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종교 전쟁 (12)
혼간지를 토벌한 이후로,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간 가족들에게 무심했던 것 같아, 모처럼 스모토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들은 이제 아장아장 걷을 정도로 컸고,
“그러고 보니, 요즘 세간에서 쿠보를 마라라고 한다던데요.”
“나를? 내가 뭘 했다고…….”
“불가를 위협하는 가장 큰 대적이래요.”
그 말을 전한 사람이 다름 아닌 아내라서, 나는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힌 소문이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마라라니. 원래 그 별명이 붙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오다 노부나가 말이다.
“거, 참……. 하필 별명이 붙어도.”
“왜요?”
마라는 제육천마왕이고, 천마의 기원이고, 뭐 기타등등 거창한 수식이 많이 붙은 존재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강렬한 모습은 음경이었다.
불가에서 그걸 은어로 마라라고 부른다던가.
마침 같은 걸 떠올렸는지, 요시히메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정작 마라의 아내인 저는 마라를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이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남자 구실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 나는 아들을 유모에게 맡긴 후, 아내와 내실로 들어갔다.
* * *
그렇게 아내와 진한 시간을 보낸 다음 날, 나는 기가 막힌 소식을 받아야 했다.
“불가에 속한 각 교단에서 폐하께 연명장를 올렸다고?”
나는 이치로가 가져온 연명장 사본을 읽어 보았다.
대충 요약하자면, 쇠락해 가는 옛 수도를 자신들의 도량으로 내어달라. 이 정도쯤 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덴노에게 청원하는 문구였지만, 실상은 내게 타협안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선교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자기네들이 안주할 수 있는 땅을 내놓으라는 이야기쯤 될까.
정말로 그렇게 해서 타협이 된다면, 나로서도 골치 아플 일이 많이 줄어들 터. 내가 보기에도 그다지 어려운 요청은 아닌 것 같았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아케치 미츠히데를 교토에서 내보내라……. 기가 차는 조건이군.”
물론 명분으로만 따지면,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긴 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죽은 요시아키의 유산관리인을 자처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이미 천도를 해 버린 이상, 교토를 죽은 쇼군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것도 어색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다만 요시아키와 관련된 일이라면, 눈을 뒤집고 달려들 미츠히데가 순순히 협조해 줄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일단 사카이에 좀 다녀와야겠군. 그리고…….”
나는 덴노를 알현할 준비를 하는 한편, 이치로를 시켜 니조성으로 사람을 보내게 했다. 아케치 미츠히데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당사자일 터. 잠시 시간을 내서 사카이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거기에 몇 가지 심증을 확인할 일이 있었다.
* * *
“쇼군의 은혜도 모르는 것들 같으니!”
당연하게도, 미츠히데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저 땡중들이 어찌 이런 망발을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시카가 가문 덕에 자리를 잡은 자들이 감히…….”
“진정하게.”
다행히 그는 내 말은 들었다. 하지만 역시 분기를 참기는 어려운 듯했다.
“사람이 살면서 모든 걸 만족하고 살 수는 없지. 하지만 지금 자네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달랠 방법이 없진 않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자네는 군대를 크게 끌어모으도록 하게.”
내 말을 들은 아케치 미츠히데는 잠시 분노를 접어두고,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찰들을 공격하는 건…….”
아케치 미츠히데 역시 불자였다. 아무리 승려들이 제멋대로 굴어도, 승단을 공격하는 건 꺼림칙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악명도 도다이지(東大寺 동대사)를 불태워 버린 데서 온 것이 컸던가. 대체로 이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긴 했다.
“걱정 말게. 자네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나는 미츠히데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신궁으로 들어갔다.
* * *
“일본의 덴노로서, 불자들 역시 내 자식 같은 이들이 아니겠나. 긍정적으로 처결했으면 좋겠는데…….”
오오기마치 덴노는 자신의 역할극에 푹 빠져 있었다. 사실 덴노가 신토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역시 불교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신불습합이라고 하던가.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은 19세기 무렵이지만, 신불습합은 제법 오래된 전통이었다.
한때 교토 이전의 수도였던 야마토 지역에 자리한 도다이지 역시 덴노가의 원찰이나 마찬가지였다.
히에이산이 일본 불교의 모산이 된 까닭도 결국은 수도였던 교토의 뒷산이라는 점이 한몫했다.
게다가 오오기마치 덴노 본인이 문적을 발급해 주었던 일향종을 토벌한 상황. 비록 그가 흔쾌히 동의했다고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함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러 정황을 살펴, 폐하께서 원하는 방향대로 처결토록 하겠나이다.”
나는 신궁의 알현실에서 나온 뒤, 곧바로 이치로를 불렀다.
“알아보라 한 일은 어찌 되었나?”
“과연 쿠보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신궁 한 구석에는 내가 편히 쓸 수 있도록 준비된 밀실이 여럿 있었다. 그중 한 곳에 자리를 잡은 뒤, 이치로에게 보고를 받았다.
“지금 각 사찰의 승려들은 쿠보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일향종을 토벌한 이후로, 눈에 띄게 움직임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일향종은 기존의 불교 승단들과 사이가 나쁜 편에 속했다.
교리부터가 기성 교단과는 상충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켄뇨의 대에 와서는 사찰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문서인 문적까지 발급받은 상황. 원래 위쪽의 관점에서, 치고 올라가는 존재는 그리 곱게 보기 어려울 터였다.
이를테면, 다른 교단의 관점에서 일향종은 이단적인 존재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기네끼리 다퉈도 좋을 상황일 때의 이야기. 아예 다른 종교가 불교 전반의 지위를 위협한다면, 그땐 그 이단조차도 ‘우리 새끼들 중 하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대결전이라도 벌였다면, 그 싸움 자체가 토벌의 명분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조기에 참수작전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인간이란 자기네와 비슷함에 기괴할 정도로 공감하는 법. 켄뇨의 혼간지는 덴노에게서 문적을 받은 사찰이었다.
그런 세력을 단숨에 쓸어냈으니, 다른 문적을 받은 사찰들 역시 긴장했던 모양새였다.
사실 그동안 문적을 내세워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 문적이 자기네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랬던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눈으로 연명장을 쓱 훑어내렸다.
남도 7대사(나라 현의 가장 큰 일곱 개의 절)을 대표해서 도다이지가 앞장선 듯했다. 그리고 엔랴쿠지(延曆寺 연력사)며 혼노지(本能寺 본능사)에 다이도쿠지(大德寺 대덕사)까지. 하나같이 각 종파의 총본산인 절들의 명의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분위기는 어떤가?”
“대체로 흉흉합니다. 하지만 원하는 걸 받아내면, 굳이 쿠보를 적대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실 아케치 미츠히데의 문제만 빼면, 내게도 꽤 괜찮은 이야기이긴 했다.
종교적 신념에 불타는 자는 제법 끈질기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적으로 돌리기보다는, 아예 무심한 관계가 되는 편이 나았다.
적이 된다면, 아예 수장의 목을 따 버리는 정도는 해야 했다.
“일단 여기로 아케치 공을 불러오도록. 사카이의 고니시 저택에 있을 거다.”
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이치로가 미츠히데를 밀실로 불러왔다. 그는 불자된 자로서, 승단을 공격해야 한다는 처지 때문인지 상당히 긴장된 모습이었다.
“쿠보께서 이르신 대로, 군대에 소집령을 내려두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쇼군의 유산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미츠히데에게 질문했다.
“만약 츠츠이 가문을 토벌한다면, 약간 양보할 생각은 있나?”
츠츠이 준케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쇼군 요시아키를 자살로 내몰았을 때, 도망칠 길을 열어 준 자였다. 당연히 노부나가만큼은 아니더라도, 미츠히데가 칼을 가는 자들 중에서 우선순위에 들어갔다.
“어느 정도까지를 생각하십니까?”
“자네가 니조성에서 나온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대신 니조성을 기준으로 야마시로의 북쪽 전부를 넘겨줄 생각이네.”
교토에서 야마토까지는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츠츠이 가문은 불구경이나 하다가 느긋하게 끼어들 준비를 하려 들 터. 지금 군대를 끌어 모아 습격한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나로서는 자기 뱃속만 채우면 가만히 있을 승단보다는, 턱밑의 야마토를 차지하고 있는 준케이를 치우는 편이 나았다.
“이번에 저들에게 양보하는 조건으로, 자네에게 야마토노카미(大和守 종5위상 대화수)를 내리도록 할 걸세.”
“음……. 그런데 정말 저들이 그 정도로 만족하겠습니까?”
“비단 자네를 생각해서만이 아니라, 이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한계일세. 동시에 저들의 의사를 타진해 보는 것이고. 이 이상을 바란다면, 히에이 산을 불태울 수밖에 없겠지.”
미츠히데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된 다음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 * *
각 절의 주지들은 사카이에서 온 어찰을 받았다.
“모두들 어찌 생각하십니까?”
자리를 마련한 혼노지의 주지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나쁘지는 않은 듯싶소만…….”
“쿠보도 우리를 인정한 게 아니겠소이까?”
하지만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어허.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잖소이까. 아케치 미츠히데는 여전히 니조성에 눌러앉겠다는데, 오다 공과의 약속을 저버릴 셈이오?”
다이도쿠지의 주지가 가장 맹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래 다이도쿠지는 사카이에 가장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찰. 그렇기에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악감정 역시 가장 심했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은 이권에 관한 것. 다른 주지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여기에 오다 노부나가와의 약속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고 당장 니조성이라도 치자는 게요?”
이미 니조성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가 집결해 있다고 했다. 승병이 아무리 많고, 그들 모두의 신심이 깊다고 해도, 무사를 상대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아케치군의 주축이 되는 자들은 키리시탄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건 자신들에 대한 압박이었고, 그 압박에 맞서기에는 제법 많은 것들이 손에 들어온 상태였다.
“자자, 진정들 하시지요. 우리 모두 불자가 아닙니까.”
처음에는 단지 세를 모으기 위해서 연명장을 썼다. 하지만 이중에서 한둘만 돌출행위를 해도, 모두의 잘못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다이도쿠지에게 만족스러울 만한 먹잇감을 물려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다이도쿠지에 마을 하나를 더 떼어주겠소이다. 아니면 혼자 쿠보를 상대하시구려.”
“흠흠……. 알겠소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주지는 모두 타협안에 동의했다. 그걸로 불교측의 갈등은 수그러든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