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왜구 토벌 (6)
설마 마츠라 측이 협상이라도 걸어온 것인가 싶었다. 남쪽에서 누가 배를 띄운단 말인가.
“깃발이 걸려 있었을 것이 아닌가. 어디 소속이었나?”
“저어, 그게······. 처음 보는 가몬(家紋 가문, 일가를 상징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츠라 가문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럼 대체 어디의 누가 보낸 배일까. 나는 병사들을 소집해서 검문선을 띄우게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내 휘하의 소조선이 낯선 배를 인도해 오는 게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깃발의 문양도 보이기 시작했다.
“되게 불편한 방향으로 낯이 익은데······.”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열두 가닥의 햇발이 뻗어 나온 그림.
언뜻 보면 욱일승천기를 연상케 하는 저 형상이면, 류조지였던가?
일단 지금은 적대할 의도는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쿠보 님. 소인은 류조지 다카노부라 합니다. 사가의 일개 호족으로, 쿠보께서 왕림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뵈러 왔습니다.”
방문객은 제법 살집이 있는 자였다. 하지만 꿀을 발라 놓은 듯한 언사와 둥글둥글한 외형과는 달리, 눈에는 살기가 어린 듯했다.
그는 히젠의 곰으로 명성을 얻은, 센고쿠 다이묘 중 하나였다.
실제 행보도 전형적인 하극상의 길을 걷고 있던 자였으니, 가까이 해서 좋을 건 없을 터. 하지만 공손하게 구는 상대를 핍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대로 인사를 받았다.
“그런가. 만나서 반갑군. 헌데, 무슨 일인가?”
“쿠보를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묻자, 그도 미사여구를 줄인 답을 내놓았다. 역시 눈치만큼은 상당히 빠른 자였다.
“나를 돕고 싶다?”
“그렇습니다.”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쓰시마 도주에게 손을 벌리기보다는 가까이에서 지원을 받는 게 나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꺼림칙함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내 듣기로, 자네의 행보에는 신용이 없다 하던데······. 지금 내게 손을 내미는 이유가 뭔가?”
“쿠보께서는 마츠라 가문을 토벌한 다음에는 떠나셔야 하시지 않습니까. 소인에게 맡겨 주신다면, 이 지역을 착실하게 관리하겠습니다.”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이번 원정은 대외적으로 명분 없는 싸움이나 마찬가지. 빨리 끝내고 돌아갈수록 유리했다.
나는 조선의 요구로 왜구를 토벌하러 나왔지만, 교토의 쇼군이 보기에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의 교역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나는 마츠라 가문을 까닭 없이 핍박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자네의 수군은 어디서 활동하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잡아떼지 말게. 이 일대의 호족들은 해적질로 업을 삼는다더군. 조선인지, 명인지 그걸 말하라는 것이야.”
“명입니다.”
내 추궁을 들은 류조지 다카노부는 냉큼 답했다.
“병력은 얼마나 내놓을 수 있나?”
“삼천을 출병시킬 수 있습니다.”
역시 준비한 듯한 답변이었다.
아마 내 세력이 약해진다면, 이자는 또 내 등에 칼을 꽂으려 하겠지만, 지금은 아닐 터였다. 고민 끝에, 나는 조건을 제시했다.
“내가 원하는 건 셋이네. 하나는 자네의 군대가 앞장서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곳, 이키 섬이지. 마지막으로 조선으로 수군을 보내지 않는 걸세. 나머지는 원하는 대로 하게.”
히젠의 곰, 류조지 다카노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내 조건을 모두 수락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기꺼이 쿠보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류조지 다카노부는 출병 날짜를 의논하고 돌아갔다. 시기는 열흘 뒤. 히라도 해협을 남북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 * *
약속한 열흘 동안, 함대를 움직여 매복할만한 장소를 말끔하게 청소했다.
“어선은 봐달라고? 좋다. 그렇다면 당분간 배를 끌고 이키 섬으로 가 있도록 해라.”
어촌 주민들이 내게 애걸복걸하며 매달렸고, 나는 그들에게 선택지를 내밀었다. 조용히 소개령에 따르던가, 아니면 배를 잃던가.
히라도 해협은 좁다.
아무리 느리고 둔한 배라도 불붙여서 띄워 보낸다면, 피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게다가 작은 어선에까지 화약과 포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민들은 대부분 내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은 자기 배를 잃어야 했다.
그리고 기일이 되었을 때, 나는 함대를 이끌고 해협으로 들어갔다.
이제 뒤쪽에서 매복이 튀어나올 가능성은 없었기에, 마음 놓고 전방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뭍에 오르는 대신, 포구에서 류조지 다카노부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는 약속을 지켰다. 약속한 시간에 알맞게 들어왔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아니, 사실 이건 쿠보께서 너무 빠르신 겁니다.”
“류조지 가문의 군대가 앞장선다. 잊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그는 넉살도 좋게 농담을 걸었지만 나는 그걸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약속의 이행을 독촉했다.
류조지 다카노부가 이끄는 삼천의 병력이 먼저 상륙하고, 내 함대의 수병 일부가 뒤를 받쳤다.
히라도 성은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아마 옛날이라면 난공불락을 자랑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위치 덕에 공략이 쉬울 듯했다.
언덕과 해수면의 높이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천수각을 비롯한 성의 주요 시설 대부분이 사거리 내에 들어와 있었다.
“목표는 히라도 성이다. 화포 장전하고, 준비가 되면 바로 쏴라.”
포구로 들어간 회선은 그대로 공성포대가 되어 성벽을 때려 부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류조지 다카노부가 아첨했다.
“이거, 공략이 쉽겠군요. 역시 쿠보십니다.”
나는 그의 아부도 적당히 써먹기로 했다. 고기방패 역할을 맡은 자가 내 전공을 칭송할수록, 그의 목소리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성이 뚫리면 공략하긴 쉽겠지?”
“무, 물론입니다.”
내 질문을 받은 뒤에야, 그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직접 공성에 나선 부대의 피해가 적었으니, 더더욱 할 말은 없을 터였다. 결과적으로는 그가 숟가락을 얹은 모양새가 되었으니까.
“이제 히라도 성이 거의 박살났군. 들어가서 마츠라 일족을 모조리 잡아오게.”
이제 수성측은 그 이점을 거의 상실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멀쩡한 방어시설은 하나도 없었고, 성의 남서쪽을 제외한 모든 구역이 쑥대밭으로 변한 상태였다.
나는 류조지 다카노부를 돌아보며, 그가 할 일을 명령했다.
“이제 가서 마츠라 일족을 잡아 오게. 이번 싸움의 수훈은 자네에게 넘겨주지.”
“네? 아,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적은 노고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고 좋아하겠지만, 지금 내 배려는 어디까지나 입막음을 위한 조치였다.
과연 언제쯤 깨달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앞으로 가주 다카노부를 비롯해, 마츠라 일족이 모조리 끌려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류조지의 가주와 같은 이름이었다.
마츠라 다카노부는 내 앞에서도 악을 쓰며 뻗댔다.
“쿠보는 어찌하여 나를 이리도 핍박하시오?”
“핍박이라니. 나는 사누키노카미(소 요시시게)의 요청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나왔다. 제 죄도 모르고 입을 놀리는가?”
“조선 약탈은 원래 우리 가문의 업이요, 이익이었소. 쿠보야말로 외국인과 손잡고 내 나와바리를 침범한 것이 아니오이까!”
어쨌든 중앙정부에 해당하는 조정과 막부도 해적질은 예전부터 엄히 금해 왔다. 다만 통치력이 닿지 못하니 지방의 다이묘들이 제멋대로 구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저렇게 악을 써 주는 건, 오히려 내게 명분을 쥐어주는 행동이나 마찬가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기 죄를 알아서 토해내는군. 자백으로 인정하지. 조정에서 정한 율령에 따라, 마츠라 가문의 땅을 박탈한다.”
거기까지만 하면, 나머지는 류조지 다카노부가 알아서 할 터였다. 아마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잘 정리할 것이다. 물론 악명도 그가 가져갈 거고.
마츠라 가문의 처리가 끝나자, 류조지의 가주는 내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몇 가지 남아 있었다.
히라도 성에서 포구 맞은편이 바로 남만인들의 거류지였다.
“여기가 히라도의 상관인가.”
“그렇습니다.”
오래 머물렀다는 포르투갈인 하나가 서툰 일본어로 맞이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소인은 루이스 데 알메이다라고 합니다.”
그는 이 지역의 주민과 남만 상인 양쪽에 두루두루 인망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래서 대표 격으로 나선 모양이었다.
“이제 히라도는 어떻게 됩니까?”
남만인들은 모처럼 얻은 개항지에서 쫓겨나게 되는 게 불편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줄 생각이 없었다.
“남만인들은 모두 히라도를 떠나라. 여기에서 교역하는 걸 엄히 금한다.”
그들의 퇴거를 요구하자, 루이스 데 알메이다는 내게 매달렸다.
“부디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쿠보께서 띄운 격문에 따라 마츠라 다카노부를 돕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너희들이 그에게 돈을 벌어다 준 덕에, 그의 야심이 나날이 커져 갔지. 더 이상 히라도를 거류지로 내어줄 수는 없다.”
그렇게 못 박아 버리자, 남만인 모두가 실망과 좌절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동앗줄 한 가닥을 내려주었다.
“대신 이키 섬을 열어 주겠다. 그리고 성실하게 조치에 순응한다면, 항구 몇 군데를 더 열어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희망적인 조치들을 이야기하자, 알메이다를 비롯한 상인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몇 가지 교역품이 이키 섬에서 거래될 것이다. 거기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키 섬의 입지는 히라도 섬보다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근과 채찍이 모두 주어지는데, 과연 누가 끝까지 버티려고 할까.
아마 류조지 다카노부는 이곳의 세입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내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제 새로 얻은 영지를 안정시키기에도 바쁠 텐데, 그가 무슨 술수를 부릴 수 있겠는가.
아무리 불만이 있다 해도, 그는 내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정리를 끝냈는데, 루이스는 아직 용건이 남은 듯했다.
“무슨 일이지?”
“히라도에서 장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기에 드나들 수 있게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의 눈에는 욕망이라기보다는 어떤 신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야기나 들어보지.”
“여기에 병원을 하나 세웠습니다. 여기를 떠나 버리면 환자들을 돌볼 수 없게 되니, 부디 제 책임을 다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보고 결정하겠다.”
나는 그를 앞세웠다.
지금 시점에서는 서양의학이라고 해 봐야 별 볼 일 없는 상태일 터. 하지만 그중 건질 게 있다면, 봐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했다.
루이스 데 알메이다가 차린 병원은 의료적 기능보다는 종교적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치료는 자네만이 할 수 있나?”
“외과 치료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주님의 은총으로 환자가 낫도록 도울 뿐입니다.”
그의 답은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시기의 동양 의학이라는 것도 주먹구구에 가까웠으니, 그마저도 주민들에게는 엄청난 거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루이스 의사가 외과의라는 점은 주목할 만했다.
“자네, 혹시 루이스 사제를 아나?”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님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사카이에서 성당을 맡고 있네. 학교도 운영 중이고. 만약 자네가 루이스 사제를 돕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것 같은데······.”
사카이로 오라는 제안을 내밀었다. 내 말에 루이스 데 알메이다는 망설이는 듯했다.
“여기가 마음에 걸린다면, 학생을 데려가게 해 주겠네. 자네에게 배운 다음, 돌아와서 의술을 펼치면 되지 않겠나.”
이곳의 병원에 전폭적인 지원도 약속했다. 물론 하고 안 하고는 류조지 다카노부의 몫이 되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루이스 의사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쿠보를 따라가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었다. 유능한 외과의는 구하기 힘든데, 이건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외의 소득을 올리는 동안, 류조지 다카노부도 대강의 정리를 끝낸 듯했다.
“마츠라 일족을 모두 숙청했습니다.”
“수고했네.”
그의 말에는 이제 슬슬 떠나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가 배에 오르자, 히젠의 곰은 아주 상쾌한 표정으로 배웅했다.
그러다가 남만 상인들이 모두 출항하는 걸 보고 당황했지만.
이키 섬으로 돌아온 나는 조선의 사신들에게 승전을 고했다.
“이제 왜구가 날뛰는 일은 없겠지?”
“장담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또 왜변이 일어난다면, 그때도 토벌하도록 하지요.”
하성군은 내 말에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왜구는 근절되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호언장담했다면, 오히려 의심을 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 돌아가실 일만 남았군요.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거래 품목의 종류를 좀 늘리고 싶습니다.”
나는 이키 섬으로 오는 남만인들에게 특별한 상품을 약속했다. 그건 조선에서 가져올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