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대항해시대의 한 조각(5)
모든 증언이 끝났을 때, 루이스 프로이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돈의 망자들이 기어이…….”
아마 헨드릭 판 슈트라센을 후원한 자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끝까지 뻗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로이스 신부는 한참을 멍하니 한탄하기만 했고,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즐기는 눈치였다.
그때 밖에서 전령이 들어와 바깥의 상황을 고했다.
“쿠보, 봉쇄령을 어긴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 중 몇몇이 출항을 강행하다 붙잡혔다는 이야기였다.
아까 치소로 돌아오면서, 나는 항구를 봉쇄시켰다. 명목은 흉악무도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배를 감시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 장본인이 나와 같이 치소로 들어온 상황.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잡혔다는 자들의 이름을 들어보니, 역시 이번 일에 연루된 자들이었다. 누가 봐도 도망치려다 잡힌 모양새였다.
옆에서 같이 소식을 들었던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가 내게 애걸했다.
“쿠보,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무슨 선처를 바란단 말이오?”
“저 흉악무도한 자들은 지은 죄대로 처벌해주십시오. 하지만 제 낯을 봐서라도, 부디 포르투갈인 전원의 추방만은 면케 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하기에, 나는 이 사제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눈을 마주치고 보니, 대강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납득이 갔다.
지금 세계 제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바로 스페인-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이었고, 그 패권에 도전하는 입장이 바로 잉글랜드였다.
그리고 이번 일의 배후에 있는 자들 역시 포르투갈에서 온 상인들.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나 프랜시스 드레이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포르투갈인 전원의 재산 몰수와 추방 말이다.
아직은 연좌제가 일반적인 시대였고, 이런 경우에도 집단으로 엮어서 처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죄를 지은 당사자만 처벌한다는 개념은 아직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일은 단순히 음모가들을 일벌백계로 징계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터였다.
여기 일본은 구대륙의 극동에 자리한 세계의 변방이지만, 일단 포르투갈 상인들이 쫓겨났다는 소식 자체는 어떠한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잉글랜드의 대해적이 개입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대제국이 무너지는 과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제법 흔한 사례는 체제가 흔들리면서 붕괴하는 경우였다.
원래의 역사에서 이베리아 압스부르고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배한 것이 그 계기였지만, 극동에서 일어난 일이 균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비록 눈에 보이는 지표로 알기는 어려운 것들이지만, 루이스 프로이스처럼 해외 경험이 많은 사람의 예감은 또 다를 수 있는 법.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사제는 모국의 위신이 조금이라도 덜 박살나기를 원했다.
“내, 여러 말 하지 않겠소. 어찌 해야 죄를 씻을 수 있을지 생각하시구려.”
어쨌거나 지금 아쉬운 입장은 프로이스 신부와 포르투갈 상인들. 일단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프로이스 신부를 내보냈다.
내가 보인 일말의 당혹감을,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정에 끌린 망설임으로 여긴 듯했다.
“원래 가진 놈이 더한 법 아니겠소이까. 국왕이 탐욕스러우니, 그 밑의 신민도 마찬가지인 거라 생각하오.”
겉으로야 자신을 모함한 자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꼴이었지만, 그 안에 숨은 의도는 뻔했다. 포르투갈인이 다 저러하니, 몽땅 내쫓아야 한다. 대강 이런 의미일 터였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들은 대가를 치를 걸세. 그보다도 자네와 할 이야기가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역시 쿠보는 말이 통하는 분이구려.”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문서 한 장을 꺼내들었다.
“우리 여왕 폐하의 신임장을 가져왔소.”
그는 상관 개설과 조차지를 원한다고 했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모양새였다. 역시 포르투갈인들이 구축해 놓은 교역망에 끼어들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드레이크 공은 별 문제가 없겠네만, 다른 잉글랜드인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겠는가?”
“당장은 무리일지도 모르오. 하지만 조만간 이베리아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거고, 그땐 우리 사람들도 여기에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외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제독 작위를 받았으니, 그게 머지않은 미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패기는 좋군. 하지만 역시 나라고 해서, 저들을 아주 적으로 돌릴 수도 없지 않겠나?”
물론 지금쯤 해서 나 역시 서양과 연결된 창구를 갈아탈 시점이긴 했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미래지식만 따라가다간, 오히려 주변의 의심과 반발을 사기도 쉬울 터였다. 당장의 강자는 튜더가 아니라 압스부르고였고, 여차하면 루손에서 거대한 마닐라 갤리온 함대가 뛰쳐나올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몇 년 뒤의 이익을 기대하면서 당장 손가락을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내 말을 들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미리 준비한 듯이 답을 내놓았다.
“협약을 당장 공개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소이까. 이베리아인들이 힘을 잃는 그날까지 조용히 묻어두어도 상관없소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지. 듣자하니 자네는 유명한 해적이고, 또 수배된 몸이라 하더군. 그런 사람이 나를 만나고 돌아갔다는 게 어떻게 비치겠나?”
상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빠르게 알아들었다. 지금의 그는 명백히 약자였고, 그런 약자와 손을 잡는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 드레이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손을 들고 나왔다.
“쿠보께서는 무엇을 원하시오?”
“자네는 무엇을 줄 수 있나?”
“이베리아 배에서 약탈한 보물들 정도겠구려.”
지금의 그는 신임장까지 가져온 잉글랜드의 외교관이기도 했지만, 그 부분을 결코 과신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것뿐인가?”
“그럼 내가 쿠보께 뭘 드릴 수 있단 말이오?”
“포르투갈, 그러니까 자네 말에 의하면 그 이베리아인들. 그들은 강대하지. 보유한 선박은 무척이나 많을 거고, 병사들 또한 그러리라 생각하네. 그런 상대를 농락하듯 바다를 누빈 자네라면 특별한 비법이 있을 것 같네만.”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자네 배 말이야. 무척이나 유려하게 생겼더군.”
내 말을 들은 잉글랜드의 대해적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거야 원. 영감님께 욕 좀 얻어먹게 생겼구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좋소이다. 아주 잘 보셨소. 내 ‘골든 하인드’는 둔해빠진 이베리아 놈들의 구닥다리보다 훨씬 날렵하오. 그 제작법을 알려 드리겠소이다.”
그는 자신의 옛 선장이 개발해 낸 특별한 건조법임을 강조하며, 큰 밑천을 내준다는 태도로 승낙했다. 시종일관 해적스러운 모습이었다.
여러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필요한 것만 말하자면, ‘골든 하인드’는 일종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본국에서 내 ‘골든 하인드’보다 훨씬 큰 선박도 건조하고 있겠지만, 적용된 기술은 동일하니 기대해도 좋을 거요.”
드레이크의 설명에 의하면, 기존의 갤리온은 옛날에 쓰던 갤리선의 구조를 확대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걸 개선한 자가 바로 존 호킨스, 드레이크의 옛 상관이었다. 수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기하학적인 구조로 신개념 선박을 설계했고, 그 기술이 처음 적용된 게 바로 골든 하인드였다.
“물론 당장 쿠보 밑의 조선공들이 골든 하인드 같은 배를 만들어 낼 수는 없겠소만, 뭐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게 이치 아니겠소이까. 일단 필요한 지식은 모두 알려드리리다.”
역시 그의 말대로 스모토의 조선공들은 기하학의 향연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내 영지에도 서양의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는 있었고, 그 학교의 졸업생들을 투입하면서 이 사업도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 * *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일본을 떠났다. 그리고 헨드릭 판 슈트라센과 그를 후원한 포르투갈 상인들, 여기에 관한 처분은 조금 늦어졌다.
세부 조건을 조율하는 데 꼬박 두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프로이스 신부의 중개로 루손의 총독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당사자 모두가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헨드릭 판 슈트라센은 공개적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이미 약속한 것도 있었고,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기에 비밀리에 빼돌려 석방했다.
“자네는 네덜란드 출신이라 했지.”
“그렇소.”
“포르투갈 사람들과 손을 잡은 건 본의가 아니었고?”
내 질문이 그의 뼈를 건드렸는지, 헨드릭 판 슈트라센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계속 말해 뭐하겠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했을 뿐이오.”
“그럼 자네는 네덜란드의 독립보다는 지금처럼 압스부르고를 섬기기를 원하나?”
“당치도 않은 소리!”
그는 단지 힘과 이해관계를 모두 갖춘 쪽에 손을 내밀었을 뿐이라 했다.
“그럼 이번에는 고국의 독립을 위해 일해 보는 건 어떻겠나?”
“그게 무슨 말이오?”
“동양에는 물극필반이라는 말이 있지. 포르투갈인들이 저렇게 패악을 부려 대니, 그 끝이 보이는 것 같더군.”
먼 훗날에야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서로의 혐성을 으스대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 당장의 나는 포르투갈의 혐성에 얻어맞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리고 보통 그렇게 망나니처럼 날뛰는 자들은 거센 반발에 마주하게 될 터였다. 꼭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이 아니라, 그건 필연에 가까웠다.
내가 은근하게 말하자, 어느새 네덜란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와 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지. 나중에 네덜란드의 창구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좋겠군.”
“좋소. 그리 하겠소. 이 일은 잊지 않으리다.”
아마 한동안은 포르투갈의 눈을 피해 바다를 방황해야만 하겠지만, 그는 목숨을 건지고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내놓고 동아시아를 떠나기로 했다. 일본 밖에 있어서 잡히지 않은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스모토 항의 포르투갈 상관 우두머리가 내게 배상금에 해당하는 액수를 지불하고, 그가 추방된 자들에게 그만큼을 본국에서 받아내기로 했다.
거기에 두 가지가 더 따라왔다.
루손의 총독은 해상 안전에 협조한다는 명목으로, 마닐라 갤리온을 한 척 보냈다. 물론 운용법과 관련 조선술을 가르칠 기술자들도 같이 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존재했다. 포르투갈인들을 도매금으로 묶어 추방하지 않은 데 대한 감사표시인 셈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통상의 확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는 루손, 대만 등지에 내 휘하의 선단이 오가는 걸 허용했다.
“폐하께서도 쿠보의 관대한 처우에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거요.”
“물론입니다. 돌출 행위를 잘 단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염초 수급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했고, 또 다른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