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도시 사람 (3)
“쇼군께서 일각을 여삼추로 기다리겠다 하셨습니다.”
마침 통신사가 사카이에 도착했을 때, 교토에서도 쇼군의 전령이 소식을 전했다.
이번에는 국가 대 국가로 사절단이 방문한 경우였으니, 당연히 쇼군에게도 미리 알려 두었다.
“그리고 이건 통신사를 접대하실 때, 소용되도록 하사하신 금입니다.”
“허어······. 알겠네. 조선에서 온 사신들에게는 내가 쇼군의 마음을 잘 말씀드려 놓겠으니, 그리 전해 드리게.”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내가 떡밥으로 던진 게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조선의 성리학, 그리고 그에 기반한 중앙집권체제. 당연히 그가 탐낼 만한 것들이긴 했다.
나는 조선에서 온 손님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모두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쇼군이 몸이 달아 있는 듯합니다.”
“허나, 과연 그가 도학을 받아들이겠는가?”
“받아들여도 문제가 될 듯한데······. 공방에게 해롭지 않을까 걱정되네.”
순서대로 윤두수, 하성군의 말이었다.
하성군이야 여기에 피난을 온 입장이니, 내 처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전임 대사간은 성리학의 전파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역할이 아국과 공방의 관계를 감추는 데 있음은 잘 알고 있네. 허나, 선비된 자로서 상대가 가르침을 청하는데, 어찌 소홀히 하겠나.”
윤두수는 서인에 몸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퇴계 이황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성리학의 전파에 열의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뜻하신 대로 행하셔도 제게는 나쁠 게 없습니다. 사실 정이대장군 개인이나, 그 측근인 좌경대부(미요시 요시츠구)는 무척이나 반길 겁니다.”
요시츠구가 이전의 쇼군, 요시테루를 참살했던 일도 결국은 유학에서 말한 천명에 의한 게 아니었던가.
교토에는 유학을 익힌 자들이 은근히 존재했다. 그들을 규합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해 준다면, 그 또한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약육강식에 하극상을 일삼는 사무라이에게, 선비의 말이 얼마나 먹힐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찻잔에 새로 물을 부어주며 몇 가지 주의할 점들을 말했다.
“하지만 대감 어른의 말이 항상 받아들여지리라곤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고려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아주십시오.”
지금의 일본과 비교해도, 고려 정도면 상당한 중앙집권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지형의 효과가 크게 작용한 덕이겠지만. 그러니 조선에서는 당연한 것들이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점은 각오하고 있네.”
그의 태도를 보았을 때, 결코 빈말은 아닌 듯했다. 일본이 조선의 관점에서는 오랑캐의 나라였으니, 그 점을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의 사신단은 사카이에 며칠 유숙하며 여독을 풀었다. 그리고 곧장 교토로 향했다.
쇼군은 윤두수에게 간이며 쓸개며 모두 내줄 것처럼 넙죽 엎드렸다.
“조선에서 귀인이 오셨으니, 이 어지러운 땅에 법도가 바로 서겠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이미 국학을 세울 준비까지 모두 마쳐 놓고 있었다.
윤두수는 자신을 따라온 몇몇 선비들과 교토에 남기로 했고, 사신단의 나머지 사람들은 사카이로 되돌아왔다.
“얼마 간 조선을 떠나 있으면, 내 신변도 안전해지겠지.”
하성군은 대외적으로는 병을 가장하여 사카이에 눌러앉아 있을 예정이었다. 조선을 떠나 있는 기간이 길수록 왕도 경계를 풀 터였다.
* * *
처음 한 달간은 나름대로 잡음과 진통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재판들은 순조롭게 도시를 안정시켜나갔다.
공정한 판결이 이루어지면서 그간 물밑에 있었던 것들이 상당수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특허에 관한 문제였다.
“꽤나 까다롭군. 양측의 말에 일장일단이 있어.”
쟁송을 벌이는 양측이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을 경우, 당연히 재판은 하성군의 몫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될 정도의 복잡한 문제는 그라고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근거는 충분합니까?”
“그러니 문제가 아니겠나.”
해고당한 측은 자신의 발상으로 공장의 생산량이 늘었음을 주장했고, 공장 측은 노임을 주고 일하면서 얻은 결과물이니 그가 권리를 주장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어쨌든 공장은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덕분에 증거는 충분했다.
조선에서는 아직 특허라는 개념이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하성군이 듣기에는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흠, 이것도 정비를 해야겠군요.”
이미 나는 직조 공장에 비슷한 전례를 만들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을 이야기하자, 하성군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과연······. 새로운 발명을 유도하려면 발상 자체를 보호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셈이지요.”
“좋은 건 널리 알려서 모두가 쓰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네만······.”
그게 조선시대의 통념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하성군이 보이는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익이 없어서 실전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
특히 도공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보인다고 했다.
자신의 기법을 꽁꽁 감춰 놓고 있다가 전수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죽어 버리면 그대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백자보다 청자를 더 좋아하네만, 청자를 만들 줄 아는 도공은 드물더군. 그조차도 자기 기술을 남에게 전수하길 꺼렸으니······.”
하성군의 취향이야 내 알 바 아니었지만, 그가 내 말에 공감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위에서 그 발상을 보호해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겁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굳이 경비대에 이렇게 많은 예산을 배정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이지. 요즘 들어 말이 좀 많아졌군.”
“그걸 허용하신 건 쿠보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사카이의 시정 봉행으로서, 국고에 관해 조언을 올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명백히 자기 일 하는데 거기에 토를 달 필요가 있을까.
“혹시······.”
“내가 거상들을 붙잡아다 재산을 털어낼까 봐 두려운가?”
정곡을 찔렸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관료들의 출신을 캐본 결과, 그도 다나카 일족 중 하나였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입 꾹 닫고 비수를 품고 있는 것보다야 말로 불만을 표출하는 게 대화의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는가.
다만 그 대상이 몇몇 부분에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엿보였다.
요즘 들어 시정 봉행이 불만을 자주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의 호기심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반발이 섞인 느낌이 강했다.
“자네라면 학교나 병원에 나가는 지출을 더 싫어할 것 같았는데.”
여전히 베드로는 입을 닫고 있었다.
아마도 그쪽은 가톨릭 성향이 강한 편이었으니, 그로서도 반발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대신 자신들의 이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경비대를 걸고넘어진 듯했다.
“병사들에게 이렇게 많은 봉급을 지불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야 들어오지 않겠나.”
많다고는 해도, 노임에 비해서 그럴 뿐이었다. 이를테면 최저임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아예 법으로 노임의 최저한계를 정해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거상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은 이 중세시대의 법칙을 어느 정도 따를 필요가 있었다.
대신 그들에게 경쟁자를 만들어 주었다.
이미 병력의 규모는 인구에 비해 상당히 가분수였다. 거상들의 입김이 닿은 자들을 모조리 내쫓고, 새로 모병한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많은 이들이 경비대에 지원했고,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거상들은 노임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보고는 잘 들었네.”
기분 나쁘다고 목을 날리지는 않았으니, 그 자체로도 충분한 메시지가 되었을 터였다.
베드로도 그걸 잘 알아들었는지, 툴툴거리는 것 외에 다른 반발은 보이지 않았다.
* * *
히데요시는 자기 주군의 명을 받아 산적을 토벌에 나섰다. 대부분의 산채를 부수었고, 이제 그 끝이 보이는 듯했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
“후지미성의 도적들만 토벌하면 끝입니다.”
아시가루 하나가 그의 질문에 답했다. 후지미 성이 히데요시가 명을 받은 목표였다.
지금 그 외에도 노부나가 휘하의 많은 장수들이 산적을 토벌하는 중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새로 얻은 영지를 안정시키기에도 바빴다.
에치고를 얻은 덕에 석고는 크게 늘었지만, 시나노의 산지에 도적떼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이 우에스기와 다케다의 잔당이었다.
영지가 늘어나도, 통치력이 닿지 않는다면 얻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 신임 간토간레이는 산적들을 진압하느라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히데요시는 어렵지 않게 후지미 성의 도적들을 토벌하고, 자신의 거성을 꾸몄다. 이제 그도 어엿한 성주가 된 것이다.
“주군. 명하신 대로, 토벌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이제 너도 성주가 되었군.”
“주군의 은혜 덕입니다!”
기특하다는 듯이 가신을 내려보던 노부나가는, 뭔가를 떠올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너도 영지를 지닌 무사가 되었으니, 성이 없는 채로 지낼 순 없겠지.”
히데요시는 가만히 자기 주군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후지미 성을 얻었으니, 후지미 가문을 열어도 좋겠지.”
보통 무사들이 가문명을 결정하는 방식은 이런 편이었다. 연고지는 한 사람을 알기 쉬운 가장 간편한 정체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땅에 얽매이기보다는 주군을 섬기는 데 진력하고 싶습니다.”
땅이야 얻다가도 잃을 수 있는 것이고, 잃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것. 히데요시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러한가. 언제나 네 녀석은 기특한 말만 내놓는구나.”
노부나가는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었다.
“좋다. 그렇다면 네 생각에 어울리는 성을 내려주지.”
잠시 생각하던 그는 하시바(羽柴 우시)라는 새 성을 지어 주었다.
“밖의 일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시전승가)에게 의지하고 있고, 안의 일은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단우장수)가 맡고 있지. 히데요시, 네 재주는 두 사람의 영역에 모두 걸쳐 있으니, 그 둘에게서 한 자씩 따오는 게 좋겠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주군이 신경써준 성에 감읍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의 직속 닌자인 핫토리가 불쾌한 소식을 가져왔다.
“교토에서 과거를 연다고?”
“그렇습니다, 주군.”
“쇼군, 그자가 정말 가지가지하는군.”
오다 노부나가의 폭언에 히데요시는 깜짝 놀랐다. 그의 주군은 쇼군의 최측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노부나가는 자기 가신인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그걸로 천하가 안정된다고?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지만, 지금 쇼군은 천하를 얻었다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의 영향권은 고작해야 교토와 기나이 일부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어리석은 미요시 요시츠구가 고개를 숙인 덕이 아니던가.
잠시 생각하던 노부나가의 눈은 충격에 빠진 듯한 히데요시를 향했다.
“왜 그러느냐?”
“아, 아닙니다.”
“걱정할 것 없다. 쇼군은 뼈대만 좋을 뿐이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자이니. 천하는 내 것이다.”
자신 있는 어조였지만, 그 말에는 까닭모를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히데요시의 눈에는 자신의 주군이 언제나 완벽해 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