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대항해시대의 한 조각
“죽의 장막이 따로 없군.”
열다섯.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에서 죽어나간 이가류 닌자의 숫자였다. 오다군이 사용하는 화약의 출처를 알기 위해 닌자들을 파견했고, 그중에서 절반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부하가 유람을 다녀와서는 대뜸 산에서 인광석을 캐냈다더라는 이야기. 가만히 버려두었던 우지마사를 움직여서 소출도 변변찮은 산지를 가져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인간, 그것도 전문 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닌자는 귀중한 자원인데, 많은 수를 허망하게 잃어버렸다. 그 점을 안타까워하자, 이치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자주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야. 마츠리 전후로 잡아낸 간자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지?”
질문을 받은 이치로는 가만히 숫자를 헤아린 다음 답을 내놓았다.
“여섯을 잡았고, 약 열에서 열다섯 정도가 도망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는 서른을 투입해서 반이 죽었고 말이야. 정보의 추가 너무 기울었어.”
내 말을 들은 이치로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미묘하게 민망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했다.
“너를 책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노부나가는 자신의 영지를 걸어 닫았으니 침투도 쉽지 않았을 거고.”
오다 가문의 영지는 추산 이백만 석 정도. 인구도 역시 그쯤 된다고 보면 얼추 맞았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이 소규모 촌락으로 흩어져 있었고, 그 작은 마을에 숨어들어가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반면 내 영지에서는 이 좁아터진 아와지국에만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하루에도 수많은 외부인들이 드나들고 있다. 아무리 주민들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해도, 도회지에서 낯선 이는 흔한 존재였다.
화약 제조법 유출에 관한 건만 해도 마찬가지. 해마다 수십 척의 배가 히비시마를 드나들고 내 영지에서 화약이 장난감으로도 굴러다니는 판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언제 흘러나가도 이상할 건 없었다.
싸고 싼 사향내도 난다고 했다. 하물며 수천 명이 연관된 대사업. 새어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의 지능은 바닥을 긁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차피 다른 다이묘 중에 히비시마를 건드릴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그러니 중요한 지점만 지키면 그만일 터였다. 정작 내륙에서 인광석이 나와 버리고 말았지만.
사가미 만 남쪽의 화산섬이면 몰라도, 뜬금없이 혼슈에서 인광석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일을 급하게 추진한 것도 있고……. 이 기회에 제대로 첩보망을 형성해 봐.”
“알겠습니다.”
* * *
오다 노부나가에게 화포를 팔았던 네덜란드 상인은 남쪽 바다를 헤매고 있었다.
헨드릭 판 슈트라센. 바다로 뛰어나온 사나이가 으레 그러하듯, 그 역시 일확천금을 꿈꾸는 야심가였다.
“슈트라센 선장님, 저기 일본인의 배가 있습니다! 표적이 맞는 것 같은데요.”
“좋아. 들키지 않게 간격을 유지한다.”
장애물이 없는 바다 위에서는 서로의 위치를 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선박의 구조상, 돛대 위에 견시를 올릴 수 있는 남만선, 그것도 카락인 슈트라센의 선박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배는 그 쿠보의 소유가 아닙니까? 자칫하면 일본 제일의 세력가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 왜 그러게 쫄아 붙었나?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지!”
“그, 그래도…….”
헨드릭 판 슈트라센 역시 사카이 쿠보가 다스리는 항구에서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경쟁자는 그 반대인 법. 게다가 그는 나름대로의 대의명분도 갖춘 상태였다.
“이봐, 지금 이 짓거리가 나 하나 좋자고 하는 걸로 보이나? 조각상 나부랭이나 물고 빠는 포퍼리(popery, 칼뱅파가 가톨릭을 부르는 멸칭.) 녀석들을 엿먹일 절호의 찬스란 말이야.”
네덜란드의 상공인들은 대부분이 칼뱅파였고, 선장을 비롯한 이 배의 선원들 대부분 역시 그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라고 했던가. 그 쿠보가 포퍼리의 세례도 받았다는 거, 알고 있나? 이건 신성한 성전이야!”
슈트라센 선장은 그렇게 부선장을 일단 윽박지른 뒤,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
“웃기는 게 뭔지 아나? 이번 사략질을 후원해 준 자들 중에는 포르투갈 놈들이 훨씬 많다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그 녀석들이 어째서 쿠보에게 해로운 짓을 밀어주느냐고? 결국은 돈 문제 아니겠나. 그 잘난 포퍼리 놈들도 결국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지.”
포르투갈 상인은 해금령을 이용해서 일본-명-필리핀의 삼각무역을 주로 행했다. 하지만 그들이 인도의 고아에서 퍼오는 염초로 벌어들이는 돈도 막대했다.
그 알째배기 수입원 하나가 히비시마 때문에 턱 막혀 버리고 말았으니, 아무리 쿠보가 신앙의 형제라고 해도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개중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영지 내에서 가톨릭을 강요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이도 존재했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직접 나설 수는 없어도, 포르투갈 상인들 역시 누군가가 대신 코를 풀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헨드릭 판 슈트라센이 바로 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어쨌든 무턱대고 달려드는 건 아니니까, 이 짓거리에 토 달지 말라고. 알겠나?”
그렇게 며칠을 추적한 끝에, 슈트라센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섬을 발견했다.
“단단히도 요새화해 놨군.”
흙담이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돛대 위에서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도가 한계였지만, 헨드릭이 판단의 재료로 삼기에는 충분했다.
“섬을 직접 공략하는 건 무리겠군. 배가 대양 한복판으로 나오면, 그때 습격한다.”
* * *
“배가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는다고?”
“어, 바다 사정을 고려해도, 지금쯤이면 돌아와야 하는데…….”
스즈키가 찝찝하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풍랑을 만났을 가능성은?”
“그랬다면 소문이라도 돌았을걸.”
이미 스즈키도 그 나름대로 조사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혹시 싶어서 류큐와 큐슈 남부에 탐문해 봤지만, 바다는 잠잠했고 생존자도 나오지 않았어.”
히비시마와 통하는 항로는 대양에 속하는 해역.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기에, 무조건 세 척씩 선단을 이루어 다니게 했다.
그런데 그 세 척 모두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꽤 수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한 번으로 끝난 것도 아니고, 두 선단이 모두 실종된 상태야.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 배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지.”
히비시마에 보낸 배들은 모두 일천 석짜리 관선이었다. 체급도 체급이거나와, 좋은 목재를 가려서 건조한 만큼 제법 튼튼했다.
게다가 선원들 역시 숙련자들로만 구성했으니, 어지간해서는 이토록 완벽하게 실종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소행이군.”
“확답은 할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고, 스즈키 역시 동의했다.
“그럼 범인이 누구냐가 문제겠는데…….”
내가 손쉽게 염초 얻는 걸 싫어할 만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특정인을 지목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어지간한 뒷공작은 대부분 오다 노부나가의 소행이긴 했는데, 지금 벌어진 사건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생긴 일. 적어도 오다 수군이나 도쿠가와, 구키 수군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일단 유력한 것은, 그간 염초를 팔아 온 포르투갈 상인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법 세가 커서 무턱대고 붙잡아다 조사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스즈키에게 전권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일천 석짜리 관선을 스무 척 붙여 줄 테니까, 조사를 부탁할게.”
“알았어.”
스즈키에게 명령장을 작성해서 내준 다음, 시정봉행 베드로를 불러들였다.
“요즘 남만 상인들의 동향은 어떠한가?”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사며 금, 향신료, 염료 따위를 가져오고, 도자기와 호피에 칠기, 인삼……. 요즘은 면직물도 종종 사가더군요.”
예전과는 교역 상품의 종류가 많이 변해 있었다. 조선에서 가져온 물품이 새로 추가되었고, 수입품 중에는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대거 늘어난 상태였다.
그리고 시정봉행은 염초와 은, 사람, 그러니까 노예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거래되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긴 했다.
“혹시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있지는 않던가?”
“염초 거래가 줄었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새로운 상품을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상인이 아예 장사를 접으면 몰라도, 새로운 상품을 찾았으니 문제는 없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간 염초거래는 사실상 땅 파서 장사하는 꼴이었으니, 대놓고 말하진 못하더라도 불만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 염초 거래에 관한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듣고 싶군.”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내가 계속해서 평소와 다른 질문을 던지자, 베드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지금 히비시마를 다녀오는 배들이 실종되고 있어.”
“그, 그런…….”
베드로가 아무리 거상의 일족인데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 전적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내 밑에서 일하는 관료였다.
자기 일족을 위해 행정적으로 적당히 손쓰는 것과, 영지의 전략적 근간이 뒤집어지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해적의 소행인데, 내가 염초를 가져와서 손해를 볼 자들이 결국 정해져 있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전에 염초를 거래하던 자들을 은밀히 떠보도록 하지요.”
* * *
“요즘 장사는 어떤가?”
“늘 똑같지. 요즘은 일본 놈들이 아주 기세등등해져서 골치야.”
포르투갈 상인들의 아시아 무역 거점은 필리핀의 루손이었고, 자연스럽게 여기에서 그들만의 논의가 이루어지곤 했다.
비록 명나라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숫자는 극히 드물었고 본국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이곳은 아시아에 나온 포르투갈인에게는 본국이나 마찬가지인 곳. 외국에서 내내 긴장하며 장사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은 마음을 푹 놓은 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근데 정말 식민지 놈을 믿어도 되겠나?”
“아무려면 어떤가. 원래 우리랑 사이가 좋았던 것도 아닌데. 모함으로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네.”
“아무튼 다음 번 항해에는 고아 항에서 염초를 가득 실어오도록 하게나.”
장사의 묘리란 결국 수요와 공급을 파악하는 것. 일본에 염초가 부족해지는 만큼, 이들이 돈을 벌 기회였다. 아니, 이 기회 자체를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간 못 벌었던 만큼, 긁어모을 수 있겠군.”
포르투갈 상인들은 그렇게 밀담을 나눈 뒤, 각자의 배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