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왜구 토벌 (5)
잠시 시간이 지나고, 이제 사신단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스즈키가 이끄는 척후 선단이 히라도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 역시 이 자리에서 아주 잘 보였다.
그걸 보던 이이가 뭔가를 떠올린 듯했다.
“저쪽에서도 여기의 움직임을 환히 볼 수 있지 않겠소?”
“아마 그럴 겁니다.”
멀리서 보기에도, 히라도의 가메오카 성은 제법 높은 것 같았다. 이미 이키 섬의 사정은 짐작하고 있을 테니, 천수각에서 감시를 소홀히 하지는 않을 터였다.
“어차피 척후일 뿐이니 괜찮을 겁니다. 저 선단을 이끄는 스즈키 시게히데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나 역시도 그 친구를 파견하면서 정찰이라는 걸 강조했으니, 무리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날이 어두워질 것이니 내려가시지요. 겨울의 낮은 짧지 않습니까.”
“그러세.”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엉망이 된 척후 선단을 맞이해야만 했다.
여기까지 이끌고 온 소조선 오십 척의 반을 떼서 보냈다. 그 스물다섯 척 중 셋이 돌아오지 못했고, 나머지도 상태가 성치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면목이 없, 없습니다.”
스즈키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의 쓰지 않던 경어까지 나올 정도면,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일단 이야기를 들어야 잘잘못이라도 가리지. 어서 말해.”
스즈키가 이끄는 척후 선단은 해가 떨어지기 직전, 비슷한 규모의 적과 마주쳤다고 했다.
“분명이 탐색만 하고 오라고 했잖아. 혹시 전공이라도 세우고 싶었던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뭐야?”
옛 사이카슈가 밝힌 전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여차하면 충파로 빠져나오면 된다고 생각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세 배 가까이 되는 적선에 포위되었다고 했다. 거기까진 어쨌든 괜찮을 터였다. 그가 말한 대로 강행돌파를 시도한다면, 빠져나오긴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생각지 못했던 게 하나 더 있었다.
“마츠라 수군은 옹기로 된 병을 집어던졌는데, 거기에 화약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피해는 그때 발생했다고 밝혔다.
호로쿠비야에, 섶도 실려 있었다던가.
거기까지 듣고 난 다음에야, 출격했던 소조선이 죄다 깨지고 탄 자국이 가득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호로쿠비야(炮烙玉포락옥)······. 들은 적이 있어. 그걸 던져서 선박을 부순다고 말이야.”
적은 작심하고 화공을 준비했다.
만약 쿄타로였다면, 쉽게 대응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마츠라 수군의 해적질도 여러 차례 겪었을 터. 하지만 스즈키의 수전 경험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화약을 다루는 데는 익숙하겠지만, 그는 우에스기 토벌전을 제외하면 수전의 경험이 전무했다.
관동은 대체로 화약을 구하기 힘든 지역이었고, 우에스기 수군도 호로쿠비야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는 서국. 그것도 그 끝자락인 큐슈다. 화약부터가 이 지역을 시작해 동쪽으로 확산된 만큼, 흔히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쯧.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접근은 허용하면 안 되겠네.”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스즈키는 한번 데인 상처가 무척이나 쓰라린 듯했다. 하지만 원래 회선은 이런 경우에 아주 유용한 전함이었다.
“내가 한 수 가르쳐 주지.”
* * *
“소조선은 어떻게든 잡았는데······. 저렇게 큰 배는 처음이군.”
마츠라 다카노부에겐 이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언뜻 보기에도 오천 석보다 훨씬 큰 선박이라면, 보충하기도 어려울 터. 그와 그의 후원자가 노리는 점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어제 이쪽을 살피러 온 소조선을 부수고 쫓아냈다. 지원금을 좀 더 줘도 좋다고 생각한다만.”
“저희 주군께서는 돈을 헛되이 쓰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전언은 간단했다.
재건을 도와주겠다. 그러니 고니시 수군에 타격을 입혀라. 그리고 정보를 가져다주면, 그만큼 쳐주겠다.
협력을 제안했던 원숭이를 닮은 무사는 돌아갔고, 지금은 코가류에 속한 닌자 하나가 히라도의 가메오카 성에 와 있었다.
“이봐.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고니시 수군의 배는 훨씬 단단하다. 그런 걸 상대하려면 자금이 더 필요해.”
마츠라 수군은 첫 전투에서 많은 배를 잃어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무엇이 가장 효과적일지 알아낼 수 있었다.
화공. 어떻게든 접근시켜서 불을 붙일 수 있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그동안 보아온 바에 의하면, 고니시 수군은 근접전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철포조차도 최대 사거리가 아닌, 인접한 상태에서 사격해 왔다. 그러니 달라붙기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모조리 불태워 버리려면 화공선이 필요하다. 배가 곧 소모품인데, 이렇게 적은 액수로 어떻게 충당한단 말이냐?”
“알겠습니다. 주군께 그리 전하지요. 대신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타격을 입히셔야 할 겁니다.”
어차피 선박을 건조하려면 제법 시일이 걸린다. 히라도의 영주는 다른 것보다도 그의 후원자가 입을 씻어 버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코가 닌자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불과 사흘 만에 마츠라 다카노부가 부른 만큼의 은화를 주머니에 담아 왔다.
“좋군. 신임 간토 간레이는 큰 인물인 모양이야. 신의도 있고, 서쪽에도 관심이 많고.”
닌자는 답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 * *
서전이 지나고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이키 섬의 요새화도 마무리되었고, 다친 병사들도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제가 탄 대선은 그리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 섬에서도 경과는 확인하실 수 있으니, 여기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굳이 귀하신 몸들을 전장에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내 말을 들은 사신들은 그러겠노라 답했다.
회선 오십 척, 소조선 삼십 척의 대선단이 이키 섬을 나섰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히라도에 거의 접근할 무렵, 주변의 포구에서 마츠라 수군이 몰려나왔다.
주변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서 최대한 포위할 수 있게 매복하고 있었던 듯했다.
적은 삼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는 게······.”
“아니. 그렇게 한다 해도, 회선은 느려서 금방 잡혀. 차라리 한 군데씩 부순다.”
그렇게 방침을 정한 뒤, 가장 가까운 선단이 있는 우현으로 방향을 틀었다.
큰 배는 그리 많지 않았고, 작은 배가 족히 일백여 척은 되는 듯했다.
“전부 짚이 실려 있습니다! 화공선으로 추정됩니다.”
눈이 좋은 병사가 적정을 알렸다.
“회선은 일자진을 편다. 소조선은 진형의 측면과 후면에서 대기하라.”
내 지시에 따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천 보까지 접근했습니다!”
“칠백 보가 되면 알리도록.”
아군 함대가 진형을 모두 갖추었을 때쯤, 적도 내가 언급한 칠백 보까지 접근했다고 했다.
“화포 장전.”
병사들이 약포를 뜯어서 화포 안으로 부었다. 정해진 양을 모두 채운 다음, 격목을 두드려 박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탄 역할을 할 쇠구슬을 집어넣었다.
“오백 보입니다!”
“깃발을 휘둘러라!”
쿵! 쿠쿠쿵!
내가 탄 대장선을 필두로 오십 척의 회선의 우현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접근해 오던 적의 삼분의 일 가량이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이대로는 접근을 허용하게 됩니다!”
스즈키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아무리 장전을 빠르게 한다 해도, 고작해야 한 번의 포격이 가능할 터. 화공선의 매운 맛을 봤던 그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좌현 격군은 전진. 우현 격군은 후진으로 노를 저어라!”
병사들이 복창하며 명령을 전파하고, 그대로 모든 회선(廻船)이 자기 이름에 걸맞게 선체를 돌렸다.
좌현과 우현이 정확히 위치를 바꾸었을 때, 나는 회전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발포 명령을 내렸다.
“쏴라!”
콰콰쾅!
이번에는 다른 배에서도 거의 동시에 포격을 날렸다. 그러는 동안에 우현의 화포수들은 부지런히 내부를 세척하고 탄약을 장전했다.
역시 적선의 삼분의 일이 박살났다.
“이런 방법이······?”
“회선은 원래 이러려고 만든 배야.”
물론 실제 역사에서 회선은 임진왜란이 한참 지난 에도 시대에나 등장한다. 그것도 전투 목적은 아니었고, 세토 내해의 화물 운송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형상만 놓고 보면, 평평한 판 형태의 용골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지금 내가 쓰는 회선과 비슷했다.
어차피 회전하기 쉽다고 회선이라고 한 건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대선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빙글 돌았다. 세 번째 포격이 끝난 뒤에 멀쩡한 적선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나머지 두 선단이 남은 상태. 약 천오백 보쯤 되는 것 같았다.
스즈키가 그걸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그래도 저걸 전부 상대할 순 없습니다!”
“알아. 가만히 보고나 있으라고.”
나는 다시 지시를 내려, 아군이 박살낸 선단이 나타난 방향으로 이동하게 했다.
“다쿠시마와 아즈치오시마 사이로 들어간다!”
두 섬 사이의 폭은 약 이천 보쯤 되는 듯했다. 그 정도면 일자진을 펴면서 접근 방향을 좁히기에도 용이할 것 같았다.
추격해오는 적선과 거리가 계속해서 좁혀졌지만, 다행히도 진형을 갖출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이번에도 일자진을 펴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상대는 한쪽 날개가 박살났던 걸 보고도, 그대로 아군을 향해 밀려들어왔다.
오히려 지형 상 좁을수록 화공을 가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를 일. 하지만 이쪽도 화망을 집중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아주 좋군.”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오백 보까지 접근했을 때, 아까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적은 머릿수의 우세를 전혀 살리지 못했고, 죽을 장소로 줄을 선 모습이 되고 말았다.
쏘고 선회시키고, 다시 쏘고 선회. 이하 반복. 좌현과 우현이 번갈아가며 불을 뿜었고, 그럴 때마다 적선이 부서졌다.
그렇게 와장창 박살난 뒤에야, 겨우 적이 미련을 버린 듯했다.
- 와아아아!!
적은 아군의 함성을 배경삼아 물러났다. 마음 같아선 끝까지 추격하고 싶었지만, 회선은 평저선인 구조 때문에 일반적인 군선보다 느렸다.
“아, 그렇지. 남만인들에게 격문은 전달했었나?”
“네······.”
스즈키는 여전히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기운 내라는 의미에서 어깨를 두드려 주고 다음 안건을 꺼냈다.
“그렇다면 상륙을 시도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보시다시피 마츠라 가문의 본성으로 가는 길은 좁습니다. 만약 뭍에 오르려다 화공이라도 당한다면 역시 대응할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육전에 취약한 아군의 손실도 크겠지요.”
다행히도 그의 판단력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 기회에 마츠라의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화근을 남겨 두는 셈이 될 터. 이대로 돌아가기도 곤란했다.
“일단 이키 섬으로 돌아갈까. 쓰시마에 요청해서 병력을 지원받던지, 아니면 남만 상인을 매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군 함대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바탕 무력시위를 벌인 다음, 이키 섬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조선의 사신들에게 결과를 보고했고, 쓰시마 도주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작성했다.
고기방패를 준비해 달라는 말을 최대한 곱게 포장해서 작성했다. 다 완성되었을 무렵,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쿠보, 남쪽에서 쾌속선 한 척이 이키 섬으로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