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삶과 죽음을 파는 자 (5)
“폐하, 오다 가문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관동 일대가 피폐해지고 있다 하옵니다. 무익한 싸움을 그치도록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아사쿠라 가문 측에 원군을 보내는 대신, 덴노의 서한을 보내게 했다. 오오기마치 덴노는 자신의 한 마디로 다이묘들을 호령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국새를 찍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가운데, 혼다 마사노부만이 의문을 제기했다.
“과연 오다 노부나가가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까?”
“자네는 어떻게 보나?”
“굳이 따지자면……. 따를 가능성이 6할에, 그렇지 않을 경우가 4할쯤 되겠군요.”
내가 쇼군 요시아키 밑에서 노부나가를 많이 겪어보기는 했지만, 역시 관동 출신인 마사노부의 눈이 더 정확할 터였다.
“관동 출신인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하군.”
“그럼, 어째서……?”
“명분을 쌓는 과정이라고 해둘까.”
마사노부는 금방 내 말을 알아들었다.
“군대를 준비시키는 게 좋겠습니까?”
“아직 그럴 필요는 없겠지. 노부나가가 덴노의 권위를 무시하면, 그때 가서 군대를 소집해도 늦지는 않을 걸세.”
노부나가가 휴전에 응하지 않고 아사쿠라 가문의 영지를 집어삼킨다 해도, 담보 문서는 내 손에 있었다.
* * *
비록 일본의 율법은 평민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엄히 금했지만, 난세에는 모두가 대강이나마 싸우는 법을 익히게 마련이었다.
땅 파먹는 농민들조차 전투가 벌어진 뒤에는 낙오병 사냥에 나서는 게 현실. 아무나 붙잡아다 전장에 세워도, 병사 하나 몫은 거뜬히 했다.
“주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병력 이만을 추가로 모집했습니다.”
“흠, 그런가…….”
하시바 히데요시는 자신이 낸 계책을 충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정작 그걸 받아들인 노부나가의 눈치는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번 싸움은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너는 기요스 성을 지키고 있도록.”
대체로 모병한 사람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에 노부나가는 그 관례를 깨고, 자신이 직접 병력을 이끌겠노라 선언했다.
비록 히데요시 자신은 후방에 남겨진 신세라고는 하나, 본거지를 지키는 일 또한 막중한 임무인 법. 그 스스로는 별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애초에 이만이라는 군세는 무척이나 많은 편이었고, 그걸 일개 가신이 전부 통솔한다는 것도 불안 요소가 될 터였다.
그리고 역시 노부나가는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이제 아사쿠라 가문은 툭 치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터. 그런데 사카이에서 덴노의 어찰이 당도했다.
“전쟁을, 그치라고?”
“폐하의 뜻이십니다.”
노부나가 본인은 태연을 가장했으나, 속에서는 열불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휘하 장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덴노도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이용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자신의 주군은, 그리고 다른 가신들은 그런 존재의 말을 어기지 못하는 것인가. 하지만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전쟁은 끝났고, 이제 모아놓은 병력을 해산시켜야 할 때였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노부나가에게는 골칫거리라고 할 수 있었다.
무릇 무사라 하면, 일개 병졸일지라도 부쳐 먹을 땅 한 뙈기쯤은 있어야 했어야 했다.
이기기 위해 병사들을 대거 모집했고, 노부나가는 새로 얻은 영토를 나눠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미지근하게 끝나버리면서, 그 계획에도 엄청난 차질이 생겼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새로 모집했던 자들은 전부 무장을 해제시켜서 도로 농민으로 강등시키도록.”
“그렇게 하면, 불만이 거세질 겁니다.”
“반발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무척이나 오만하고도 폭급한 말이었지만, 노부나가의 가신 중 누구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 * *
“휴전이라……. 요시카게, 그자가 대세를 망쳐놓는군.”
호조 우지마사는 혀를 찼다.
그가 맡은 서쪽 전선은 시종일관 유리하기만 했다. 하지만 정작 아사쿠라 가문이 패퇴하면서, 호조 가문도 소득 없이 물러나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안타까워도 이미 대세는 정해진 것. 우지마사 역시 휴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주했다.
“사가미노스케(종5위하 相模守 상모수, 여기서는 호조 우지마사를 일컫는 말). 긴히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소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창칼을 맞댔거늘, 내가 미카와노카미(종5위하 三河守 삼하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일컫는 말.)와 무슨 논의를 한단 말이오?”
지금은 휴전 협정을 체결했어도, 호조 가문이 판도를 넓히려면 필연적으로 도쿠가와 가문을 쳐야 했다. 우지마사는 그런 상대에게 이쪽의 불만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언제까지 무사도 아닌 자에게 대권을 맡겨야겠소이까.”
누구라고 명확하게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이에야스가 말한 자가 누구인지는 뻔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쇼군 자리가 비어있는 틈을 타서 천하를 농락하는 자였다.
표면상으로 호조 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력 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거래한 덕에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우지마사 역시 기나이에서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하에는 새로운 쇼군이 필요하외다.”
“그걸 누가 모르겠소. 하지만 마땅한 인선이…….”
“아직 아시카가 가문이 단절된 건 아니잖소.”
이에야스의 말을 들은 우지마사는 자신의 가문과 관련이 있는, 아시카가 일족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시카가 요시우지. 사사롭게는 여동생의 남편 되는 자였다.
아시카가 가문은 직접 다스리기 어려운 요충지에 방계를 보내 다스리게 했는데, 그들의 직함을 쿠보(公方 공방)라 했다.
그중에서도 관동을 맡은 이를 코가 쿠보(古河公方 고하공방)라고 했고, 호조 가문은 코가 쿠보와 대대로 혼인으로 결속해왔다.
쇼군 요시아키가 죽은 이후, 호조 우지마사는 그를 새로운 쇼군으로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고, 호조 가문이 단독으로 나서기에는 위험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다이묘들이 도와준다면, 아시카가 요시우지를 새 쇼군으로 세우는 일은 승산이 충분한 일이었다.
“쇼군께서 돌아가신 일은 간토 간레이의 본의가 아니었소이다.”
요시우지를 신임 쇼군으로 세우는 것을 돕겠다. 대신 그걸로 요시아키 사망에 대한 오다 노부나가의 책임을 면제해달라. 그것이 이에야스가 전달한, 노부나가의 요구였다.
난세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지만, 지금 우지마사가 받아든 제안은 지나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좋소이다. 쇼군직이 너무 오래 비어 있었소.”
* * *
“일이 참 재밌게도 돌아가는군.”
예상하지 못한 사태는 아니었다. 내가 덴노를 끼고 있는 이상, 무가에 속한 자들은 그걸 불편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터. 새로운 쇼군 후보를 찾아내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호조 가문을 필두로 오다, 도쿠가와, 그리고 동북면의 몇몇 가문들이 연명장을 보내왔다. 덴노에게 쇼군의 자리를 채워달라고 하는 주청이었다.
“그래, 폐하께선 뭐라고 하시던가?”
“굳이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만약 오다 노부나가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상당히 신경써야 했을 터였다.
어쨌든 저들이 쇼군으로 세워달라는 요시우지라는 자도 아시카가 가문의 일원. 아케치 미츠히데는 내게 협력적인 인사였지만, 새로운 쇼군이 들어서면 언제고 그쪽으로 기울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전대 쇼군인 요시아키를 죽게 만든 자. 그가 옹립하는 쇼군을 미츠히데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 아무래도 좋았지만, 덴노 역시 새 쇼군이 들어서는 걸 원치 않는 듯한 모양새였다.
정세가 돌아가는 걸 확인한 혼다 마사노부가 입을 열었다.
“일단 호조 가문을 압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미 마사노부와는 모든 이야기를 마쳐놓은 상태. 내가 가지고 있는 패를 보여주자, 그는 아주 적절한 계책을 내놓았다.
“우지마사가 자기 부친만큼 가신들을 휘어잡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다이묘가 자신의 가신단과 불화가 있어도, 그건 내부의 문제. 부외자인 이쪽에서는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의미가 없는 건, 의미 있게 만들면 그만이 아니던가.
마침 내 수중에는 이 상황에 들어맞는 으뜸패가 들어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쿠보.”
“이제 때가 되었네.”
호조 우지히데. 지금의 호조 가문의 주인, 우지마사와는 형제 되는 이였다. 정확히는 그의 여섯 번째 동생이었다. 그리고 그의 본래 이름보다는, 양자로 간 뒤의 이름으로 더 알려진 자이기도 했다.
우에스기 가문을 토벌했을 때, 나는 그 본거지인 에치고를 직접 강습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때, 우연찮게도 우에스기 카게토라라는 자를 잡았다.
당시에는 별 가치가 없는 자에 불과했다. 말이 좋아서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였을 뿐, 실상은 인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조 가문은 우에스기 가문과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 인질로 보내졌다는 것은, 사실상 버림패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였다.
결국 당시 동북면 무사들의 선택을 받은 것은, 겐신의 외조카였던 우에스기 카게카츠. 그리고 그 덕에 카게토라는 목숨을 건졌다.
“그렇습니까…….”
내게 불려온 우지히데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그에게 못을 박았다.
“자네가 호조 가문을 맡아야겠네.”
“쿠보께서 살려주신 몸이니, 뜻대로 하십시오.”
내 식객이라 쓰고 포로라 읽는 입장이 되었을 때, 그 역시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을 터. 이미 마음의 정리는 끝낸 듯했다.
우지히데는 결코 무능한 자가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자신을 인질로 잡아간 겐신의 후계선상에 올랐을 정도이니, 지금 우지마사에게 실망하고 있을 호조 가문의 가신들에게는 적절한 대체재가 될 터였다.
단지 호조 가문의 전대 가주의 일곱 번째 아들이라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으나, 이 시대에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호조의 전대 가주는 후계 구도를 정리하기 위해, 우지히데를 인질로 보냈을 터. 유능한 아들보다는 정통성을 골랐던 듯했다.
그러나 우지마사는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무능했고, 그가 버림패로 던진 우지히데는 내 손에 있었다.
“호조 가문의 가신들과 접촉이 끝나면, 군대와 자금을 만들어주지. 거기에 폐하의 승인을 얹어줄 걸세.”
“철저히 호조 가문의 내전으로 끝낼 생각이시군요.”
“바로 보았네.”
어차피 호조 가문의 영지는 기나이에서 상당히 먼 편에 속했다. 바로 옆인 지역도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위탁한 판에, 관동의 먼 땅이라고 해서 직접 다스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염치없는 몸이지만, 한 가지를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일이 끝나면, 대관(代官)으로 쓸 자들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꽤나 흥미로운 요구였다. 아예 철저히 내게 종속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길들여 자신의 힘으로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어느 쪽이든 나로서는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좋네. 준비가 끝나거든, 다시 부르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