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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121화 (121/225)

121화 두 개의 태양(2)

물밑에서 각지의 세력가들이 줄세우기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조선에서 사신이 왔다. 이번에는 서장관도, 부사도 없이 정사로 하성군 혼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감.”

“공방(公方, 쿠보.)을 오랜만에 보는군.”

“이제 하성군 대감께서 아예 일본국 전담이 되신 모양입니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네.”

공교로운 시기였기에, 나는 조선이 내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도 외국 사신의 존재가 정통성을 굳혀주는 효과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성군은 오히려 전운이 감도는 일본의 상황에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풍문이 흉흉하니 어찌된 일인가?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소문만이 아니라, 일본국의 조정이 둘로 갈렸다고 하던데,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하네.”

“아시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근래 들어 왕래가 빈번해졌다고는 하나, 내겐 타국의 일이 아니겠나. 이번에 온 까닭은 동양무역회사의 일을 살피기 위함이었네.”

조선도 차명으로 돈을 넣기는 했지만, ‘동무’의 대주주 중 하나였다. 자신의 투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이번에 하성군이 온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조선에서 온 귀빈을 이끌고, 선단이 정박해 있는 항구로 향했다. 대부분의 배들이 카락이나 관선 따위인 가운데, ‘동무’의 선박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크기로군. 저런 배라면 무엇인들 이루지 못하겠나?”

하성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큰 마닐라 갤리온의 길이는 50미터쯤 되었다. 판옥선이나 조선을 다녀가는 교역선은 약 그 절반 정도였으니, 그렇게 감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동양무역회사의 사업은 순조롭습니다. 얼마 전에는 비율빈(比律賓, 필리핀.)의 여송에서 큰 이문을 남기고 돌아왔지요. 장차 천축까지 보낼 예정입니다마는…….”

전쟁 중에 교역이 쉬우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헨드릭 판 슈트라센의 전례도 있는 판에, 비슷한 일이 재현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했다.

“역시 전쟁을 앞둔 모양이군.”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하성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중인환시에 할 말은 아니겠지요. 우선 치소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시 자리를 옮겨서, 주안상을 앞에 놓고 일본국의 사정을 설명했다.

“복잡한 일이로군. 의리로만 본다면, 자네의 행보는 망탁조의와 다를 게 없어 보이네만…….”

나와 조선 왕실은 막대한 이익을 공유하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하성군도 평생 살면서 공맹과 주자의 가르침을 배웠으니, 아주 웃지만은 않았다.

전한의 왕망, 후한의 동탁과 조조, 그리고 위의 사마의. 이 넷을 일컬어 망탁조의라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국권을 쥐고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든 권신이라는 말이었다.

전국시대가 한창인 일본에서는 이런 하극상은 비일비재했지만, 조선의 관점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판이긴 했다.

하지만 조선의 종친은 그 한 마디로 비판을 끝내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리를 따른 결과가 왜구의 창궐이라면, 그 또한 성인의 도는 아니겠지.”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세기말적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자였다. 그리고 그 양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일본의 남북조시대였으니, 하성군의 태도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어쨌든 공방이 처한 상황은 알겠네.”

일본의 사정은 충분히 납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한 구석에는 섭섭함 내지는 아쉬움 같은 감정이 엿보였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실은 말일세…….”

그렇게 운을 뗀 하성군은 속이 갑갑한지 찻주전자 대신 냉수가 담긴 물병을 기울였다.

역시 하성군이 직접 온 이유는 따로 있었고, 투자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것은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명에서 문책사가 다녀갔네.”

비록 표면상으로는 부산의 지방관과 쓰시마 도주 사이의 소소한 통상이었지만, 그 규모는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했다.

판옥선도 조선의 조정이 마음 단단히 먹고 건조한 군선이다. 그에 준하는 크기의 선박이 교역을 위해 드나들었으니, 소문을 막기도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발 없는 소문은 끝없이 퍼져나갔고, 그 끝에 자금성에 앉아 있는 명의 황제에게까지 들어갔다고 했다.

어쨌거나 명의 천하관에서, 조선은 으뜸가는 번국이었다. 하지만 그걸 달리 말하면 천하의 2인자라는 의미로도 통할 터였다.

언제나 명은 조선의 군사력을 견제하는 입장을 유지했고, 그 수단이 바로 조공이었다. 대체로 무역수지는 조선에 유리했다고는 하나, 품목을 어떻게 정하느냐로도 그게 가능했다.

가령 말을 조공으로 요구하거나, 혹은 물소뿔을 사여품에서 제외시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당장 왜관을 폐쇄하고, 조공으로는 지금 보유하고 있는 화약을 몽땅 내놓으라 하더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참이십니까?”

내 질문을 받은 하성군은 목소리를 낮추고, 한 번 더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전하께서는 명과의 전쟁을 생각 중이시지. 내가 여기 혼자 온 까닭도, 공방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온 것일세.”

조선이 원하는 것은 결국 안정적인 후방보급에 용병 고용, 거기에 가능하다면 명의 수군을 견제하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육로로 이어져있다 한들, 보급의 용이성은 우마보다는 배가 큰 법이었다. 아까 ‘동무’의 선단을 보고 유난히 좋아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남만의 대선이 참으로 웅대해보였거늘, 쉬이 빼지는 못하겠지.”

조선의 종친은 그걸 전력으로 끌어갈 수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운 듯했다.

“하하……. 그걸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오죽이야 좋겠습니까마는, 온전히 제 소유라 할 수 없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조선에서도 동양무역회사에 투자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 선단은 동양무역회사에 속한 것이고, 회사의 주주는 누구나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조선 역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하성군의 눈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조선과 공방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다른 투자자들이 동의해준다면 말입니다.”

나는 장부를 꺼내 보여주며, 주식회사의 이치를 설명했다.

조선의 지분이 제법 큰 편이라고는 해도, 당연히 독단적으로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내 지분이 3할에, 옛 에고슈 출신 거상들이 합쳐서 2할. 그리고 유럽인들이 갖고 있는 지분이 또 2할이었다. 조선의 지분은 1할이었고, 소규모로 사들인 사람들의 합이 2할 정도였다.

내가 동의를 한다 해도, 다른 이들에게 조선의 사정은 그야말로 바다건너 불구경일 터. 과연 몇이나 조선과 명 사이의 전쟁에 투입하는 걸 동의할지 알 수 없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하성군은 한숨만 푹푹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차근차근 설득이라도 해보도록 하지요. 며칠쯤 기다려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설령 동양무역회사의 선단을 참전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안정적인 군수물자의 보급이나 용병 고용은 얼마든지 돕겠노라고 했다.

위로 섞인 제안을 들은 하성군은 고개만 끄덕였다.

*       *       *

조선은 나름대로 재빠르게 움직인 편이었다. 애초에 교역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아무리 명이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간단한 이치까지 잊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명에서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닷새 전에 히젠에 들어왔다 합니다.”

“류조지 다카노부는 뭐라 하던가?”

내 질문을 받은 이치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알려야 할 정보를 입에 올렸다.

“이번에 소식을 보내온 건, 감시역 하나뿐이었습니다. 역시 류조지 일족은 이탈하려는 걸로 보입니다.”

“역시 그런가. 항로 경비를 조금 늘려야겠군. 그보다도 닷새 전이라면, 지금쯤 한창 세토 내해에 있을 게 아니냐?”

이치로는 고개를 저으며, 새로운 정보를 말했다.

“하카타에 들렀다가 지금은 오토모 가문의 거성에 머무르고 있는 중입니다.”

“이유는?”

“오토모 소린이 오우치 일족의 마지막 자손을 보호하고 있는 터라, 그걸 명목으로 접견을 청했다고 합니다.”

“아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은 한조각 땅도 남지 않은 오우치 일족이지만, 예전에는 그들 또한 막부를 쥐락펴락한 실력자였다. 그리고 강대한 세력을 기반으로, 명과의 감합 무역을 주도한 적도 있었다.

조선조차도 가짜 사신에 당한 사례가 있을 정도니, 명에서 온 사신이 과거의 흔적에 매달리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일 터. 이 경우에는 오토모 소린이 제법 머리를 굴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했다.

하지만 명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는 것은 호재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하성군이 머무르는 숙소를 방문했다.

“대감, 일단 조선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얼마간 기다리라고 했다가,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이렇게 반응할 터였다. 하지만 명에서 사신이 오고 있는데, 조선에서 온 사람과 그를 마주하게 하는 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조선 측에는 그러했다.

“명에서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행여 대감과 마주하기라도 하면, 조선의 국왕전하께 부담이 크지 않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하성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방의 마음 씀이 후하네만, 역시 일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돌아갈 생각일세.”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그의 말에, 조선 왕실의 각오가 느껴지는 듯했다. 결국 하성군은 명에서 온 사신이 다녀가는 동안, 치소 한 구석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       *       *

명에서 온 사신은 첫 소식이 들려오고도 꼬박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모습을 보였다. 적당한 환관 나부랭이 하나가 왔겠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아는 이름이었다.

심유경, 원래의 역사에서도 일본에까지 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협상을 걸었던 자였다.

그가 가져온 칙서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로, 조선과의 교역을 이전의 법도대로 되돌릴 것.

둘째로, 남만인들을 모두 내쫓고 해금령을 지킬 것.

마지막으로, 대군 소서행장을 처벌하고 고 후양성왕(後陽成王, 고요제이 덴노를 의미)을 복위시킬 것.

조선에서 쇼군이나 그에 준하는 위치의 인사를 대군이라 표현한 적이 있었으니, 내 칭호를 높여주는 건 나름대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걸 제외하면, 나머지들은 결국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조항은 명백히 고요제이 덴노의 입김이 들어간 모양새였다.

“가짜 사신이로군.”

내가 그렇게 촌평을 남기자, 심유경의 낯빛이 울긋불긋하게 변햇다. 상대는 너무나 쉽게 도발에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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