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두 개의 태양(10)
“하지만 항복을 권하기에 앞서서, 한바탕 싸울 필요는 있겠지.”
군막에는 닌자들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적군의 포진도가 그려져 있었다.
적의 본영은 비와호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 너머로 옮겨져 있었고, 호숫가에는 오다 가문의 군대가 배치된 상태였다. 그리고 나머지 세 다이묘 휘하의 병력 역시 중군이나 후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타의 다리 인근을 지키고 있는 것은 낭인과 동북면의 군소 무가들의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지금 사네히토군의 수뇌부는 아사쿠라 요시카게, 오다 노부카츠, 호조 우지마사, 롯카쿠 요시하루로 구성된 사인중(四人衆)이라 했다.
오다 가문이 호숫가에 머무르는 것은 최소한의 대비책일 거고, 그걸 제외하면 나머지는 수뇌부 인사들의 이익과 형편에 맞게 배치된 것 같았다.
아케치 미츠히데와 시마 카츠타케 역시 포진도를 보고 혀를 찼다.
“전방에 있는 자들은 문자 그대로 고기방패로군요.”
“넷 중의 한둘 정도는 최소한 강변에 있는 편이 모양새도 보기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만한 포용력이 있었으면, 진작에 천하인으로 올라섰겠지.”
내 평가에 나머지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달조차 구름에 가린 어두운 밤, 세타 강 서쪽에 진치고 있던 병사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시마 카츠타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퇴 신호는 징이다. 세 번 울린 다음에 배를 띄울 것이니, 명심하여 낙오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세타의 다리는 그 폭이 그리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쓰이는 방식과 군사 작전에서 요구하는 수준이 같을 수는 없었다.
일제히 도하하여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고 돌아오려면, 다리보다는 나룻배를 최대한 동원하는 편이 나았다.
카츠타케의 지시에 따라, 고니시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쪽 강변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폭죽을 지닌 병사들이 일제히 불꽃을 허공으로 쏘아올렸다.
- 와아아!!
그걸 신호로 서쪽 강변에서 준비하고 있던 화포들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미리 도하 지점과 포격 지점을 정해 두었기에, 아군 오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야습이다! 적이 강을 건넜다!”
파수를 보고 있던 병사들이 다급히 잠든 자들을 깨웠다.
그러나 이미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과 이제 막 잠에서 깬 사람의 몸놀림이 같을 수는 없었다.
“적은 어디에 있……. 컥!”
카츠타케는 군막을 나오던 사네히토 측 병사 하나를 찌른 뒤, 들고 있던 횃불로 군막을 태웠다.
“서둘러라!”
어디를 파괴하거나, 혹은 요인을 죽이는 식의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최대한 많은 적을 다치게 한 다음, 안전하게 돌아올 것. 그게 시마 카츠타케가 받은 임무였다.
- 죽이는 대신 최대한 다치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 그렇네. 살아남은 이들이 많아야 그 불만도 커질 게 아닌가.
전장에서는 숨만 붙어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하지만 카츠타케 본인이 이리저리 따져 본 결과, 어렵긴 해도 못할 짓까지 될 정도는 아닌 듯했다.
여기에는 낭인과 군소 무가 출신들이 연합 부대를 이루어 주둔하고 있었다. 명목상의 지휘관은 존재했으나, 이들은 손발을 제대로 맞춰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카츠타케 휘하의 군대가 이들을 상대하기란, 어린애 손목 비틀기보다 쉬울 터였다.
그리고 카츠타케의 판단은 현실에 들어맞았다.
“수급은 챙길 필요 없다! 닥치는 대로 베어 버려라!”
죽음을 각오한 일전을 벌이는 것도, 그걸 입증할 동료와 포상할 상관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 창칼에 맞은 사네히토 휘하의 장병들은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대신, 안전한 장소로 피신했다.
그리고 고니시군은 그걸 쫓아가 끝장내는 대신, 다른 몸 성한 적병을 찾았다. 눈치가 있는 자들은 최대한 다친 시늉을 하며 도망쳤다.
그렇게 기습한 쪽과 기습당한 쪽이 암묵적인 역할극을 벌이는 동안, 멀리서 함성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군을 도와야 한다!”
카츠타케 역시 전장 자체보다는 바깥의 동정에 더 집중하고 있었고, 응원군이 온다는 걸 깨닫자마자 퇴각 신호를 울리게 했다.
“징을 쳐라.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쾡 하는 소리가 세타 강 동안에 퍼져나갔다. 예민한 자들이 첫 번째 신호에 반응하기 시작했고, 두 번째 신호에는 모두가 몸을 돌렸다.
“모두 배에 오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징을 울리도록.”
세 번째에는 배를 띄우는 것이 신호였다. 카츠타케가 보기에도 낙오한 자는 없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징을 울린 뒤, 그가 탄 배는 잠시 기다렸지만 역시 돌아오는 병사는 없었다.
“지금까지 안 온다는 건 죽거나 잡혔다는 이야기겠지. 빠져나가자.”
그의 배를 마지막으로, 세타 강 동편에는 고니시군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구원군으로 왔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호조 우지마사가 강가로 달려왔지만, 이미 배는 모두 서편으로 돌아간 뒤였다.
* * *
카츠타케가 돌아온 뒤, 항복을 권하는 문서를 화살로 쏘아 보내게 했다. 역시 반응은 없었다.
적진의 수뇌부가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없었고, 그저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모양새였다.
잠입한 간자들 역시 진중에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아예 비밀로 묻어 버린 것 같았다.
“아직도 적은 아군보다 훨씬 많으니, 저쪽의 다이묘들로서는 무시하는 게 답이었겠지요.”
“조바심 낼 거 없네. 고작해야 화살 몇 대 날린 게 고작 아닌가,”
적이 아예 귀를 걸어 닫고 거부한다면, 그 다음은 조금 더 화끈한 방법을 써야 할 터. 내가 화살편지 다음으로 쓴 수단은 역시 화포였다.
나무로 간단한 원통형 상자를 짜고, 거기에 격문을 담아서 포탄 대신 날렸다. 문자 그대로 삐라를 적진에 흩뿌리다시피 했다.
“근데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이지. 이대로 시간만 보내도 괜찮겠지만, 이왕이면 의지를 꺾어 놓는 편이 낫지 않겠나.”
지금 적은 위아래의 판단이 서로 엇갈려 있을 터였다.
상층부에서는 아직 해볼 만하다 여기겠지만, 말단 병졸들은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또 수뇌부에 들지 못한 군소 무사들은 지금 상황에 만족할까.
격문에는 상당히 관대한 조건을 걸어 두었고, 전황은 고착된 상태였으니 앞일을 기대해도 좋을 듯싶었다.
* * *
고니시 유키나가가 의도한 대로, 사네히토군의 여론은 갈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강변을 지키던 무사들은 불만을 소리 높여 말했다.
“우리가 얻어맞고 있을 때, 강병이라는 아사쿠라 가문의 군대는 어디에 있었나!”
“오다 가문의 화포는 무엇을 했나!”
그러던 중에 사카이 쿠보의 명의로 된 격문이 날아들었고, 불만은 한층 더 거세졌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시 폐하를 받들 수도 있다 한다. 하지만 간적들이 폐하의 성총을 가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
만약 그들이 전황을 유리하다고 생각했다면, 코웃음치며 전공이나 탐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지부진한 가운데 고기방패 노릇이나 하고 있자니, 당장 나타난 탈출구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금새 사인중의 귀에 들어갔다.
“어리석은 자들이 대국을 보지 못하고 있소.”
“당장이라도 저들을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외다!”
네 사람의 의견은 쉽게 일치했다. 그리고 휘하의 병력을 풀어 불평분자들을 잡아들였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오이까? 폐하를 뵙게 해 주시오!”
“이미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이다. 군심을 어지럽힌 죄,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니라.”
그렇게 스무 명 남짓한 무사들이 사인중의 판결에 따라 처형당했다. 대부분이 뒷배를 봐줄 다이묘가 없는 낭인들이었다.
적에게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은 등 뒤의 아군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속에 불만을 품었지만, 감히 드러내지는 못했다.
* * *
야심한 시각, 다테 가문의 군막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낭인과 군소 무가 출신들에게는 대표가 필요했다.
다테의 이전 가주가 선봉을 맡았다 전사했다는 상징성,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세력이 크다는 실리적 이유.
이 두 가지로 어느새 다테 마사미치는 힘없는 무사들의 맹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폐하를 직접 뵈어야 합니다!”
“사인중도 결국은 폐하의 신하가 아닙니까!”
마사미치가 생각하기에 지금 분위기는 아주 무르익은 상태였다.
“좋소이다. 내가 앞장서겠소. 폐하의 군막으로 갑시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날이 밝자마자 사네히토의 본영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사인중의 군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라.”
“그대들은 무슨 자격으로 우릴 막는 것이오?”
“뭐라?”
순순히 돌아가야 할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요시카게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다테 마사미치가 입을 열었다.
“경들도 우리도 모두 폐하의 신하이거늘, 어찌 만사를 그대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오이까. 폐하를 뵙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대들 또한 역적이오!”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칼을 뽑았다. 그때 군막 안에서 고요제이 덴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이번에는 모두가 칼을 버리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일로 이리 시끄러운가.”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승병들이 덴노에게 나서줄 것을 청원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들의 식견은 탐욕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것을 보시옵소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폐하께 고개를 숙였사옵니다.”
실질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그저 지금 벌이는 전쟁을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에 불과할 터였다. 아니, 오히려 덴노에게는 나쁜 이야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사람의 시야를 바꿔 놓는 법이었고, 지금 시위를 벌인 무사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이미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던 사인중은 그 모습을 보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횡을 피해 파천한 덴노가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적어도 그들이 아는 고요제이 덴노는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이어지는 옥음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더 이상 무익한 피를 흘려야 할 이유는 없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전령을 보내라.”
“폐, 폐하!”
뜻밖의 반응에 요시카게를 비롯한 네 명의 다이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고요제이 덴노의 결정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고니시군이 수상 포격을 가하던 날, 덴노는 처음으로 전쟁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폭발음과 병사들의 아비규환,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만세일계의 지존도 결국은 사람에 불과했고,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쪽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짐의 뜻을 거스를 생각인가.”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고요제이 덴노의 의중을 등에 업은 무사들이 다시 칼을 들었다.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린 죄를 물을 것이다. 모두 포박하라!”
전체적인 병력의 숫자는 네 다이묘가 훨씬 컸다. 하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만큼은 다테 마사미치를 따라온 자들이 숫적 우세였다.
결국 요시카게를 비롯한 다이묘들은 꽁꽁 묶인 채 자신의 운명을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