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두 개의 태양(5)
“시간도 많으니, 정석으로 착실하게 부수도록 하지.”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그렇게 부대의 방침을 정했다.
인근 주민들을 붙잡아다 확인한 바로, 이미 류조지 다카노부는 성을 떠난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숨어 있던 미꾸라지가 물 전체를 흐리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쪽의 목적. 본거지만 빼앗아 놓으면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상륙을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히사히데가 이끄는 고니시군은 순조롭게 상륙을 끝마쳤다.
사람이 먼저 내려서 숙영지와 포대로 쓸 자리를 확보하고, 다음으로 화포가 하역되었다.
“이 동네는 저런 것도 성이라고 하나?”
“저희야 무사 나으리들께서 성이라 하시니 성이라 부를 뿐입지요.”
히사히데가 보기에, 무라나카 성과 미즈가에 성은 각각 별도의 요새라기보다는 본성과 데마루(出丸)의 관계에 더 가까웠다.
“뭐, 아무래도 좋을 일이지. 저길 물샐 틈 없이 봉쇄할 필요는 없다. 먼저 미즈가에 성부터 부술 것이다. 기습에 당하는 일이 없도록, 군진을 단단히 짜두어라.”
일차 목표는 무라나카 성 앞을 가로막고 있는 미즈가에 성. 히사히데는 서로 인접한 두 성을 모두 포위하는 대신, 앞에서 거슬리는 것부터 치우려 했다.
류조지 가문도 그동안 착실하게 힘을 쌓았는지, 남만에서 들여온 대포를 갖춰 둔 상태였다. 하지만 위력과 사거리가 다소 부족한 것들이었다.
고니시군은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일방적으로 미즈가에 성을 두들겨 댔다. 일차 목표였던 성문이 가장 먼저 깨져 나가고, 그 다음으로 성벽이 차례차례 무너져 내렸다.
“화약은 많다. 너희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화포를 마음껏 쏴 보겠느냐. 걱정하지 말고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그만두라 할 때까지 쏴라.”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여유로운 태도로 병사들을 격려했다.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대부분이 신병들이었고, 이번 기회에 숙련도까지 끌어올리려는 생각이었다.
고니시군의 숙장은 표적이 완전히 폐허가 된 뒤에야 사격을 중단하게 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투입해, 무너진 미즈가에 성이었던 자리로 보냈다.
“미즈가에 성을 지키고 있던 류조지군은 모두 무라나카 성으로 도망친 모양입니다.”
히사히데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 표적을 지시했다.
“다음은 무라나카 성이다. 화포를 전진배치하고, 방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공격할 것이다.”
방금 전과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포탄이 성문을 두들길 무렵, 변화가 생겨났다.
“적이 백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적진을 관측하던 병사가 누각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 방향에는 과연 항복을 청하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벌써? 이거야 원……. 미즈가에 성은 이러려고 쌓아 뒀던 건가?”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가볍게 혀를 찼다.
대개 성이 제 기능을 유지할 때 항복할 경우, 공격 측은 항복한 자들을 명예롭게 대해야 했다. 이 관습이 어긋날 때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럴 경우에는 상당한 불명예로 간주되는 편이었다.
그리고 히사히데는 동서이자 주군에게, 최대한 관대한 처우를 하도록 언질을 받아왔다.
“좋다. 사람을 보내, 항복을 수락한다고 전해라.”
고니시군의 전령은 성문을 활짝 연 무라나카 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성을 지키던 장수를 이끌고 돌아왔다.
“무라나카 성을 지키던 류조지 나가노부라 하오.”
“나가노부? 류조지 다카노부와는 어떠한 관계인가?”
“그분은 내 맏형님 되시오.”
나가노부는 히사히데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했다.
“지금 다카노부는 어디로 갔지?”
“분고(豊後 풍후)국으로 향하셨소.”
분고는 오토모 소린의 본거지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원래 다카노부는 남쪽의 시마즈에게 도움을 청하겠노라 했지만, 나가노부는 최대한 상대를 교란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흠, 역시 오토모 가문에 도움을 청하려 한 것인가…….”
하지만 류조지 나가노부의 의도와는 달리,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대가 일찍 항복한 덕에, 쓸 만한 성 하나를 고스란히 손에 넣었군. 당분간 잘 쓰도록 하지.”
그렇게 승자와 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바다 쪽에서 수군 함대가 보낸 전령이 군막에 들어왔다.
“교타로 님께서 마츠나가 장군께 말씀을 전해 올리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운젠 산에 숨어 있던, 류조지 다카노부를 잡았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항장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 * *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류조지 가문의 본성을 공략하는 동안, 수군을 맡은 교타로는 해상에서 주변 세력에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출발 전 받은 정보에 의하면, 아직 큐슈 서부는 명확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장 강대한 이가 류조지 다카노부이기는 했으나, 그는 이 지역 무사들의 주군이라기보다는 맹주에 가까웠다.
군소 세력들 중에서 끌어들일 만한 자가 있는지, 그걸 알아보는 게 교타로의 임무 중 하나였다.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힘을 과시하는 것.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조언에 따라, 수군 지휘관은 내해를 오가며 함대의 위용을 뽐냈다.
그리고 그와 히사히데의 예상대로, 국인(國人 다이묘보다는 규모가 작은 군소영주)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여기, 류조지 다카노부를 잡아왔소이다.”
국인은 아리마 하루노부라 소개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꽁꽁 묶인 류조지 다카노부가 있었다.
의외의 성과에, 오히려 교타로는 당황스러워했다. 여기에서 잡히는 건, 그의 주군이 그리는 큰 그림에 흠집이 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저간의 사정을 부외자에게 알릴 수는 없었기에, 수군지휘관은 현지인의 이야기를 따라야만 했다.
“무엇을 원하시오?”
“나와 내 가문은 쿠보의 보호 아래 들어가고 싶소이다.”
류조지 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뒷배를 얻으면서, 큐슈 서부의 패자로 성장했다. 아리마 가문도 류조지와 시마즈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교타로를 찾아온 무사는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우선 내 선에서 보장해 드릴 수는 없는 이야기구려. 하지만 지금쯤이면 마츠나가 장군께서 무라나카 성을 함락시키셨을 것이니, 다리를 놓아드리겠소.”
“마츠나가 장군이시라면, 혹시 천하에 위명이 자자한 마츠나가 히사히데 님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교타로는 자신이 결정하기 까다로운 이야기를, 같이 온 숙장에게 떠넘겼다.
* * *
“군봉행께서 류조지 다카노부를 잡으셨습니다.”
“뭐라고?”
히젠에 파견한 사람들은 공명심으로 일을 그르칠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일을 맡긴 것인데, 대체 무슨 영문인가 했다.
하지만 내막을 들어보니, 이건 불가항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애초에 류조지 다카노부의 기반이 그리 단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군. 안타깝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할까.”
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다.
아리마 가문에게는 적당히 언질만 주고, 당분간 히사히데 본인이 직접 무라나카 성에서 오토모와 시마즈를 견제할 것. 그리고 류조지 일족부터 그 인척까지 모조리 스모토로 압송할 것. 내가 히젠에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이 정도였다.
변화한 상황에 맞게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혼다 마사노부가 치소로 들어왔다.
“중요한 일이라 전령 대신 제가 직접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마사노부는 그렇게 운을 뗀 뒤, 새로운 소식을 입에 올렸다.
“고요제이 폐하, 아니 사네히토 왕자가 쿠보를 조적으로 선언하고, 군을 일으켰습니다.”
“벌써 말인가?”
의외로 상당히 빠른 움직임이었다. 사네히토 왕자가 조금만 영리했더라면, 아직은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음을 알 터였다.
“에치젠에 잠입한 닌자들의 첩보에 의하면, 사네히토 왕자와 아사쿠라 요시카게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작 그거로는 판단의 재료가 부족하네.”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과단성을 보이다가도, 유유부단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소문과 간단한 인물의 인상만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아직까지도 깃발의 색을 확실하게 하지 않은 자들이 너무 많은 상황. 아사쿠라 가문과 사네히토의 친위 세력을 비교하자면, 전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을 터였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마사노부의 말에, 충분한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교토 근방의 대사찰들이 모두 사네히토 왕자에게 붙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엔랴쿠지가 앞장섰다고 합니다.”
“아, 그건 말이 되지.”
이 시대의 승려들은 무척이나 군사적이었고, 또 정치적인 존재들이었다.
아무리 지난번에 타협했다고는 해도, 사네히토가 덴노로서 이쪽을 적대하는 걸 껄끄러워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새로 접한 소식들을 지도 위에 갱신했다. 아직도 회색분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 * *
“아버님께서는 오늘도 세이슈지(政秀寺 정수사)로 가셨는가.”
“그렇습니다, 둘째 도련님.”
“하! 죽은 사람만 붙잡고 있는다 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알아서 죽어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는 자기 부친의 태도에 불만을 쏟아냈다.
“아우는 말을 삼가라. 아버님께서 뜻이 있으시기에 그러시는 것이 아닌가.”
“형님이야 물려받을 영지가 있으니, 그리 느긋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난 전쟁으로, 장인어른께 받은 영지 대부분을 상실했단 말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어디까지나 무사로서 덴노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공훈을 세워 새 영지를 얻을 꿍꿍이에 불과했다.
역시 부친의 저택에서 허탕만 치고 돌아온 노부카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으로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께서도 늙으셨다! 칼 한 자루만 들고 천하를 겨누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가고, 인생 50년 타령만 하는 노친네만 남았단 말이다!”
그렇게 푸념하던 노부카츠는 도토야 조세이를 붙들고 또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했다.
“이보게, 조세이. 자네의 꾀라면 뭔가 수를 낼 수 있지 않겠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이로(大老 대로, 가신의 우두머리, 여기서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인정받은 자네라면, 이 상황을 돌파할 길이 있을 거라 믿네.”
하지만 조세이라고 해서, 주가(主家)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 그렇게 불평불만만 들어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날이 노부카츠의 불만이 쌓여만 가는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주군의 둘째 아들을 찾아왔다.
“둘째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소!”
“그게 어떤 수라나찰의 길이라 해도 말입니까?”
뜻밖의 질문에, 되려 노부카츠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대체 무엇이기에 시바타 공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이오?”
“잠시 귀를 빌려주시겠습니까.”
시바타 카츠이에는 오다 노부카츠의 귀에 몇 마디를 가만히 속삭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들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은 핏기를 잃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저는 오늘 죽을 각오로 둘째 도련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도련님께서 망설이시기만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카츠이에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의 단도를 뽑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