시를 복속시키며 힘을 키우는 동안, 그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는 살해당하고 이제 세상에 없었다.
“지금 성주님의 아우 되시는 히데나가 님께서 어떻게든 영지를 지키고 계십니다만, 시바타 카츠이에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릅니다.”
넓디 넓은 에조 땅을 뒤져가며, 그들의 주군을 찾아낸 도토야 조세이와 가토 기요마사는 돌아가기를 청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둘째 도련님, 아니 노부카츠, 그자가 고요제이 덴노께 합류했다고? 그렇다면 지금쯤 내 영지가 문제가 아니라, 오다 가문이 멸망했을 터. 차라리 하던 일을 마저 함만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미시가 강인한 족속이라 해도, 그들만으로 병력을 꾸려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니, 방법은 있다. 너희들이 나를 도와다오.”
하시바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한 뒤, 남쪽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