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시코쿠 평정(3)
그동안 줄곧 공세를 유지했던 쵸소카베군은 이제 태도를 바꾸었다.
차지한 성 중에서 접근이 쉬운 평성이나 평산성은 모조리 버리고, 접근이 어려운 산성에 올라가 버티기 시작한 것이다.
“송구스럽습니다, 주군.”
쵸소카베의 본거지를 강습하러 보낸 쿄타로마저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자신들의 거성인 오코(岡豊 악풍)성마저 포기하고, 전부 시코쿠의 험악한 산지로 올라갔다고 했다.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주민을 붙잡아 물어보니, 모두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도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코쿠는 나름대로 크기는 했지만 섬인 주제에 산세가 험악했다. 그 지형에 의지해 버티려고 하는 태도였다.
“뭐, 어쩔 수 없지. 본진 습격이 언제나 통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쵸소카베가 눌러앉은 핫츠이시(八石 팔석) 성은 공략하기 까다로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기나이의 성은 여기에 비하면 순한 맛일 정도로 지형부터가 더러웠다.
아군이 성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면, 숲에서 가볍게 무장한 병력이 뛰어나와 습격하곤 했다. 근접전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는, 공성용 화포의 운반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야규 도장의 문하생들이 나름대로 힘을 쓰기는 했지만, 그 숫자가 적어서 모든 방면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적의 군량은 얼마나 쌓여 있지?”
“추정한 바로, 약 삼년은 거뜬하리라 생각합니다.”
주민들이 먹을 식량까지 몽땅 거둬들여서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어림짐작으로만 삼년 이상의 식량을 쌓아두었다고 하니, 아마 실제로 가면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토사와 이요의 봉쇄는 유지하고, 병사들에게 도끼를 들려주도록.”
* * *
시마 사콘은 숲을 노려보았다.
“내가 앞장서겠다! 안전을 확인하면, 도부수들이 뒤따르도록 해라.”
좁은 산길을 넓히는 것. 그것이 무네요시가 받은 임무였다.
적은 숲에 숨어서 아군의 진격을 방해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넓은 길을 뚫을 필요가 있었다.
“사형, 저기 적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시마 사콘 역시 야규 무네요시에게 군학과 검술을 배운 몸. 야규 도장의 문하생은 모두가 그의 사제였다. 그들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숲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숲이라고는 해도 숨을 만한 곳은 정해져 있는 법이지. 쳐라!”
매복은 언제나 의외성이 무서운 법. 이미 위치를 파악한 적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발각된 자들은 뛰어나와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헛된 저항에 불과했다.
한 차례의 청소가 끝난 뒤, 어린 문하생 하나가 사콘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형, 굳이 뒤에 철포수를 세울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공을 나눠 주는 것 같으냐?”
그 질문에 정곡을 찔렸는지, 질문한 문하생이 씩 웃었다.
“군을 움직일 때는 언제나 효율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철포수를 둘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는 숲이고, 철포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두고 보면 안다.”
마침 휴식시간도 얼추 끝난 상황. 사콘은 문답을 끝낸 뒤, 다시 진격을 지시했다.
역시 또 한 무리의 적이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일방적인 청소 같은 싸움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측에서 나온 적을 상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좌측에서도 매복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시마 사콘과 그 사제들이 당황해하기도 전에, 뒤에서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아까 질문을 했던 문하생 역시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적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효율이 좋다는 것은, 항상 최소의 병력으로 적을 상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전이야말로 진정한 가르침을 받는 도장이지.”
사콘은 그렇게 말하며, 어린 사제의 어깨를 툭툭 쳤다.
* * *
“정공법인가…….”
“앞으로 보름 정도면 길이 뚫릴 듯합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숲에 의지해서 접근을 막았고, 그 방법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니시군은 나무를 베어 가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저쪽에도 근접전에 능한 부대는 있었고, 그들 모두가 벌목꾼들에게 붙은 것 같았다.
아무리 기습으로 방해를 한다 해도, 적의 접근은 이제 막을 방법이 없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렇게 적의 본대가 성에 닿는 날이 쵸소카베군의 마지막이 될 터였다.
모토치카는 가만히 날짜를 헤아렸다.
“앞으로 스무 닷새 뒤에는 원군이 온다고 했다. 적이 성까지 접근하기까지는 앞으로 보름……. 열흘은 버텨내야 한다는 이야기로군.”
약간의 시간차를 감안하다고 하면, 열흘이 아니라 보름은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하지만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하면, 성은 허망하게 무너지리라.
“좋다. 핫츠이시 성은 버린다. 늙고 힘없는 병사만 조금 남겨서 인기척을 내고, 우리는 다른 성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아와의 미요시 가문을 공격할 때부터,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략전술을 대비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수군을 이용한 해안가 강습부터, 강력한 화력까지. 그 모든 것들을 무력화시킬 방법은 뻔했다.
험한 산과 숲을 이용해서 접근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원군을 기다리는 것. 고니시군을 상대하려면, 명예 따윈 개나 줘버리고 최대한 치사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원군이 도착하고 나면, 이미 산속 깊이 들어온 적을 포위한다.
쵸소카베의 군대는 시코쿠의 산지에 익숙했다. 그리고 여기에 원군이 가세하기만 하면, 고니시 유키나가도 힘을 쓸 수 없을 터였다.
* * *
“호리우치 가문은 통과를 허락했고…….”
하시바 히데요시는 군대가 움직일 경로를 짜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만이라는 대병이, 그것도 사카이 쿠보의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려면 쉬운 일은 아닌 법. 상당한 잔재주를 부릴 필요가 있었다.
이세국을 거쳐 기이국을 지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이카슈의 배를 타고 시코쿠로 건너간다. 말은 쉽지만, 현지 세력의 협조를 구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을 터였다.
다행히 기이국을 다스리는 호리우치 가문은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고, 남은 건 쵸소카베 가문의 의사, 그리고 사이카슈와의 계약. 이 두 가지만 해결하면 끝이었다.
“성주, 도토야 공이 서신을 보냈습니다.”
마침 히데요시가 기다리던 것이 왔다. 심부름꾼에게서 편지를 받아든 그는 곧바로 펼쳐서 내용을 확인했다.
-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이쪽의 제안에 선선히 응했습니다. 지금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상태입니다. 병력은 미리 정한 대로, 이만을 약속했고…….
히데요시는 도토야 조세이의 글을 꼼꼼히 읽은 뒤, 그대로 화로에 집어넣었다.
“신참내기가 아주 잘해주는군.”
새로 들어온 가신은 사이카슈에게 배를 빌리는 것까지 말끔하게 처리해놓았다. 이제는 병력을 보내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아무리 자기 휘하의 병력이라고는 해도,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가신. 먼저 그의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아뢰는 것이 순서였기에, 기요스 성의 혼마루로 가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손님이 그를 찾아왔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핫토리. 오다 노부나가의 직속 닌자가 그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얼마든지.”
히데요시와 핫토리는 평소에도 제법 친한 편이었지만, 지금 방문객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주인은 다소 당황스러워했지만, 그런대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은 정작 그 대접을 받을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차는 필요 없네. 매우 중요하고도 급한 이야기니…….“
“무슨 일이길래?”
“어째서 주군의 가장 큰 대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인가?”
핫토리의 어조는 변함이 없었지만, 히데요시에게는 그보다 더한 호통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하인으로 오다 가문에 들어온 이래, 그의 지위는 꾸준히 올라갔다. 먹는 것부터 몸에 걸치는 것, 그리고 거처까지 모든 것이 변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변치 않노라 자부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지금 그 충성심이 다른 누구도 아닌, 주군의 직속 닌자에게 의심을 받는 상태였다.
“대적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 애초에 나는 어느 누구와도 내통한 적이 없네.”
히데요시는 빠르게 자신의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어떤 점에서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는가. 그나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지금 꾸미고 있는 계략 정도일까.
하지만 이미 남아도는 병력을 용병처럼 써도 좋다고 허락을 받아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고니시 유키나가의 행보를 훼방하는 방향으로 쓸 참이었는데, 그를 제외하면 누가 주군의 대적이라는 말인가.
“나는 정말로 주군께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없단 말일세.”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후우……. 정말 모르는 모양이군.”
핫토리는 가만히 상대의 기색을 살피다가, 여전히 모를 말만 계속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최근에 받아들인 가신 중에, 도토야 조세이라는 자가 있었지?”
“그, 그렇네. 우키타 가문의 마지막 아이를 데려온 자였네. 주군께서 그 아이를 내 가 돌보라 하셨고, 그때 같이 받아들였지.”
“좀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나?”
히데요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토야 조세이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형일세.”
그렇게 운을 뗀 핫토리는 도토야 조세이의 내력을 풀어놓은 다음, 히데요시가 의심받은 이유까지 선선히 말했다.
“사실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바타 공일세.”
“그분이 어째서?”
“요즘 들어, 자네와 계속 충돌하지 않았나?”
시바타 카츠이에는 니와 나가히데와 더불어 노부나가의 쌍벽, 혹은 양 날개나 다름없는 인물. 히데요시의 성을 지을 적에도, 시바타에서 한 글자를 가져온 바 있었다.
가신들끼리 의논을 할 때마다 히데요시와 반대 입장에 서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워낙 성격이 불같은 무사였기에, 히데요시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다.
“도토야 조세이의 외모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무척이나 흡사했지. 그분의 말을 듣고 난 뒤에 보니, 정말로 그러하더군.”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한 핫토리는 곧바로 조세이의 내력을 캐보았고, 그 의심은 사실로 판명된 상황이었다.
“어쨌든 자네는 모르는 일이라는 거로군.”
그렇게 말한 뒤, 핫토리는 방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 그를 히데요시가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리게. 조세이, 그 친구를 어떻게 할 셈인가?”
“일단 주군께 아뢰어야겠지. 그리고 붙잡아서 본보기로 죽이던가, 아니면 인질로 억류하던가 해야 하지 않겠나.”
“내게 좋은 생각이 있네. 일단 같이 주군을 뵈러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