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대항해시대의 한 조각(4)
퍼즐의 조각 중 절반이 맞춰졌다.
염초 수송선을 습격한 실행범, 헨드릭 판 슈트라센은 비밀리에 스모토로 호송되었고, 그동안 순순히 자신의 배후를 털어놓았다. 이미 스즈키 시게히데가 심문한 내역을 가져왔고, 이 해적은 내 앞에서도 고분고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뢰를 받고, 그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가져가서 후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대체로 포르투갈 상인들은 나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도자기 할당을 가장 많이 가져가는 건 물론이고,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직통 창구까지 존재했다. 감히 그런 그들에게 내 선단을 습격할 것이니 후원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과정을 들어보면, 실로 혀를 내두를 만했다. 어찌 보면 도박을 걸었다고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헨드릭 판 슈트라센은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였다.
다만 그 머리가 지나칠 정도로 굴러가서 밉상인 게 문제일 뿐.
“해서, 제가 어떤 걸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 해적의 말이 의미하는 건, 두 가지 선택지와 그 둘을 모두 고르는 것까지 해서 총 세 가지 방법이었다.
하나는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명분을 만드는 것. 또 다른 하나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압박하는 것. 그리고 그 둘 모두를 실행에 옮기는 것.
이쪽에서 만들어 준 각본에 예스까노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아예 한몫 거들겠다는 태도였다.
“그건 일개 해적 따위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이 한마디로 헨드릭 판 슈트라센은 입을 닫았다. 그나마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이 해적이 괘씸하고 밉상인 것하고는 별개로, 그가 말한 게 곧 현실이기도 했다.
실제로 노부나가에게 유럽식 대포를 팔아치운 것도 사실이었고, 거기에 더해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결탁해서 사략질까지 한 자였다.
엮으려고 한다면, 정말로 다 엮을 수도 있는 사안인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양쪽에 모두 손대기에 부담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지금 실행범으로 잡힌 자는 서양인이고, 후원자로 지목을 받을 쪽 역시 서양인이다. 유럽에 관해 자세히 아는 자라면 이 둘의 출신을 구별할 수 있겠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다 똑같은 남만인 취급이었다.
그리고 일본국내의 세력가들 중에서, 가장 남만인과 친숙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바로 나였다.
만약 이 사건의 전말이 전부 알려진다면, 내게도 타격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지금 동맹을 맺고 있는 다이묘 본인은 어떨지 알 수 없어도, 그 밑의 무사들은 동요할 가능성이 높았다.
죄수 앞에서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처분하시겠습니까?”
“일단 저대로 두지.”
사람을 써먹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 당장 유용한 것은 선박이었다.
“그보다도, 조선공은 뭐라 하던가?”
“시간과 예산이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 달 뒤에는 유의미한 성과를 보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해전에서 아군이 카락의 기동성에 농락당했다고 했다.
화력이야 아직까지 심각한 차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양으로 나가자니 지금의 관선은 부족함이 많았다.
다행히 슈트라센의 카락을 나포할 수 있었고, 그 전리품은 조선공들에게 넘겨 둔 상태였다.
선체 조립 방식은 오히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관선이 더 단단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것은 선체의 강도가 아니라, 돛에서 나오는 기동성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해전 양상을 생각하면, 내구성보다는 체급이 더욱 중요해질 터. 서양식 선박에 적용된 조립법은 선체 강도가 약한 대신, 크기를 키우기에 유리하다고 했다.
“달라는 대로 주도록.”
나는 그렇게 지시한 뒤, 마당을 거닐면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지금 이쪽에서 가지고 있는 증거는 헨드릭 판 슈트라센의 증언,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나라에서 염초를 구하지 않았다는 첩보. 이 두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앙숙인 상황. 대질을 시킨다 해도, 저쪽에서 모르쇠로 일관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후로는 몸을 사리기야 하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 포르투갈 상인들 쪽에는 엄포만 놓고, 오다 노부나가의 사략질을 규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듯했다.
카락의 역설계도 결국 시간 문제였으니, 저들도 더더욱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터였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심부름꾼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하, 항구에서 남만인들끼리 대치 중입니다.”
“경비대의 일이 아닌가?”
일본에 들어온 서양사람 중에는 선교사 같은 학자적 풍모를 지닌 자들도 있지만, 거친 바다 사나이로 통하는 선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그 선원도 항해사쯤 되고 보면, 역시 지식인에 가깝긴 했지만, 어쨌든 칼과 피, 화약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당연히 경비대 중에서도 정예들이 항구를 맡고 있었고, 그들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양상을 보인 듯했다.
“그것이…….”
“말하라.”
“경비대가 나섰지만, 여전히 서로 총칼을 겨누고 있다 합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동시에,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이유로든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 기선 제압에 써먹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앞장서라.”
나는 그길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장소로 향했다. 과연 항구의 분위기는 흉흉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다만, 숫자에서 밀리는 쪽이 기세만큼은 대등하게 유지하는 상태였다.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포르투갈에서 온 자들이었고, 그들 중 하나가 나를 보고는 곧바로 달려왔다.
“쿠보, 저자는 악명 높은 해적입니다. 쿠보의 배를 습격한 것도…….”
“어서 이 도시의 지배자를 불러오란 말이다!”
포르투갈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의 장막 너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내 물건을 손댄 자가 이제 나를 찾는군. 제법 간이 큰 모양인데. 대체 어떤 자인가?”
내 질문을 받은 상인은 쩔쩔매며, 상대의 내력을 고했다.
“엘드라코라는 해적인데, 바다를 떠돌면서 저희 왕의 재산을 강탈하고 다닌 무법자입니다. 지금 염초를 가득 싣고 와서는 자폭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게 다 무엇이겠습니까. 쿠보의 염초를 약탈한 겁니다.”
엘드라코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위협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를 설득하려는 말에 거짓이 상당히 섞여 있다는 건 모르지 않았다. 일단 당장 하는 말부터 앞뒤가 들어맞는 것도 아니었다.
정작 염초 수송선을 습격한 슈트라센은 지금 치소에 갇혀 있는 상황. 그 죄를 엉뚱한 사람에게 덮어씌운다는 것은, 역시 구린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와서 나를 만나고 싶다 했으니, 얼굴이나 봐야겠군. 길을 열게.”
“위, 위험합니다.”
“여러 말 않겠네. 열게.”
강경하게 밀어붙이자, 상대는 마지못해 포위망의 한쪽을 터놓았다. 포위망 안쪽에 있던 자들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세만큼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너는 누구이기에 남의 땅에서 이토록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아서인지, 상대는 나를 꽤 높은 관료쯤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일본어를 쓰지 못하는지, 통역이 옆에서 그의 말을 옮겼다. 하지만 첫 문장만큼은 통역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잉글랜드의 해군 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요. 이 도시의 지배자에게 할 말이 있어 왔소이다!”
댁이 왜 여기 있어?
* * *
치소의 응접실에서는 때 아닌 삼자대면이 열렸다. 정확히는 곧 사자대면이 될 예정이었지만, 당장 여기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통역은 없는 셈 친다면.
나, 잉글랜드에서 온 프랜시스 드레이크, 그리고 포르투갈 상인들의 대리자로 불려온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
사실 마지막으로 온 사람의 경우에는, 이번 일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원래는 내게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엘드라코’라 소개한 이가 따라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내치고, 이전에 그러했듯 루이스 프로이스를 포르투갈인 대표로 부르겠다고 딱 잘랐다. 여기는 내 영지였고, 캥기는 구석이 많은 자들은 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그렇소. 펠리페의 개들이 꽤나 재밌는 짓을 하고 있어서 말이오.”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그렇게 말하자, 프로이스 신부가 호통쳤다.
“섬나라의 쥐새끼가 국왕 폐하를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보통은 이런 말을 들으면 모욕을 당했다고 여겨, 발끈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신부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물론 내가 이베리아인의 배를 털고 다닌 건 사실이오. 하지만 그자들의 왕이 먼저 우리 폐하께 추근덕거리고, 모욕을 일삼아서 말이외다.”
“그건 그쪽끼리의 문제고, 이렇게 날 찾아온 용건부터 말하게.”
“쿠보의 배가 약탈당했다고 들었소이다.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시오?”
역시 해적 중의 해적이라는 것인지, 이 와중에도 떡밥부터 던지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나 역시 거기에 호락호락 넘어가줄 생각은 없었고, 역시 상대를 떠보기로 했다.
“자네라더군.”
“크하하핫!”
내 말을 들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한참을 웃어댔다. 그러다가 정색하고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지목했다.
“안타깝게도, 쿠보의 배는 그다지 돈이 되지 않아서 말이외다. 염초가 이 나라에선 꽤 귀물인 모양이지만, 나는 금은이 더 좋소.”
영국의 사략해적은 그렇게 말한 뒤,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 금은은 충분히 벌었고, 여왕 폐하를 위해서 일할 때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마침 동방항로가 이베리아인도 많으면서, 경계도 느슨하다 하기에 와 봤소이다. 그런데 마침 포르투갈인들이 깜찍한 짓을 벌이고 있더구려.”
그는 인도에서 염초를 싣고 오는 포르투갈 상선단을 습격했노라 했다. 거기까지 들은 프로이스 신부가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다.
“간교한 해적이 이제는 선량한 상인들을 모함하려 하다니!”
루이스 프로이스 역시 영지의 사정은 대강 아는 편이었다. 염초 수송선이 습격당했다는 이야기 역시 그도 아는 이야기였다.
시기적으로 따졌을 때, 포르투갈 상선단은 내가 시정봉행을 접촉시키기 전에 이미 출발해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 종교인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프로이스 신부는 정말로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나와 포르투갈 상인들을 이간질한다고 믿는 기색이었다.
“일단 앉으시오.”
“쿠보,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습니다. 당장 이 자를 매달아 버리십시오. 그게 해적에게 걸맞는 최후입니다.”
“물론 그게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겠소만, 내게는 그다지 의롭지 않은 것 같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염초를 습격한 자는 이미 잡았소이다. 그런데 그가 이상한 말을 해서 말이오.”
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감옥에 있을 헨드릭 판 슈트라센을 불러오게 했다.
“정말로 드레이크 공이 내 배를 습격했다고 믿는 모양이오만, 이자가 바로 진범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