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두 개의 태양
안개가 자욱한 사카이 신궁. 새로 즉위한 고요제이 덴노 만이 어좌에 앉아 세상을 내려 보고 있었다.
모두가 신주 예순여덟 나라의 지존을 우러르고 있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팔짱을 낀 채 오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저자는 감히 어전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가!”
기분이 상한 덴노는 저 오만불손한 자를 잡아죽이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요란한 폭발음과 동시에 덴노의 신하들이 쓰러져 나갔다. 그리고 멀찍이 서 있기만 하던 사내가 어좌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왔다.
겁에 질린 고요제이 덴노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사지육신이 그의 뜻 같지 않았다.
사카이 쿠보 고니시 유키나가. 그는 마침내 역심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입을 열어도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가운데,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덴노를 끌어내려 백성으로 만들고 백성을 덴노로 올리겠노라!”
그 말과 동시에 사카이 쿠보의 형상이 바뀌었다.
긴 손톱과 머리카락. 오니 같은 얼굴. 덴노가의 종말을 고하는 자, 스토쿠인(崇徳院 숭덕원). 삼대 악귀의 수좌가 덴노를 향해 철포를 겨눴다.
탕!
“아아아악!”
고요제이 덴노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허, 헉……. 꿈인가?”
가슴팍에 박히는 탄환의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는 가운데, 덴노의 비명을 들은 궁인들이 침전으로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악몽을 꾸었노라. 별일 아니니, 다들 나가거라.”
덴노는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신주 예순여덟 나라의 지존은 퀭한 눈으로 조회에 나왔다.
“폐, 폐하, 어찌…….”
“고작 하룻밤의 잠을 설쳤을 뿐이노라. 그보다도 다이묘들의 입조는 어찌 되고 있는가?”
입조를 명한 게 고작 어제의 일이었다. 단 하루 만에 뚜렷한 결과가 나올 리 없건만, 마음이 조급해진 덴노가 신관들을 독촉하듯 질문했다.
“칙사가 모두 출발했사오니, 곧 답이 올 것이옵니다.”
그 말을 듣고서, 덴노는 자신의 조급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나머지 조회를 의례적으로 진행했다.
* * *
“폐하께서 다이묘들의 입조를 명했다고?”
“그렇습니다, 쿠보.”
고요제이 덴노의 즉위식이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내게 의논을 하기는커녕, 입조를 명하는 사신조차 오지 않은 상황. 그 이유가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나는 다이묘로 취급조차 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치로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이 역시 염두에 두었던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렇게 신속한 건 조금 의외였지만, 그 속도의 차이에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내버려두도록.”
“쿠보?”
내 말을 들은 이치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었던 혼다 마사노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직속닌자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아니, 내버려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덴노의 행보를 조장하는 게 좋겠군.”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자리의 누구도 내가 덴노에 대한 존칭을 생략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내 사람들이었고, 이미 저쪽에서 먼저 이빨을 드러낸 상황. 굳이 존대를 해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 의도 자체는 얼른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사카이의 경비를 느슨하게 하고, 소문을 퍼트려서 신임 덴노와 그 측근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도록.”
이치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이럴 때면 의문은 그의 몫이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했고, 이번에도 그렇게 자신의 할 일을 하러 나갔다.
나는 그런 그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오기마치 폐하의 신변은 물샐 틈 없이 지키도록. 나머지는 사카이에서 내보낼수록 좋지만, 폐하만큼은 결코 수도를 떠나시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직속닌자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지시를 이해했다는 것을 알렸다. 한편, 혼다 마사노부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게.”
“혹시 남북조 시대의 재림을 바라십니까?”
역시 책사 노릇을 맡길 만한 자답게, 내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잘 잡아냈다.
“비슷하지.”
신임 덴노가 이렇게 나와 주는 건 오히려 호재에 가까웠다.
다이묘를 표현할 만한 단어는 여럿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을 찌른 말을 두 개쯤 뽑자면, 이합집산과 면종복배라 할 수 있었다.
당장 힘이 약하면 고개를 숙이고, 그러다 기회가 생기면 다시 일어나서 등짝에 칼을 꽂는 자들. 세상의 누군들 그러지 않으랴마는, 이 무사란 족속들은 그 정도가 무척이나 심했다.
그러니 흑백을 가려내자면,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나타나는 정도는 될 필요가 있었다.
“이왕이면 낡아빠진 배 몇 척쯤은 제물로 써도 괜찮겠지.”
그렇잖아도 해적들도 다시 준동하는 상황. 조금 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면, 자신의 색을 명확하게 드러낼 자들은 많았다.
“쿠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차라리…….”
“그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지 않았나?”
혼다 마사노부는 충신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현명한 자였다. 그러나 간혹 자기 출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지금도 그러했다.
물론 내가 반론을 허용했기에, 그 역시도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하지만, 쿠보. 신주 예순여덟 나라의 영구한 분열이라니요. 천하대세는 합구필분이요 구분필합이라 했습니다.”
마사노부는 조각조각 나뉘어진 일본을 하나로 합칠 때라고 역설했다.
“그래서 기어이 나와 내 후손들을 태뢰의 소로 만들겠다는 건가?”
“용의 새끼는 용이 되고, 뱀의 새끼는 뱀이 된다 했습니다. 그렇게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게 이 시대 사족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신성한 힘. 그것이야말로 천하를 지배할 자격을 준다고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주장보다는 반대되는 실제 사례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아시카가도, 겐페이(源平 원평, 미나모토와 타이라.), 그리고 덴노가도. 모두가 시조는 영웅이라 할 만했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건…….”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백배 양보해서 천하의 무사들이 나를 인정한다 해도,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의 일까지 책임지고 싶지는 않네.”
“알겠습니다. 쿠보.”
혼다 마사노부는 온전하게 수긍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현명했고, 최소한 대세가 내 손에 있는 한 배신하지 않을 자였다.
나는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일세. 군대를 준비시키고, 옥석을 가려내야 하네.”
* * *
고요제이 덴노는 이쪽에서 유도한 대로 행동했다. 사카이 신궁에서 몇몇 신관들과 도망간 그는 교토를 거쳐, 에치젠으로 도망갔다.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고요제이 덴노를 맞이하고, 코가 쿠보를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으로 올렸습니다. 스스로는 싯켄(執權 집권, 조정과 막부에서 정무를 총괄하던 관직의 하나.)에 취임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탁하러 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내가 저쪽을 너무 의식한 결과인 듯했다.
역시 덴노의 사고방식이 유연할 리는 없었다. 방계의 방계로서 올라선 오다 노부나가보다는, 대대로 이어온 명가의 후예를 고른 것이다.
“나를 조적으로 선언했다는 이야기는 없는 모양이군.”
“그건, 그렇습니다.”
이치로가 아무리 충직한 닌자라고 해도, 조적이라는 말은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럼 아직 이쪽에 칼을 빼든 건 아닌가?”
“그보다는 힘을 끌어 모으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럴 법한 이야기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쯤 사방에 또 밀사가 오가고 있겠군.”
누가 어느 쪽에 설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도를 보고 있는데, 아케치 미츠히데가 면회를 청해 왔다.
놀란 표정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보건데, 황급하게 달려온 모양새였다.
“쿠보, 어찌된 일이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덴노가 파천해버린 일. 아케치 미츠히데도 쇼군의 가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역시 겐지의 일파였다. 이번 사태는 그에게도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할 건 없네. 폐하의 아드님이 권력욕을 드러낸 일에 불과하니.”
오오기마치는 여전히 내 손에 있었다.
물론 고요제이가 도망간 이후로는, 안전을 위해서 아예 아와지국 내의 이자나기 신궁으로 옮겼지만. 그러니 정통성 면에서 밀릴 일은 없었다.
그렇게 설명하자, 아케치 미츠히데도 적잖이 마음을 놓는 듯했다.
“천하가 어찌되려고…….”
“원래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 아니겠나. 이번 일을 넘기면 난신적자들도 사라질 걸세.”
“알겠소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준비를 갖춰놓겠소이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거리가 가까워 직접 왔지만, 아군이라 분류할 수 있는 다른 이들도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리 테루모토는 자신의 숙부인 킷카와 모토하루를 보내, 내 의지를 확인했고, 미요시 마사야스 역시 가신 하나를 보내왔다.
하지만 이탈하는 자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류조지 다카노부는 견원지간이었던 오토모, 시마즈와 손잡고 아사쿠라와 밀사를 주고받는 모양새였다.
사실 이탈이라고 하기엔 의리가 얕긴 했지만, 그렇게 천하의 대세는 흑백이 가려지기 시작했다.
* * *
“너는 어찌할 셈이냐?”
“감히 제가 끼어들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쿠보와 폐하의 일이 아니냐.”
호조 우지마사는 이번 사태를 의논하기 위해 우지히데를 오다와라 성으로 호출했다. 비록 무사시국을 갈라먹은 얄미운 이복동생이었지만, 지금의 사태는 가문의 존속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우지마사는 무사의 일원으로서, 고요제이 덴노의 진영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이 선택에서 찜찜함을 지우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미 마음을 정하셨는데, 이 아우를 부르신 까닭은 무엇이십니까.”
정곡을 찔린 우지마사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기울였다.
“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길까 두려우십니까?”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힘들었던 우지마사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렇다. 그렇게 되면, 호조 가문이 역적이 되어 멸족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에 가담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우지히데는 젊은 시절의 상당 부분을 사카이에서 보냈기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손잡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 역시 무사 중 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상인 놈의 편을 들겠느냐.”
정작 그 상인 놈의 습격에 밀려, 도망쳐야 했던 것은 생각지도 않은 모양새였다. 역시 우지마사는 감정이 앞서는 편이었다. 우지히데는 그 대목에서 쓴웃음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가문의 선택을 둘로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신은 은밀하게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손을 내밀겠다. 그러니 우지마사는 대외적으로 고요제이 덴노에게 가담해서 양다리를 걸치자는 이야기였다.
“흠…….”
“어느 쪽이 이겨도 호조 가문은 존속할 수 있습니다.”
“좋다.”
천하의 흐름은 각지의 다이묘에게 이런 식으로 선택을 강요했다. 아직 쇳소리가 울려퍼지지는 않았으나, 가히 폭풍을 앞둔 고요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