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시코쿠 평정(6)
“마, 말도 안 돼…….”
아무리 둔한 자라고 해도, 지금 쵸소카베군이 벌인 야습에는 의미가 없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적진에서 쏘아올린 불꽃은 환하게 세상을 밝혔다. 어둠의 장막 뒤에 숨어서, 요란한 소리로 정체를 감추려던 쵸소카베군은 그 실체를 보여야만 했다.
“역시 쿠보의 편에 들길 잘 했군.”
그렇게 중얼거린 소고 마사야스, 아니 이제는 미요시 마사야스로 환속한 무사가 칼을 빼들었다.
“쥐새끼 몇 마리가 태산을 속이려 하느냐!”
고니시군의 본진에 허위로 야습을 걸려던 쵸소카베군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 만약 이쪽이 허위라면, 적은 전부 남쪽으로 몰려갔을 터. 패퇴시킨 것에 안심하지 말고 곧바로 구원을 가야 하오.
쿠보의 측근, 혼다 마사노부가 미리 말해둔 내용에 의하면, 지금은 느긋하게 즐거워할 때가 아니었다.
본대의 선봉장을 맡은 몸으로, 미요시 마사야스는 곧장 적이 있는 곳을 향했다.
* * *
요란한 폭음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때마다 하늘은 대낮같이 환해졌다. 더 이상 야습은 의미가 없었고, 지금 전장을 가리는 암흑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 스토쿠 텐구의 조화다!”
쵸소카베군의 병사 중 하나가 공포감에 젖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순식간에 전군으로 퍼져나갔다.
스토쿠 텐구. 그 기원이 되는 실존인물은 수백 년 전, 일본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스토쿠 덴노라는 자였다.
수 차례의 정치적 술수와 무력을 동반한 싸움 끝에, 그는 사누키로 쫓겨나 절에 유폐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가 거기에서 끝났다면, 지금 쵸소카베군이 겁에 질릴 일도 없었다. 말년의 스토쿠 덴노는 참회의 뜻을 알리기 위해, 경전을 필사해서 조정에 올렸다. 하지만 당시의 정권은 오히려 의심을 품었고, 그 결과 좌절한 그는 ‘덴노를 잡아서 백성으로 하고, 백성을 덴노로 만들리라!’며 저주를 퍼붓고 스스로 ‘일본대마왕’을 자처했다. 그리고 사후에는 요괴 중 하나인 텐구(天狗 천구) 중 으뜸으로 취급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벌어진 재난은 모두 그가 배후에 있다는 신앙이 생겨났다. 시코쿠에서는 그의 원한을 피하기 위해, 수호신으로 삼았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수도에서 빈번히 일어난 대화재며, 기괴한 별의 출현, 그리고 각종 내전의 원인까지 모두 그가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얼마 전, 아와지국에서 벌였던 마츠리. 불꽃놀이의 소문은 이리저리 부풀려졌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스토쿠 덴노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자들도 없지 않은 상황이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기반은 시코쿠 내의 토사(土佐 도좌)국. 당연히 그 휘하의 병력 역시 시코쿠 출신 아닌 자가 없었다.
민간에서는 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보며, 귀신의 조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사들은 스토쿠 덴노의 저주를 떠올리며 찜찜함을 마음 한 구석에 두고 있었다.
일본의 무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 원평등귤)의 사대본성을 자처했다. 그리고 그 겐페이토키츠는 모두 덴노의 아들들이 신하의 위치로 강하한 자들. 지금 일본의 세력가 중에서 유일하게 무사이기를 거부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존재는 ‘덴노를 백성으로, 백성을 덴노로 바꾸리라’는 저주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 역시 그 전설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수하들처럼 동요할 때가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는 졸병 하나를 찌른 뒤, 다른 병사들을 질타했다. 다행히 지금 벌어지는 현상의 정체는 그의 동맹에게 들은 바 있었다.
“저것은 화약을 터트린 것에 불과하다! 너희들은 폭발음도 듣지 못했나!”
그 말을 들은 쵸소카베군은 곧바로 자신들의 다이묘를 따랐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지 오래였다.
이미 상당수의 병졸들은 자신의 무기를 내던지며 투항하기 시작했고, 쵸소카베 가문을 오래 따른 무사들이나 겨우 주변을 옹위할 뿐이었다.
* * *
“하하하하…….”
도토야 조세이는 넋을 놓은 듯이 웃었다.
산중으로 끌어들이려 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이쪽을 고사시켜 버렸다. 야습으로 상황을 타파하려 했더니 아예 밤을 낮과 다름없게 해 놓았다.
얼마간을 그렇게 웃던 조세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할 일을 했다.
그의 주군인 하시바 히데요시는 자신을 여기로 보내며, 절대 고니시 유키나가를 이기려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정확히 말하면 이기기 위해서 고집을 부리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원래 남아도는 병력을 소진시키기 위해 파견한 것. 그 목적에만 충실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삼만 대 일만 오천의 싸움. 거기에다 지형의 이점까지 얹어서, 이쪽이 유리할 예정이었다. 이건 단지 누군가를 겨냥해서가 아니라, 무사의 한 사람으로서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주군의 명은 무사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법. 조세이는 곧바로 모토치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도토야 공, 어찌하면 좋겠나?”
다른 이들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있기는 했지만, 황망해하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세이 역시도 그의 마음은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일단 남쪽은 이미 적이 방어태세를 갖춰놓고 막아 둔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돌아가는 형편을 보건데, 허장성세를 파악한 고니시군의 본대가 곧 내려올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동쪽이나 서쪽. 역시 봉쇄망이 깔려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주력부대와 마주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주변 정황을 되새긴 조세이는 한 방향을 짚었다.
“동쪽으로 가시지요.”
“거긴 미요시 가문의 영지가 아닌가?”
길쭉한 형태의 시코쿠섬을 양쪽으로 나누면, 동쪽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그들이 진치고 있던 즈루기 산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면, 아와 미요시의 세력권이 나왔다.
조세이의 말은 적지로 가자는 것이었으니, 모토치카가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의 계책을 마저 듣고 난 뒤에는 일리가 있었다.
“고니시 수군은 토사와 이요에 집중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군 역시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병력이 여기에 나와 있으니, 뚫고 달아나기에는 괜찮을 겁니다.”
조세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이끌고 온 병력을 앞세웠다. 당연히 그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고기방패였다.
“고,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음세!”
“일단 빠져나간 다음의 일입니다.”
서로 다른 두 세력이 공동으로 싸울 때에는 필연적으로 눈치 싸움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피차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마음은 마찬가지. 조세이의 의도야 따로 있었지만,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헌신적인 동맹의 태도에 감격했다.
고니시군은 시시각각으로 남북의 포위망을 좁혀왔고, 조세이가 이끌고 온 병력은 그 사이의 틈새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이미 쵸소카베군의 상당수는 죽거나 항복한 상태였지만, 아직 남아 있는 자들에 비하면 쭉정이에 불과했다. 아직 가문의 귀한 자산을 손에 쥐고 있는 모토치카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 * *
아군은 순조롭게 대승을 거두었다.
모토치카 본인을 잡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갈 곳이 없을 터. 잡든 놓치든, 어쨌거나 시코쿠에서의 패권은 확립한 상태였다.
가장 먼저 돌아온 장수는 역시 미요시 마사야스였다. 아마 시마 사콘을 비롯해,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이들은 조금 늦게 돌아올지도 모를 일. 어차피 졌을 때나 급한 법이지, 이겼을 때는 조금 느긋해도 괜찮았다.
나는 그를 아와 미요시의 수장으로 세우기로 했고, 어쨌든 무가의 당주라는 자리는 권위가 필요한 법. 마사야스에게 종군을 권유했고, 그는 흔쾌히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제 역할을 잘 해냈으니, 나름대로 자신이 필요한 위신은 챙겼을 터였다.
“쿠보,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그는 이미 철저히 내게 복속하기를 약속했고, 그 증거로 관료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일전에 호조 우지히데도 같은 것을 부탁했지만, 그의 영지는 멀어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시코쿠는 좁은 바다 건너편의 땅. 그가 아와지 출신의 관료를 쓰겠다고 나선 것은, 철저히 이쪽의 방침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철저히 아랫사람처럼 행동했다. 온전히 내 사람이기를 자처한 그에게 나는 선물을 하나 쥐어주었다.
“나야말로 자네의 시코쿠 간레이 취임을 축하하네.”
“예, 옛?”
덴노의 명의로 된 임명장을 받아든 마사야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라면 그가 받을 수 없는 자리이기는 했다. 하지만 덴노는 내 손에 있었고, 쵸소카베 가문과 싸우는 중에 표문을 올려 미리 받아두었다.
이왕 시코쿠의 대리인을 세우기로 한 이상, 그럴싸한 직함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본은 지형이 참 더러웠고, 분권적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조정이나 막부나 지방에 일정한 직책을 세워 관리를 맡겼는데, 막부에서는 보통 그 자리를 탄다이(探題 탐제)나 간레이(管領 관령)이라고 했다.
시코쿠는 그나마 기나이와 가까웠고, 따로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호소카와 가문이 시코쿠를 차지하면서, 한때 시코쿠 간레이를 자처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덴노를 끼고 있다는 것은 참 편리했다.
“시, 시코쿠 간레이라니…….”
마사야스는 아예 울먹이고 있었고, 그를 따라온 아와 미요시의 가신들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저렇게 격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방향의 감정을 보였으리라.
“미요시 가문은 절대로 쿠보께 등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마사야스를 비롯한 미요시 가문이 저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원래 그들은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이었다. 그러다 그 미요시 나가요시의 부친이 되는 모토나가 시절, 주가(主家)을 몰아내고 미요시 가문이 기나이의 패권을 잡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핏줄에서 이어지는 정통성이 부족했고, 이렇다 할 직함을 얻을 수는 없었다. 조정의 관직이야 돈만 바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막부의 역직은 그렇지가 못했기 때문이다.
나가요시 대에 이르러 미요시 가문은 천하인의 자리에 올랐지만, 끝내 쇼군은커녕 그 밑의 역직 하나 얻지 못했다.
만약 이전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졌다면, 역시 마사야스는 시코쿠의 네 개국을 다스리는 슈고에 불과했을 터. 하지만 죽은 쇼군 요시아키가 길을 터준 덕에, 간레이직을 끌어내기는 쉬웠다.
애초에 지금 간토 간레이인 오다 노부나가도 혈연에 기반한 어떤 것도 없이 간레이직을 받지 않았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정통성을 지녔던 마지막 쇼군의 방침. 거기에 총부리가 더해지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마사야스가 감격하며 물러간 뒤, 마사노부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간레이라니…….”
역시 그는 내 의도를 단숨에 꿰뚫어보았다.
사실 지금의 일본에서 직함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물론 본인에게 그 권위를 강제할 힘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그보다도 도토야 조세이라는 자는 빠져나갔나?”
“그렇습니다. 역시 영민한 자인 것 같군요.”
“안타까운 일이야.”
전쟁 중에 사이카슈가 내려놓은 병력이, 실은 오다 노부나가 휘하라는 사실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번에 시코쿠 간레이를 만들어서 마사야스에게 수여한 일 역시 간접적으로는 노부나가를 견제하기 위한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소식은 도토야 조세이의 존재였다.
“아무래도 질긴 인연이 또 늘어난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