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대항해시대의 한 조각(2)
“시정봉행을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였는지, 꽤 오래되었군요.”
“요즘 워낙 바쁘다 보니…….”
베드로는 스모토에 들어와 있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겉으로 내세운 명목이야 귀한 손님들과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밑에 깔린 제안은 조금 달랐다.
염초 거래를 재개하고 싶다. 그것이 베드로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물밑으로 내민 이야기였다.
“요즘 바다에 해적들이 들끓는 모양입니다.”
“일본이야 쿠보 나으리의 공으로 평온하지 않습니까”
“먼 바다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더군요. 아무래도 명나라 해적들이 냄새를 맡은 모양인데…….”
베드로는 그렇게 운을 뗐다.
“역시 해적들을 때려잡으려면, 염초가 필요하겠는데……. 하필 놈들이 염초 공급선을 건드려 놔서 말입니다.”
“저런. 참으로 큰일이군요.”
언뜻 들으면 자신들 이야기인가 하고 안색이 변할 법도 하건만, 눈앞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뻔뻔했다.
베드로는 당장이라도 이 탐욕스러운 자들을 붙잡아다 고문실에 처넣고 싶었다. 하지만 외국인에게 함부로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 역시 태연을 가장하며, 염초 거래를 타진했다.
“그런 까닭으로, 쿠보께서는 다시 염초를 사들이고 싶어 하십니다.”
“화약이야말로 군국의 중대사지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의 대표는 거기까지 말한 뒤, 말차를 후루룩 마셨다.
“염초는 천축에서 어렵게 날라 오는 것이지요. 여송(呂宋, 필리핀 루손.)만큼만 가까워도 금방 가져오겠습니다마는, 시일이 무척이나 오래 걸릴 겁니다.”
여기서 사람을 보내고, 매입해서 실어 나르는 데에만 족히 일 년은 걸릴 것이다. 그게 포르투갈 사람이 내놓은 답이었다.
“어떻게, 좀 최대한 빨리 구할 길은 없겠습니까”
베드로는 일부러 몸이 달아오른 연기를 했다.
이제 화약 없는 고니시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다른 세력에서는 최정예 병사에게만 철포를 들려주지만, 여기에서만큼은 그 철포가 기본무장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익히 아는 바였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염초는 명에서도 구할 수가 있으니……. 하지만 아시다시피 명과 거래하는 건 무척이나 까다롭습니다. 가령 관리를 매수한다든가 하는 조치가 필요하지요.”
상대는 천축이 아니라, 명을 언급할 것이다. 역시 베드로가 언질받은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속으로 그는 주군의 혜안에 감탄하며, 겉으로는 최대한 다급한 태도를 유지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최대한 빨리 구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시정봉행의 요청에, 포르투갈 상인은 한참을 밀고 당기다가 겨우 승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어려운 연회에서 돌아온 베드로는, 미리 지시받은 대로 곧장 이치로를 찾아갔다.
“역시 주군의 말씀대로였소. 명에서 가져오겠다고 하더구려.”
“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하도록 하지요.”
- - -
스즈키 시게히데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탁을 받고 류큐(琉球 유구, 오늘날의 오키나와.)국 나하항까지 왔지만, 얻은 결과는 스모토에서 탐문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풍이요 말씀하신 시기엔 잠잠했습죠.”
“이 앞바다를 지나는 배야 한두 척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합니까요 명나라 해적 놈들은 물론이고, 포도아에, 요즘은 화란 배까지 다니는 판인데…….”
류큐국이 아주 외딴 섬이기만 했다면, 오히려 지나가는 배가 적어 탐문도 쉬웠을 터. 하지만 예로부터 ‘만국진량(萬國津梁)’을 자처할 정도로 동아시아 해역의 중앙에 위치했고, 모든 상선은 일본과 명을 오갈 때마다 이 근처를 지나가야 했다.
“그럼 혹시 수상한 모습을 본 적은 없나 평소와 다르다 싶은 거라면 뭐든 상관없네.”
히비시마의 위치는 통상 항로와는 외따로 떨어진 곳. 어떤 식으로든 접근하려면 특별한 준비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여송(呂宋, 필리핀 루손.)에서만 볼 수 있다는 거대한 선박이라든가, 혹은 짐 대신 물과 식량, 탄약을 대량으로 싣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스즈키가 질문을 바꾸자, 이번에는 조금 더 가치 있는 답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화란에서 온 사람 중에 포도아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좀 자세히 듣고 싶군.”
스즈키는 새로운 증언을 듣기 위해, 상대의 품속에 금화를 한 닢 찔러 주었다.
주조된 형상이야 국가마다 다르지만, 언제나 금은 만능의 열쇠로 통했다. 적당히 답하고 넘기려던 류큐인은 최대한 자신의 기억을 짜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일단 화란 사람은 포도아 사람을 무척이나 싫어하지요. 그건 아실 겁니다만…….”
남만 사람과 교류가 많은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리라. 하지만 스즈키 역시 눈치로 대강 넘겼다.
“그러게 말일세.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이더군.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화란이 포도아의 속국이라서 사이가 나쁘다든가, 뭐 그렇습지요. 아무튼 그래서 머나먼 타향에서도 이 두 부류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거기까지 말한 류큐인은 좁쌀로 빚은 술을 들이켠 뒤,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 화란인 선장이 포도아 사람들과 마주쳤는데, 꽤 길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별 상품이 오가지도 않았는데 돈을 주고받더란 말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스즈키도 수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모토에서 탐문한 것만 가지고는 단서를 잡기 힘들었던 까닭도 깨달았다.
애초에 그 스스로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염초를 거래했던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당연히 원산지를 움켜쥐고 있었을 포도아 상인들이 배후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실행자가 그들과 무관해 보이는 쪽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 희한한 일이로군. 그 화란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겠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입항할 때면 주로 이 술집을 찾더이다. 아마 여급에게 물어보면 알지도 모를 일이지요.”
때마침 여급이 주문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이번에도 스즈키는 똑같이 금화를 사용하며 질문을 던졌다.
“여길 자주 오는 화란인 선장이 있다던데.”
“아, 헤이르 슈트라센을 말씀하시나 보네요.”
스즈키는 그자가 슈트라센인지 아니면 다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여급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요즘 씀씀이가 커지긴 했어요. 청해에 배를 띄웠다나…… 아무튼 다른 상인들이 손대지 못하는 델 뚫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거치고는 배에 제대로 된 상품도 싣지 않았지만요.”
“상인들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나 대국의 천자가 정한 해금령마저 뚫은 게 상인인데.”
스스로가 상인은 아니었지만, 스즈키 역시 상인의 생리에 관해서는 제법 잘 아는 부류에 속했다.
애초에 처음 화약을 들여온 자들도 선교사나 사신이 아니라 상인이었고, 그들과 교류하며 기술을 습득한 집단이 바로 사이카슈였다.
“혹시 일본인이신가요”
“그렇네만……”
“같은 일본이래도 동쪽은 문을 걸어 닫고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그게 사실인가요”
발 없는 소문이 참 멀리도 온다고 생각하며, 스즈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비슷하지. 각지의 다이묘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동쪽에 사는 자들은 대체로 보수적이라…….”
상업의 이익은 양방향으로 흐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이익이 늘어나는 걸 견디지 못하고 문을 걸어 닫았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보수적이라 말할 수 있을 터. 오다 노부나가가 바로 그러한 이였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말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기에, 스즈키 시게히데는 적당히 설명하고 넘겼다.
“그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의 다이묘하고 연을 맺었다고 하더라구요. 남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들어갔다고…….”
여급이 말하는 다이묘란 역시 오다 노부나가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잖아도 최근 그쪽에서 남만제 대포를 사용했다던가. 이리저리 방증을 종합해 보면, 역시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네. 이건 이야기 값.”
“어머, 고마워라.”
술값을 치르고 항구로 나온 스즈키는 다시 헨드릭 판 슈트라센이라는 자의 배에 관해 탐문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꽤 자주 보이더군. 탐험가라도 되는 모양인지, 항로가 아닌 곳을 향하던데.”
구체적인 단서를 제시하자, 이번에는 좀 더 명확한 답이 되돌아왔다. 항구에서 일하는 자들이 말하는 곳은 히비시마 방면이었다.
“고작 한 척의 카락으로 말입니까”
“탐험은 돈이 되기 어려우니까 말이지. 일국의 왕이 후원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대체로 단출하게 움직이는 편이라구.”
선단을 이루지도 않은 한 척의 카락. 그게 헨드릭 판 슈트라센이라는 화란인이 갖춘 전력의 전부라 했다.
“보통 한 달 주기로 돌아다녔던 거 같은데……. 이틀 전에 출항했으니, 돌아오려면 꽤 걸릴 걸세.”
최대한의 단서를 수집한 스즈키 시게히데는, 각 단서 사이의 연관성을 연결하며 종합하려 했다.
‘포도아 사람과 친근하게 지내는 화란 사람.’
‘최근 노부나가와 연을 맺기도 했고…….’
‘상인이라는 자가 요즘은 상품을 거래하지도 않는다.’
‘거기에 히비시마가 있는 방향으로 출항까지 했다면…….’
헨드릭 판 슈트라센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은 남아 있었다.
아무리 남만선이 화선(和船, 일본 전통 방식의 선박.)보다 강력한 편이라지만, 무슨 수로 세 척의 배를 흔적도 없이 가라앉혔다는 말인가. 이제는 그걸 알아볼 차례였다.
스즈키는 자신이 이끌고 온 열 척의 배를 동시에 움직여 히비시마로 향했다. 가는 길은 평온했고, 돌아오는 길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 헨드릭이라는 자가 제법 머리를 굴리는 모양인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친구는 빈손으로 나하항에 돌아왔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적은 이쪽의 규모를 가늠하고, 안 되겠다 싶으면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 거칠 것 없는 바다에서 무슨 수로 일방적인 관측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해적은 상당히 영리하게 놀고 있었다.
이제는 닌자를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한 스즈키는 자신을 따라온 이가류 닌자들 중 우두머리를 호출했다.
“단조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스즈키 공.”
“내가 알기로는 단조가 한둘이 아닌데, 자네는 몇 번 단조인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조라는 이름을 받는 순간, 과거의 제 자신은 잊습니다.”
같이 조선을 다녀왔던 이가류 닌자의 이름도 단조였다. 그걸 생각하며 농담을 던졌더니, 무시무시한 답이 되돌아왔다.
“어, 그래. 알겠네. 뭐, 그걸 묻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니고…….”
정신을 가다듬은 스즈키는 자신의 작전에 필요한 것들을 질문했다.
“닌자들은 바다에서 맨몸으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지”
“충분히 준비를 갖추었다면, 하루에서 이틀까지는 가능합니다.”
“닌자가 아닌 사람도 따라 하면 그렇게 버틸 수 있나”
“배를 오래 탄 수부는 저희보다도 더 길게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물에 익숙하지 않다면,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스즈키는 그 외에도 배를 모는 법은 아는지, 싸움 실력은 또 얼마나 되는지를 세세히 물어보았다. 단조는 거기에 최대한 아는 대로 답했다.
“적을 꾀려면 미끼가 필요한데, 자네들이 미끼가 되어 주어야 될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