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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79화 (79/225)

79화 천도 遷都 (2)

고노에 사키히사는 교토에서 도망가 버린 듯했다. 롯카쿠 요시하루의 군대가 빠지면서, 다이죠다이진(태정대신, 고노에 사키히사)도 그들을 따라갔는지, 종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이진(고노에 사키히사)는 오늘도 오지 않았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나마 덴노의 곁을 충실하게 지켜온 자가 고노에 사키히사였던 모양이었다. 이치로의 첩보에 의하면, 그는 간논지 성(롯카쿠 가문의 거성)을 떠나 천하를 떠도는 중이라고 했다.

이제 슬슬 오오기마치 덴노는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그 공백을 채운 것이 바로 나였고, 이제 덴노는 내 말이라면, 팥으로 낫토를 만든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 되었다.

“새 고쇼(御所, 덴노의 거처: 궁궐)를 지으려면 시일이 걸릴 것이온데, 그동안은 제 저택에서 모시고자 하나이다.”

“음음, 그러시게.”

그 어떤 걸 이야기해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단순히 내가 말하는 것에 동의를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덴노 앞에서 지켜야 하는 일체의 의례를 면제해 줄 정도였다. 물론 나 역시 새로운 예의범절을 익힐 생각은 없었지만.

그는 내가 닌토쿠(仁徳 인덕) 덴노를 언급한 이후로, 사카이 인근에 있다는 거대한 무덤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정말로 능이 성만큼 크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나는 종종 덴노를 데리고 가서 그 주변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역대 덴노들의 능은 한 곳에 합장된 상태였던가. 그렇게 조성된 묘역은 말이 좋아 성지일 뿐, 공동묘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비하면 홀로 거대한 능침에 묻혀 있을 닌토쿠 덴노를 부러워할 만하다 싶기도 했다.

몇 백 년 전 인물이 그의 직계조상일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하건만, 만세일계의 환상에 빠진 덴노는 그의 흔적을 사모하다시피 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론 무덤밖에 볼 게 없었지만.

“짐이 알기로는 그분의 궁실이 나니와에 있을 것인데, 그 터가 보이질 않는구나.”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이옵니다. 고작해야 이 신사가 전부일 뿐이나이다.”

처음에 천도를 이야기했을 때, 덴노는 옛 수도였다는 나니와쿄(難波京 난파경)를 떠올린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라고 해 봐야, 궁궐 터에 지어졌다는 신사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도 안치된 존재가 닌토쿠 덴노라서 기록이 남았을 뿐, 여기가 옛 도읍지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폐허에 불과했다.

그나마 여기가 옛 도읍이었다고 하니, 오오기마치 덴노 역시 나니와에 새 궁궐을 짓고 싶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여기는 잇코슈(一向宗 일향종)의 본산,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석산본원사, 지금의 오사카 성)의 턱밑이다.

비록 지금까지 잇코슈와 척을 지지는 않았다 해도, 여기에 고쇼를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사카이의 번화한 모습을 본 덴노는 성곽 내에 고쇼를 정하는 일에 흔쾌히 동의했다.

“여기야말로 천하의 중심이라 할 만하도다! 짐도 쿠보의 권유에 따라 여기에 고쇼를 정해야겠구나.”

덴노는 사카이와 닌토쿠릉을 몇 번 다녀간 다음, 도시로 옮길 일정을 잡았다.

처음에는 내 결정을 반겼던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는지, 은밀하게 나를 찾아왔다.

“폐하를 모셔오는 거야 괜찮은 생각이오. 하지만 혹시 떡을 빚어서 남 좋은 일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구려.”

“물론 그러지 못하게 잘 막아야지요. 마침 태정관의 우두머리가 보필할 책임을 저버리고 도망갔으니, 빌미는 충분할 겁니다.”

나는 미소를 살짝 지으며, 히사히데를 안심시켰다.

본래 태정관은 율령제에서 국무 전반을 도맡아보는 최고 통치기구였다. 비록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해도, 일단 형식은 그러했다.

“좀 오래되었다 싶은 신사와 신궁의 신관들을 모아서, 새 기구를 준비해주십시오.”

원래 이런 건 사카이의 군 봉행이 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조정의 사정에 밝은 히사히데 외에는 달리 맡을 만한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신관들을 말이오이까······?”

“그렇습니다.”

덴노는 상징이면 충분한 법. 내가 손을 대는 것도 불안하고, 내버려두기도 불안하다면 그냥 정치적 의미를 빼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일단은 덴노가 내 손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히사히데의 용건은 아직 남은 듯했다. 아니,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다.

“주인 잃은 영지는 어떻게 할 셈이오? 여차하면 시코쿠의 일족들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는 일이외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든, 미요시 요시츠구든 둘 중 하나만 살아 있었다면, 방치해도 무방할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사카이 주변의 알토란같은 땅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 하지만 이미 덴노를 끼고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영토적 야심을 내보이기도 곤란했다.

“설마 내게 맡길 셈은 아닐 것이라 믿소. 시키면 하기야 하겠소만······.”

내가 히사히데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자, 그가 미리 선을 그었다. 예전이면 몰라도, 이제는 귀찮은 일을 떠맡기 싫다는 뉘앙스였다. 물론 농담이 반 이상 섞인 게 눈에 보일 정도의 태도였지만.

진짜 문제는 나와 관련이 있는 자가 차지하는 걸, 다른 다이묘가 방관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런 사정을 생각하면,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맡기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안심시켰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누구에게 맡기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내게 완전히 종속된 걸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등을 돌리지 않을 사람. 염두에 두고 있는 자는 하나 있었지만, 과연 적당한 인선일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아케치 공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뭐, 여전히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그를 만나야겠습니다.”

*       *       *

쇼군이 죽은지도 거의 한 달이 넘었건만, 아케치 미츠히데는 여전히 피폐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의 스스로를 망가뜨리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찾아오면 안 될 이유라도 있소이까?”

“돌아가십시오.”

사람의 마음이란 오묘해서, 사소한 것만으로도 원망하기 쉬운 법이다. 혹시 아케치 미츠히데도 내게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쇼군의 복수. 아마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오와리로 쳐들어가고 싶을 게 뻔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당연히 역부족일 터였다. 그리고 나는 군세를 모아 동쪽을 향하는 대신, 교토에 눌러 앉은 상태.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원망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미츠히데 역시 이쪽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쿠보를 원망하진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자니, 그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너무나 원통합니다. 무가의 동량이 하극상으로 돌아가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다이묘들은 눈치만 볼 뿐, 제 한 몸의 이익만을 구하고 그릇됨을 응징하려 하지 않습니다.”

노부나가에게 줄을 댄 츠츠이 준케이, 그리고 얼마 전 고쇼로 쳐들어온 롯카쿠 요시하루의 이야기였다.

잠시 앉아서 그가 감정을 다 쏟아내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통곡하던 미츠히데는 어느 정도 분이 풀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쿠보께 미처 못 보일 모습을 보였습니다.”

“괜찮소. 내가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이까.”

정신을 좀 더 추스릴 수 있게 냉수를 권한 뒤, 그에게 본론을 꺼냈다.

“해서 말인데, 나를 좀 도와주시오. 물론 아케치 공에게도 좋은 이야기일 거요.”

나는 그에게 야마시로(山城 산성, 교토가 있는 지역, 쇼군의 직할지)를 비롯한 기나이의 영지를 맡으라고 권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케치 공도 알겠지만, 쇼군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소이다.”

“하지만······.”

“물론 찾아보면 나오기는 할 거요. 하지만 결국 엉뚱한 사람 좋은 일이 아니겠소이까?”

“그렇다면 저는 그분을 받들 뿐입니다.”

미츠히데는 정석에 가까운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과연 그가 만족을 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일. 진짜로 원하는 건 따로 있을 터였다.

“신임 쇼군이 돌아가신 요시아키 님의 원수를 갚지 않으려 한다면 어찌할 셈이오? 그 정도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소만, 아예 노부나가와 친근한 자라면?”

가정이기는 했지만, 노부나가라면 정말로 그럴 가능성을 지울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여전히 간토간레이였고, 직함에 따라 관동에 일정한 영향력을 투사할 명분을 지녔다.

그걸 박탈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어 버렸다.

그리고 이 일본이라는 나라는 조정을 맡은 공가와 막부를 맡은 무가가 따로 움직였기에, 쇼군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명분을 얻어내기가 어려웠다.

“그, 그런······.”

미츠히데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나 역시 덴노 폐하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조적 선언을 받아낼 수는 없었소. 아케치 공은 무가 출신이니, 잘 알 거라 생각하오.”

죽은 쇼군의 가신은 내 말을 곱씹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저 역시 쿠보를 돕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       *       *

다행히 미요시 가문을 섬기던 기나이의 무사들은 아케치 미츠히데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것은 아니었고, 각자 주군의 복수를 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뭉친 셈이었다.

나로서는 그거면 충분했다.

천도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고, 히사히데는 성실하게 각지의 신관을 모아 왔다.

그리고 나 역시, 사카이에 덴노를 위한 무대를 꾸며놓았다.

“성당을 스모토(洲本 주본, 아와지 섬의 중심지)로 옮기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프로이스 신부는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반발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옮겨야 할 이유가 없는데 무슨 일이냐는 느낌이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다음, 성당을 옮겨야 할 이유를 말했다.

“곧 있으면 폐하께서 옮겨 오실 겁니다. 이 나라의 덴노라는 존재는, 단순히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마침 창밖에는 덴노를 위해 만들어지는 신궁이 보이고 있었다. 면적은 그리 넓지 않지만, 제법 높이 쌓아올려서 나름대로 그럴싸한 모습을 자랑했다.

“물론 제가 태도를 바꾸어 기리시탄을 탄압하거나 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기 들어갈 사람의 비위를 맞추자면 필요한 조치라서 말입니다.”

과연 프로이스 신부는 예수회 소속답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렇지 않았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일본 사회의 구조를 잘 이해하는 만큼, 흔쾌히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문제라면 어쩔 수 없지요. 성당에, 학교에, 선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는데 이런 걸로 불만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좋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프로이스 신부가 돌아간 뒤, 히사히데가 자신의 일에 관해 보고를 하러 찾아왔다.

“필요한 신관들은 전부 모았소이다. 이제 어떻게 할지 설명해 줄 때도 된 듯하오만.”

대충 눈치는 채고 있을 터였지만, 그는 구체적인 설명을 원하는 모양새였다.

이제 와서 그에게까지 숨길 건 아니었기에, 나는 구상한 것들을 적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신기관(神祇官 진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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