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시코쿠 평정(2)
“이 몸이 아와를 내놓아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카미 님의 아우 되시는 소고 공께서…….”
나가하루는 미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자신의 칼을 빼들었다.
“네놈도 미천한 상인새끼와 한 패거리구나!”
다른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섬광이 번뜩였다. 단지 말을 전달했을 뿐인 나가하루의 가신은 그대로 자신의 몸뚱이를 보고 말았다.
“고니시 유키나가, 그자가 감히 본가를 능멸하려 하다니!”
고작해야 일개 상인, 그것도 미요시 가문을 섬기던 입장에 불과한 자. 그것이 미요시 나가하루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보는 관점이었다.
당연히 그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고, 지금 받은 답변은 더더욱 그러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불문에 부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부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하는 자는 역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나가하루는 그렇게 말한 뒤, 내실로 휙 들어가 버렸다. 가신들은 지금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는 한편, 불안감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만으로는 쵸소카베 가문을 이길 수가 없소이다.”
“차라리 호소카와 가문이 손을 내밀었을 때, 도와주었더라면…….”
지금 아와의 미요시 가문이 처한 상황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시코쿠의 서쪽을 잠식해나갔다.
비록 본가는 역적으로 토벌당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시코쿠의 호소카와 가문은 건재한 상태였다. 그러나 본가의 소멸은 분가에게도 악영향을 주었고, 기회를 엿보던 쵸소카베는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섰던 것이다.
궁지에 몰렸던 호소카와 분가는 미요시 나가하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원래 미요시 가문은 호소카와의 가신, 그리고 하극상으로 올라선 패자였던 만큼,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하루는 호소카와 분가의 진의를 의심하며, 협력을 거부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순조롭게 시코쿠 대부분을 차지했고, 이제 동쪽 끝자락의 아와국만 남겨 둔 상황. 미요시 가문에게 승산은 없었다.
가신들은 서로 눈치를 살펴보기만 했다. 마침 자리에는 나가하루의 심복인 시노하라 나가후사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누군가가 조십스럽게@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 놓았다.
“주군께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고니시 유키나가가 제시한 조건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소.”
그렇게 운을 뗀 자가 나오자, 하나둘 동조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와를 유키나가 본인이 차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소고 마사야스 님이라면 역시 돌아가신 짓큐 님의 차남이 아니십니까.”
다이묘 본인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물러나는 일은 제법 흔한 편이었다. 승계가 순조롭기만 하다면, 전임자는 일정한 권위를 존중받기도 했다.
그리고 가신들 입장에서도, 나가하루는 좋은 주군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가하루 님을 유폐시키는 것이 어떠할지……?”
의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고, 가신들은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렸다.
“무슨 일이냐!”
모두 물러가게 했던 가신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나가하루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에게 최후통첩이 날아들었다.
“더 이상 아와국을 나가하루 님께 맡겨둘 수 없소이다.”
“뭐, 뭐라?”
아랫사람은 감히 윗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법. 하지만 지금 아와 미요시의 가신들은 서슴없이 나가하루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놈들이…….”
나가하루는 다시 한번 칼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순순히 목을 내어주지 않았다.
“미요시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순순히 따라주시지요.”
아와국을 장악한 자들은 곧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승낙의 뜻이 담긴 서신을 작성했다.
* * *
“주군, 주군.”
아와의 다이묘가 저택에 유폐된 지도 사흘 가량 지났다. 이미 가신들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불러들였다고 했다.
나가하루는 멍하니 앉아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살금살금 들어와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주군, 주군.”
그를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가신, 시노하라 나가후사의 목소리였다.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주군을 구하러 왔으니, 속히 가셔야 합니다.”
만약 머리가 굴러가는 자라면, 자신이 궁지에 몰렸음을 알 터였다. 하지만 어리석은 나가하루는 그런 것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충복이 이끄는 대로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어느 정도 안전해졌다 싶었을 때, 나가하루는 자신을 구해준 가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도 저택에 감금되지 않았던가?”
“여기, 도토야 공이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도토야?”
그러고 보니, 낯선 이 하나가 일행에 끼어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도토야 조세이라 합니다. 전에는 우키타 가문을 섬겼고, 지금은 하시바 성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낯선 조력자의 내력을 들은 나가하루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우키타는 세토 해 건너의 비젠을 연고로 하는 가문이었다. 지금은 멸족한 상태라 했으니, 무사로서 새 주인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지만 하시바라고 하면, 저 멀리 동쪽의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는 자였다.
“이 몸하곤 연이 없는 듯한데…….”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 해도, 나가하루 역시 난세의 군웅 중 하나. 까닭 없는 도움이 반드시 선의일리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 가문은 대대로 미요시 가문의 은의를 입었습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공을 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더니, 험한 꼴을 보고 계시더군요.”
자세히 들으면,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가하루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세상에는 아직 의리가 남아 있었군. 고맙네, 고마우이.”
“아직 공치사를 들을 때는 아닙니다. 일단 아와를 벗어나야 합니다.”
뱃길은 이미 고니시 유키나가가 장악한 상태. 결국 나가하루가 갈 곳은 하나 뿐이었다. 지금도 창칼을 맞대고 있는 쵸소카베 가문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 * *
“나가하루가 도망을 쳤다?”
“그, 그렇습니다.”
아와 미요시의 가신들은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그들의 옛 주인이 도망쳤음을 알렸다.
얼마 전, 그들은 소고 마사야스를 아와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나가하루 본인의 명의가 아니었기에 나는 미심쩍은 부분을 확인했고, 나가하루는 가신들이 가두어놓은 상태라 했다.
이미 아내에게 들은 것도 있었고, 순순히 내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일이 쉽게 굴러간다 싶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나?”
“종적이 남쪽으로 이어졌으니,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의탁하러 간 듯싶습니다.”
가신들에게 쫓겨나고, 서로 으르렁거리던 적에게 투신한다. 전국시대에서 드문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옆에 있던 마사야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의 책임이 막중해졌군.”
“각오했던 바입니다.”
소고 마사야스, 아니 이제는 옛 가문으로 환속한 미요시 마사야스는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님과 물밑에서 암투를 벌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어리석은 자라고 소문난 그의 형과는 달리, 마사야스는 총기가 있는 자였다. 이제 미요시 일족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골육상쟁을 벌이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고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가하루가 도망쳤다고 해서, 반드시 맺고 끊음이 명확해진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런가……. 만약 쵸소카베 가문이 순순히 나가하루를 내놓는다면?”
“이미 가문과 영지를 저버린 배신자일 뿐입니다.”
마사야스의 답은 간결했다.
쵸소카베 측은 역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실망을 표해왔다.
“저희 주군께서는 쿠보와 적대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군. 게다가 나가하루까지 빼돌렸다지?”
“원하신다면 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토치카가 보낸 사자는 그렇게 말하며, 새로운 조건을 내밀었다.
“시코쿠에서의 패권만 인정해주시면, 저희 주군께서는 얼마든지 확고한 동맹이 되겠노라 하셨습니다.”
“확고한 동맹이 되기를 원한다면, 위협적으로 덩치를 불리지 말았어야지.”
나는 쵸소카베 가문이 새로 얻은 영지를 모두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대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 * *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받은 쵸소카베 모토치카에게 마침 다른 누군가가 손을 내민 상태였다.
도토야 조세이. 간토 간레이의 전령을 자처한 그는 원군을 제안했다.
- 간토 간레이께서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병력을 지원해드릴 수는 있지요.
- 얼마나 줄 수 있기에?
- 이만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무슨 까닭으로 그를 도와줄 것이며, 또 무슨 수로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준다는 말인가. 그렇게 의심한 모토치카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 얼마 전, 아와의 다이묘가 가신들에게 유폐되었다더군. 그를 데려오면, 자네의 능력을 믿어보지.
전쟁 중에 간자가 오가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나가하루가 유폐되었다는 사실 역시 쵸소카베 측에 금방 알려졌다.
상대편에 내분이 일어난 듯한 상황, 나가하루를 자신의 수중에 넣을 수만 있다면, 아와국 정복도 한결 쉬워질 터. 그렇게 생각한 모토치카는 그런 조건을 내걸었다.
설령 약속한 원군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나가하루를 빼돌릴 정도의 역량이라면 기대해볼 만했다. 그리고 조세이는 그 어려운 조건을 충족시켰다.
“좋네. 자네의 말을 믿어보도록 하지. 이만의 군세는 언제쯤 오겠나?”
“한 달이면 됩니다.”
“기다리겠네.”
조세이가 원군을 데려오겠다며 떠난 뒤, 쵸소카베의 가신 중 하나가 의문을 제기했다.
“저, 주군…….”
“말하라.”
“저 조세이라는 자 말입니다. 사카이 쿠보와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혹여 계략은 아닐지…….”
얼마 전에 사신으로 갔다 온 자였다. 쵸소카베가 신임하는 가신이기도 했고, 직접 고니시 유키나가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그런가?”
모토치카 역시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같은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권력은 핏줄끼리도 나눌 수 없는 법이지만, 동시에 남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 역시 한 핏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자신의 가신을 안심시켰다.
“물론 계략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해서 일을 꼬아놓을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조세이는 미요시 나가하루를 데려왔다. 모토치카는 그것만으로도 그를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안 되면, 한 달 뒤에 물러나면 그만이지. 당분간은 공세를 포기하고, 현상유지에 힘쓸 것이네.”
그리고 모토치카가 보기에는 아직 승산이 있었다.
유키나가는 곧바로 군대를 휘몰아치는 대신, 나가하루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해왔다. 게다가 자신이 직접 차지해도 될 아와국에 다른 미요시 일족을 세웠다.
만약 진다면 새로 얻은 영지 대부분은 내놓아야겠지만, 어쨌든 가문의 존속은 기대해도 좋을 듯했다. 모토치카가 생각하기에, 이럴 때는 판돈을 올리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나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여전히 천하는 어지럽고, 아직 내게는 기회가 남아 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