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삶과 죽음을 파는 자(6)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쇼군 취임은 애매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세이이타이쇼군은 이제 불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동쪽은 어지럽고, 누군가는 그 혼란을 잠재워야 하는 것도 사실. 코가 쿠보를 가마쿠라 쿠보(鎌倉公方, 겸창공방)로 추인하겠다.
이는 전적으로 덴노의 의향이었고, 여기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의지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결과였다.
덴노에게 연명장을 올렸던 다이묘들은, 하나같이 당혹스러워했다.
“쇼군직이 아니라, 가마쿠라 쿠보라고……?”
“설마 유키나가, 그자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 역시, 전적으로 덴노의 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조정과 멀리 떨어진 동국이라고 해도, 다이묘쯤 되고 보면 조정의 공가와 연이 있게 마련. 고니시 유키나가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정보였다.
게다가 그 교활한 사카이 쿠보가 움직였다면, 이렇게 밍숭맹숭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 터. 단지 이들에게는 욕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왕 어명이 내려왔으니, 가마쿠라 쿠보로라도 세우는 편이 좋겠소이다.”
연명장을 올린 다이묘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그렇게 일단락지어 버렸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쇼군을 세우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모두에게 있었지만, 당장은 동국 무사들을 한데 모을 구심점이 생겼다는 데 의의를 두는 모양새였다.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 통칭 쇼군으로 통하는 이 관직은 원래 최고 권력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오랑캐(夷 이, 여기서는 일본의 원주민이었던 에미시를 일컬음.)를 정복하는 임무를 맡은 군대 사령관. 원래 의미는 그러했다.
굳이 권력과의 관계성을 찾자면, 동국 무사들의 동량이라는 점이었을까. 하지만 언제나 권력은 힘을 따라가는 법. 그리고 가장 알기 쉬운 힘은 창칼로 대변되는 무력이었다.
에미시와 숱한 전쟁을 벌이며 양성된 강병이 곧 미나모토 가문의 기반이었고, 그 근거지는 바로 가마쿠라. 그러니 가마쿠라 쿠보라는 직위는 다소 격이 떨어지기는 해도, 동국 무사들을 결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 * *
“차라리 폐하를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았을지…….”
혼다 마사노부는 일이 흘러가는 결과에 혀를 찼다.
가마쿠라 쿠보는 그 상징성 면에서만큼은 쇼군 못지않은 자리. 관동의 다이묘들이 결집할 빌미가 생기고 말았으니, 그 점을 아쉬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지. 다름 아닌 가마쿠라 쿠보가 아닌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뭘 준비하고 있었지?”
“그야 호조 가문을 뒤흔들……. 아!”
혼다 마사노부는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눈치였다.
“가마쿠라 쿠보는 어디에 있어야겠나. 당연히 가마쿠라에 있어야겠지.”
“과연 그렇습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기책을 써서 절반의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그걸 통째로 가져올 수 있겠군요!”
가마쿠라. 21세기의 가나가와 현 남쪽 해안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호조 가문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마쿠라 쿠보가 관동 내의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명분이 서겠나?”
노부나가를 비롯한 관동의 다이묘들이 쇼군으로 세워 달라 했던 아시카가 요시우지는 원래 코가 쿠보의 후예였다.
정확히는 그 역시 지금의 코가 쿠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와서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호조 가문만의 트로피에 불과했다.
쿠보라는 직함 앞에 지명이 붙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점이지만, 해당 관할과 직함은 떨어질 수 없는 것.
코가 쿠보가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코가라는 지역에서 끌려나왔기 때문에 그 자리마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될 터. 그대로 호조 우지히데의 손에 들어오는 게 최선이고, 다른 곳으로 도망간다 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호조 가문의 가신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마츠다 일족과 다이도지 일족이 우지히데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가신단 중에서 제법 큰 가문이 둘, 거기에 이쪽의 지원이 있으면 충분해 보였다.
“좋네. 우지히데를 보내 주도록 하지.”
* * *
호조 가문의 내전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벌어졌고, 순식간에 종식되었다.
누구도 호조 우지야스의 일곱 번째 아들이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오다와라성이 함락되었고, 우지마사는 몸만 빠져나와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간토 간레이. 부디 도와주시오!”
우지마사가 믿고 기댈 구석이란 오다 노부나가 하나뿐이었다. 그는 말 한 필에 의지해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로 도망갔고, 도쿠가와는 오다 가문에 종속된 세력.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 꼴에 불과했다.
“대체 어찌된 일이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소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우지마사를 쳐다보았다.
명색이 한 세력의 주인이라는 자가, 자신이 어떻게 쫓겨났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굳이 감추려 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간레이께서 아시는진 모르겠지만, 내 동생 중에 우지히데라는 아이가 있었소. 아마 세간에는 우에스기 카게토라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 거요.”
우에스기 카게토라라면 오다 노부나가 역시 조금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케다 신겐에게 인질로 보내졌던, 호조 가문의 전대 당주 우지야스의 일곱 번째 아들. 그리고 다케다 신겐과 호조 우지야스, 거기에 우에스기 겐신이 삼자 동맹을 체결하면서, 다시 우에스기 가문에 인질로 보내진 자.
대강 그 정도로 알고 있었다.
“우에스기 카게토라라면, 이미 죽은 자가 아니었소이까?”
대체로 그렇게 알려진 상태였다.
일전에 우에스기 가문을 토벌했을 때, 급격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겐신과 신겐의 공멸이었다.
이후 겐신의 외조카였던 나가오 아키카게가 우에스기 카게카츠라는 이름으로 가독을 이으면서, 우에스기 카게토라는 그대로 잊혀졌다.
당시의 관동은 문자 그대로 난리통 그 자체였고, 그 와중에 실종은 곧 죽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그리 알고 있었소. 그런데, 그 녀석이 살아서 돌아왔소이다. 그리곤…….”
호조 가문을 섬기던 가신 중 일부가 내통해서 성문을 열어 주었다. 거기까지가 우지마사에게 들을 수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자고로 다이묘라는 존재는 통치의 용이성과 성 자체의 방어력을 모두 고려해서 거처를 고른다.
호조 가문의 거성인 오다와라(小田原) 성 역시 마찬가지. 과거 강성했던 이마가와며, 우에스기, 다케다의 공세를 막아냈던 그 요새가 단번에 뚫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그럭저럭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아무리 튼튼한 성이라 해도, 내부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면 의미가 없는 법.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문이 해소되기 어려웠다.
“일단 처소를 마련해 줄 것이니, 쉬고 계시구려.”
그렇게 돌려보낸 뒤, 노부나가는 생각에 잠겼다.
계략이라고 하기에는, 우지마사 본인이 쫓겨나올 정도였다. 전장에서라면 몰라도, 이런 거대한 모략에서 자신을 미끼로 내거는 다이묘는 아직까지 보거나 들은 바가 없었다.
하지만 우지마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보기도 곤란했다.
호조 가문의 세력은 거대했고, 거성에 상시 주둔하는 병력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문을 걸어 닫아야 했다는 건, 침공해온 군세가 상당한 규모라는 이야기였다.
그만한 군세가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거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간레이, 사실 우지마사보다도 가마쿠라 쿠보가 문제 아닙니까?”
호조 우지마사를 안내해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입을 열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우지히데가 이쪽을 적대하리라는 확신도 없지 않나. 일단 사자를 보내도록 하지.”
비록 지금 우지마사와 손을 잡은 상태이기는 했으나, 세력을 잃은 다이묘는 다이묘가 아닌 법. 만약 우지히데와 대화가 통하기만 한다면, 굳이 무능한 우지마사를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 * *
호조 우지히데는 순조롭게 가문의 영지를 접수했다.
휘하의 무사들 중에서 간혹 반발하는 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우지마사를 위해 군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별 말을 다하는군. 이제 시작이 아닌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붙여 준 사람이 축하의 말을 올렸다. 하지만 우지히데가 말한 것처럼, 지금은 기뻐하고만 있기는 곤란했다.
“자네 이름이…….”
“시메온, 돈 시메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름은 남만인의 형식이었지만, 그의 외형은 영락없는 일본인이었다.
“그게 자네 이름인가?”
“세례를 받기 전의 이름은 따로 있습니다만, 그냥 이렇게 불러 주시면 됩니다.”
우지히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본론을 이야기했다.
“당장은 주변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네만, 조만간 도쿠가와 가문이 되었건, 아니면 그 뒤의 오다 가문이 되었건, 쳐들어오지 않겠나.”
“그렇지요.”
“만약 내가 고니시 공에게 등을 돌려야 할 상황이 오면, 자네는 어떻게 할 셈인가?”
지금 우지히데의 입장은 견고하지 않았다.
호조 가문의 가신들 대부분이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저들 중 또 누군가 우지마사와 내통할지 모를 일. 게다가 그 가신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싸워 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제가 섬기는 분은 우지히데 님이십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군자금이며 병력은 모두 고니시 유키나가가 마련해준 것. 지금 군대를 이끌고 있는 시메온이라는 자 역시 그가 주선해준 사람이었다.
우지히데는 시메온 역시 고니시군 소속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장본인의 말은 조금 달랐다.
“여기는 기나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사카이 쿠보께서도 자신의 직속 병력을 보낸 게 아니라 용병을 모으셨지요.”
“그런가?”
“그러니 저희는 우지히데 님을 섬기는 군대입니다. 봉록만 충실히 주신다면, 얼마든지 뜻대로 움직여드릴 수 있지요.”
시메온의 말에 의하면, 그와 그가 이끄는 군대는 영지를 바란다고 했다.
아와지국이 살기는 좋지만, 자신은 권력을 원한다. 그러니 호조 가문의 가신으로서 봉록을 받고 싶다. 그런 이야기였다.
“물론 우지히데 님의 신하라는 입장에서도, 사카이 쿠보를 적대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못합니다.”
“그야 알고 있네. 쥐도 새도 모르게 나를 오다와라 성 앞에 데려다 놓을 정도니,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은 없지. 어찌하면 좋겠나?”
우지히데의 질문을 들은 시메온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사카이 쿠보가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하라고 했는지요?”
“그건 아닐세.”
고니시 유키나가는 호조 우지히데에게 구체적인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신의를 지키라고만 했을 뿐. 하지만 원래 구체적이지 않은 말이야말로 골치가 아픈 법이었다.
우지히데는 새로이 자신의 가신이 된 자에게 고니시 유키나가와 했던 말을 이야기했다.
내막을 전해들은 시메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 사카이 쿠보를 배신하는 게 되지 않나.”
“아와지국에서 떠도는 말이 있는데,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