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두 개의 태양(9)
쇠끼리 맞닿으며 절그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노 젓는 소리는 그리 요란하지 않았다.
파수를 서는 자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 보였다. 달이 밝기는 했으나, 배와 사람, 무기 등 모든 것을 검게 칠해 두었기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쿠보, 말씀하신 지점에 당도했습니다.”
“그런가. 화포를 장전하라.”
병사들은 내 지시에 따라, 최대한 정숙을 유지하면서 포격을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혀를 내둘렀다.
“이걸 위해서 가타다(堅田 견전)의 무사들에게 배를 빌리셨던 거군요.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렇게 작은 나룻배에 화포를 올리다니…….”
“작은 배도 여럿을 한데 합치면 능히 육지와 같다 하지 않던가. 물론 조조는 천기를 놓쳐서 패배했네만…….”
여차하면 바람이 바뀌는 걸 확인한 시점에 후퇴하면 그만일 터. 나는 그렇게 덧붙이며 씩 웃었다.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소개받은 가타다(堅田 견전) 사람들은 수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보유한 선박의 크기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그들의 배는 마루코부네(丸子船 환자선)이라 하며, 약 100석 언저리쯤 되는 크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숫자는 매우 많았고, 나는 그 배를 모조리 가져다가 여러 척씩 묶게 했다.
연환계라고 하면, 적벽에서 박살난 조조의 전례가 가장 유명할 터였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수단은 쓰기 나름인 법. 정약용의 배다리도 큰 틀에서 보면 연환계의 일종이 아니던가.
아군이 쓰는 화포는 묵직하고, 그 반동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 작은 나룻배들도 여럿을 엮고 보니, 얼마든지 그 위에서 화포를 쓸 수 있었다.
“쏴라!”
때 아닌 강철의 비가 사네히토의 진영에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화약이 폭발음과 쇠가 여기저기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한밤중의 고요한 호수를 가득 채웠다.
수십 차례의 포격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쪽이 더 현실에 가까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마구 쏴라!”
계속된 포격 끝에 화약에 적중하기라도 했는지, 저쪽에서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불길이 진중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 빛에 적군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수면에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적이 쏜 포탄은 아군 선단과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이제 반격을 시작한 건가?”
“쿠보.”
“알고 있네. 이제 돌아가지.”
사네히토의 진영에는 오다 가문도 가세해 있었고, 그들은 아직도 남만제 대포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이번 전쟁에도 끌고 왔다 했으니, 지금의 포격도 그들의 소행인 것 같았다.
미련 없이 물러서는 것 또한 사전에 전파가 된 바였고, 징소리가 울리자 아군은 일제히 본진이 있는 곳으로 노를 저어갔다.
“날이 밝으면 닌자들을 투입해서,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도록 해야겠군.”
한밤중의 전투는 당장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불편했지만, 나름대로 기대할 만한 전과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 *
“야습이다!”
“사람 살려!”
느닷없이 쏟아진 포격에 사네히토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무사들도 당황하기만 했다. 제대로 된 전쟁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낭인과 승병, 그리고 동북면의 무사들은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는 부대가 없지는 않았다.
“진정하라! 눈먼 포탄에 죽는 자는 드물다. 겁내지 말고, 적의 화포가 불을 뿜는 곳을 살펴라!”
주로 기나이와 그 인근에 영지를 둔 다이묘들의 군대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
특히 오다 가문의 군대는 질리도록 화포의 위력을 경험했고, 때마침 적절한 반격의 수단도 보유 중이었다.
“남만제 대포를 끌어와라! 그거면 저 무도한 자들을 혼쭐낼 수 있을 거다.”
노부카츠 역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다. 형인 노부타다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그 부친이 군대를 맡긴 아들이기도 했다.
“화포의 방열이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뭘 하고 있나! 어서 반격해라!”
오다 가문의 군대는 산발적으로나마, 호수 위의 불꽃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그들의 저항은 헛되지 않아, 고니시군이 곧 후퇴하기 시작했다.
“피해는 얼마나 되나?”
“다행히 죽거나 중상을 입은 자는 없습니다.”
“나는 폐하를 뵈러 갈 것이니, 병사들을 교대로 쉬게 하도록.”
노부카츠는 부하 하나에게 그렇게 지시한 뒤, 고요제이 덴노의 군막으로 향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한 다이묘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폐하께서는 무사하신가?”
“다행히 무사하십니다.”
“알현을 청하고자 하니, 아뢰어 주시게.”
다이묘들의 요청은 금방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덴노의 군막 안에는 위엄이 가득한 군왕의 모습은 간데없고, 겁에 질린 필부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겨, 경들은 무사했구려!”
“그러하옵니다. 폐하의 위엄에 힘입어, 피해가 커지기 전에 적을 쫓아냈사옵니다.”
한차례 호되게 당했으니, 되갚아 주는 것이 군을 이끄는 자의 도리일 터. 하지만 고요제이 덴노는 위기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위엄을 잃은 군왕을 보다 못한 다이묘들은 군막 밖으로 나와, 자기들만의 의논을 시작했다.
“어찌하는 게 좋겠소?”
“일단 호숫가는 위험하니 대본영을 언덕 너머로 옮겨야 하지 않겠소이까.”
피해는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기습에 놀란 낭인 몇몇이 탈영해 버렸고, 놀란 자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대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요시카게는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안건으로 내놓았다.
“그 이야기 말고, 폐하 말이오.”
덴노라는 존재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이묘들은 이미 가까이에서 그의 실체를 보고 들은 지 오래. 게다가 그 누구도 여기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다만 누가 먼저 입에 올리느냐가 유일한 문제라 할 수 있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오다 노부카츠와 호조 우지마사, 그리고 롯카쿠 요시하루. 이 네 사람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참석자 중 최연장자였던 요시카게가 한숨을 내쉬며,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다들 속에 품은 뜻이 없지는 않은 것 같소. 하지만 함부로 꺼내 놓지 못하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오. 그러니 한 글자를 적어서 먼저 모두의 의지를 맞춰 보는 게 어떻겠소이까?”
그 말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모여서 공적을 상대하는 일, 헛되이 패배할 수는 없다. 이것이 여기 모인 다이묘들 사이의 공통분모였고, 그러기 위해선 덴노부터 어떻게든 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요시카게가 종이 한 장을 가져와서 넷으로 찢었다. 그리고 각자가 한 조각씩 가져가서,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할 한 글자를 적어냈다.
첫 번째로 펼친 쪽지에서 나온 문자는 ‘幽(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마지막까지 모두 같은 문자가 나왔다.
멀다, 아득하다, 그윽하다, 깊다 등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그중에는 ‘유폐(幽閉)’라는 단어의 일부이기도 한 글자였다.
“모두의 생각이 같으니, 그대로 시행하도록 합시다. 엉뚱한 생각을 품은 자가 폐하의 곁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우리 넷이 의논하여 군무를 정해야겠소.”
이번에도 요시카게가 결정을 내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고개만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 * *
날이 밝자, 정신을 차린 무사들이 하나둘 덴노의 군막을 찾아왔다. 그러나 알현은 허락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간밤의 일로 옥체가 미령하다 하셨소. 그러니 나중에 찾아오도록 하시오.”
방문자의 대부분은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은 이와 비슷한 사례를 떠올렸다.
아시나 가문의 당주, 모리우지는 조용히 다테군의 숙영지를 찾아갔다. 마사무네가 허망하게 죽어 버린 뒤, 그의 동생인 마사미치가 가문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아무래도 낌새가 심상치 않네.”
“당숙,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모리우지는 마사미치의 부친과 자신이 과거에 한 일을 설명했다.
우에스기 겐신이 죽은 직후, 그들은 군세가 와해되는 걸 막기 위해 카게카츠를 옹립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몇몇 다이묘들의 태도가 당시의 나와 네 부친과 비슷하더군.”
“그렇다면…….”
“정말로 폐하께서 불예하신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미심쩍은 구석이 아주 많아.”
교토에서 온 승병들이 실질적인 근위대 노릇을 했지만, 그들조차도 알현을 거부당하고 있었다. 모리우지가 보기에, 지금 벌어지는 일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수작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숙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영지로 돌아감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리 생각한다. 마침 마사무네가 죽었으니, 장례를 이유로 대면 되겠구나.”
다테 마사미치와 아시나 모리우지는 그길로 덴노의 군막을 찾아갔지만, 이번에도 역시 알현은 거부되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갈 줄 예상했던 그들은 곧바로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찾아갔다.
“형님께서 비명에 돌아가셨으니, 마땅히 고향땅에 묻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오슈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이유와 태도가 모두 정당했기에, 아사쿠라 요시카게로서는 그들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하면, 지금 모인 세력이 금세 와해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요시카게는 좋은 말로 마사미치를 달랬다.
“그 마음은 알겠네만, 무사된 자로서 복수를 우선시하는 게 옳지 않겠나.”
“형님께서 몸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만용을 부리다 벌어진 일입니다. 그나마 혈육의 정을 외면할 수가 없으니, 부디 회군을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를 위해 싸우다 죽은 무사가 아닌가. 정녕 다테 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여기에서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시게.”
속뜻이야 어떻든 태도가 워낙 간곡했기에, 마사미치는 요시카게의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테와 아시나 가문의 군대는 계속 진중에 머물러야 했다.
* * *
닌자들이 월척을 물어왔다.
덴노는 겁에 질린 나머지 사람 만나기를 피하고 있고, 벌써부터 이탈을 꾀하는 자들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다테 마사미치가 형의 장례를 위해 돌아가려 했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명예로운 무사의 장례를 치러 주겠다며, 돌아가려는 걸 붙잡았다 합니다.”
그건 핑계일 수밖에 없었다. 다테 가문 내부의 불화는 상당히 유명했기 때문이다.
“적들이 벌써부터 서로 연극을 하는 모양이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케치 미츠히데는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형제간이 아닙니까. 적어도 장례를 치르러 돌아가겠다는 건 진심으로 보입니다만…….”
“생각해보게. 아직 다테 마사무네는 젋었네. 아들이 있다 해도, 상당히 어리겠지. 그런데도 유력한 후계자인 동생을 전장으로 끌고 나온 게 뭘 의미하겠나?”
“견제로군요.”
경험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가주와 후계자가 모두 전장에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결국 마사무네는 동생이 영지에 남아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전장에 끌고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아직도 숫적으로는 저쪽이 유리하지. 분열의 조짐이 있다고는 해도 드러나진 않은 상태고 말일세.”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차로 목을 축이고 다시 뒷말을 이었다.
“전공을 세울 기회가 목전인데, 사이가 나쁜 형을 위해서 장례를 치르러 돌아갈 자가 몇이나 되겠나?”
“그도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아케치 미츠히데도 내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쨌든 저렇게 균열이 일고 있으니, 그 틈새를 노려볼 생각이네.”
“무슨 수로 말입니까?”
“항복을 권유하려 하네.”
“사기가 떨어진 자들을 회유하실 생각이시군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잔챙이들을 회유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적의 수괴는 사네히토 왕자이니, 그에게 항복을 요구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