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왜구 토벌 (3)
다행히 정세는 안정적이었다. 물론 도미노마냥 어느 한 곳에서 전쟁이라도 터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휘하 장수와 관료를 소집해, 상황을 설명하고 자리를 비웠다.
에고슈의 통제는 이마이 소큐에게, 시정은 베드로에게, 군무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맡기고 쓰시마로 이동했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반갑습니다. 제가 소서행장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번 사행의 정사로 온 하성군일세.”
내 인사에 답한 사람은 겹겹이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눈빛에는 신경질적인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그가 하성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고 보니, 원래는 이 사람이 조선의 왕이 되어야 했던가. 하지만 명종은 지금 상당히 건강한 듯했다. 그러니 하성군은 일개 종친으로 남을 수밖에.
나는 하성군이 누구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는 내가 방심할까봐 걱정되었는지, 몇 가지 정보를 일러주었다.
그가 귀띔해주길, 조선 측에서 교역을 총괄하는 사람이 바로 하성군이라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번에 정사로 온 것 같았다.
부사와 서장관까지 소개를 받은 뒤, 조선에서 온 손님들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역시 실무를 담당하는 부사인 이이가 용건을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 송포당을 자처하는 무리가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고 갔소. 그대가 왜구의 단속을 약속했으니, 즉시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바요.”
“실례지만, 우선 증좌부터 보여주시겠습니까?”
대마도는 전통적으로 왜구의 소굴이다시피 했다. 어쨌거나 원양을 넘어다니는 건, 목숨을 거는 일. 하지만 왜구나 기타 이방인이 이 섬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내 말을 들은 하성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되네. 여기 왜구가 놓고 간 유류품이 있으니, 확인해보시게.”
역시 유즈야 야스히로가 가져왔던 깃발을 비롯해, 왜구가 쓸 법한 각종 물품이 들어 있었다. 모두 마츠라 가문의 상징이 새겨진 상태였다.
“실례했습니다. 역시 왜구의 소행이 맞군요. 하지만 역시 대마도를 경유한 게 아니니, 저희로서는 당장 어찌해보긴 어렵습니다.”
“토벌이 어렵단 말인가?”
“가능한 이야기이나, 저 또한 원정을 준비하려면 시일이 다소 걸린다는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은 하성군은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서장관이 내게 호통쳤다.
“어허! 상국의 명에 토를 다는가? 당장이라도 배를 내어 송포당을 징치하란 말이다.”
정철이라고 했던가.
도주는 그에 관해서도 몇 가지 정보를 일러주었다. 섬을 돌아다니며 유람을 즐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쓰시마의 실정을 어느 정도는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지금 대마도에는 군선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저는 급히 오느라 빠른 배 하나로 왔고······. 간단한 정탐이라면 몰라도,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래도 일단 내지르고 본 모양이었다. 정철이 자기 일행을 둘러보며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정 믿기지가 않으신다면, 이렇게 하면 어떨지요? 서장관 어른께서, 저와 같이 가서 제 수군의 움직임을 직접 확인하시는 겁니다.”
나는 당당하게 그의 눈으로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나가자, 오히려 정철이 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허, 흠······.”
조선의 사신은 일본 본토로 건너오지 않았고, 대신 내가 쓰시마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섬이 사행길의 끝이라 여겼을 터. 과연 머나먼 뱃길을 오려 할까?
역시 정철의 독단이었는지, 하성군이 그의 말꼬리를 붙잡고 일을 키워버렸다.
“그것도 좋겠군. 공방(公方, 쿠보)가 이렇게 성의를 보이고 있잖나. 게다가 전하께서도 전말을 빠짐없이 살피고 오라 하셨으니, 이 기회에 일본국 본토에 다녀옴도 나쁘지 않을 듯싶으이.”
“하, 하지만 이번 사행은 대마도가 끝이 아니었습니까?”
“처음에 그리 말한 이유는 따로 있네. 우리 조선과 공방의 관계를 다른 왜추들에게 보이는 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지. 허나, 조용히 다녀오면 그만이 아니겠나?”
역시 하성군은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는 자였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신의를 좀더 돈독히 하려는 듯했다.
“이보게, 공방. 우리 세 사람만이 평복으로 바꾸고 배 위에서만 지낸다면, 다른 자들에게 들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그렇게 사신단의 사카이 행이 결정되었다.
* * *
조선에서 온 사신들은 배멀미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였다. 쓰시마로 건너오는 동안은 그럭저럭 버틴 모양이었지만, 사카이로 오는 길은 그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적응하는 기간도 세 사람이 모두 달랐다.
정철은 가장 먼저 뱃전의 요동에 익숙해졌다. 하성군이 그 다음으로 적응했고, 이이는 내내 고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국의 산세는 참으로 험하기 짝이 없군.”
“대체로 그런 편이지요.”
“조선과 비슷한 듯해도 또 다른 모습을 보이니, 저절로 시상이 떠오르네그려.”
서장관 정철은 아예 관서별곡을 지을 기세였다. 굳이 거기에 끼고 싶진 않았기에,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게다가 내가 궁금한 걸 답해줄 사람은 그가 아니기도 했다.
하성군이 뱃길에 적응한 뒤로, 나는 그와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적당히 친해졌다 싶었을 때, 왕의 건강을 물어보았다.
“상당히 외람된 줄은 알지만,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말해보시게.”
“제가 약재상 집안 출신이다보니 사람의 병에 대해서도 다소 일가견이 있다 자부합니다. 일전에 전하를 알현했을 적에는 상당히 위중해보이셨지요. 물론 사신으로 간 몸이라 감히 입에 올리기는 어려웠습니다마는······.”
내 말을 듣고 하성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자도 그 시기를 전후해서 후계자로 점 찍힌 상태였을 터. 아마 부산의 일을 총괄했다는 것도 그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아마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겠지만.
“지금은 아주 강건해지셨지. 공방이 옳게 보았네. 그때는 언제 국상을 치러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제가 듣기로, 조선에는 삼신산이 있고 불로초가 자란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걸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 농담을 하는가?”
우스개 섞인 소리가 오가기는 했어도, 하성군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별거 아닐세. 마음이 편안해지셨으니, 몸도 자연스레 회복되신 게지.”
그렇게만 말했다. 아무래도 본인이 왕이 될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게 아쉬운 모양새였다.
* * *
“그래서 이번 원정에는 최대한의 전력을 동원할 생각이야.”
사신단은 아와지 섬에 숨겨두고, 나는 사카이로 돌아왔다.
쿄타로는 사도 섬의 대관으로 가 있고, 스즈키가 고니시 수군을 맡은 상태였다. 당연히 의논 대상도 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대선으로 회선 오십 척, 그리고 소선도 오십 척 정도면 되겠지.”
“회선을?”
항로 경비에서 몇 차례 위용을 뽐내기는 했지만, 회선을 제대로 된 전투에 투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 번에는 사도 섬이 북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어, 부득이하게 함대를 전부 관선으로 구성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갈 큐슈의 서북부는 얕은 바다. 회선을 투입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에서 온 사신들에게 어느 정도는 전력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이번 장마가 끝나는 대로 출격할 거야.”
그동안 수군 전력은 착실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일천 석짜리 관선이 팔십 척에, 동급의 회선이 오십 척. 그리고 오백 석짜리 관선은 백 척을 넘겼고, 소조선은 그냥 많았다.
병력 수로 놓고 보자면, 격군은 제외하고 총 오만에 달하는 대규모 수준이었다.
물론 넓은 항로를 경비하다보니 비대해진 감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금줄이 자금줄인 만큼 한껏 체급을 불려놓아야 했다.
아마 모든 다이묘가 합세해서 달려들어도, 수군에 한해서만큼은 거의 대등한 정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의 결과였다.
“뭐, 괜찮겠지.”
다행히 정세는 고요했다. 적어도 원정을 다녀올 동안만큼은 전력 일부를 빼내도 될 정도였다.
* * *
“판옥선만한 배가 오십 척이라······?”
“그렇습니다. 배가 크고 안정적이니, 돌아가시는 길은 그리 멀미가 심하지 않을 겁니다.”
이이는 장마 때문에 발이 묶인 한 달간, 멀미로 고생한 몸을 요양했다. 그리고 이제는 대마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을 듯한데. 이 배로 조선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군.”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 대마도까지 가기에도 위험하여, 거기에서부터는 올 때 타셨던 배로 옮기셔야 할 겁니다.”
내 말을 들은 이이는 이전에 겪은 멀미가 생각났는지, 도로 안색이 나빠졌다.
그렇게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질문을 던졌다.
“공방은 어찌하여 아국(我國)과 교역을 하려 했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들은 이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기에 질문하는 것이외다. 일찍이 아국은 왜에 화약의 원료와 제조법이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소.”
“압니다.”
“대저 화약이란 일개 아녀자가 항우를 상대하게 해주는 기물이오. 그렇기에 왜구에게 유출되는 걸 극히 꺼렸소.”
간단히 말해서, 이쪽에 유리한 물건을 함부로 넘겨주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이야기였다.
답이야 늘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이걸 어떻게 잘 다듬어서 내놓아야 이 시대의 선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조선은 제게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저 역시 조선에 위협을 가할 순 없습니다.”
“다른 대명을 이롭게 하는 것보다는, 조선과 교역하는 게 낫다는 말이구려.”
“물론 저는 이걸 쉬운 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말을 들은 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어려운 답은 무엇이오?”
“글쎄요. 제가 듣기로, 부사께서는 조선에서 도학군자로 통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스스로 답을 내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단서는 양혜왕편에 있습니다.”
“맹자 양혜왕편이라······? 그건 오십보백보의 고사가 아니오이까?”
물론 그렇게 알려진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세부적인 대목에 주목했다. 과연 이 선비는 그걸 잡아낼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만 보시면, 답을 찾으실 수 없을 겁니다. 명과 조선, 왜국의 정황을 두루 참고하시되, 왕의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떠올려보시지요.”
“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이틀 정도면 답을 드릴 수 있겠소이다.”
그렇게 말미를 얻어간 이이는, 그날 저녁에 다시 나를 찾아왔다.
“모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듯 싶소.”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이는 그간 보고 들은 일본의 정세를 내게 재확인 받았다. 자기 견해의 전제가 옳음을 점검한 다음, 결론을 꺼냈다.
“공방은 참으로 어려운 길을 가려 하고 있소. 교역을 하는 모두가 왕도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니. 세상에 군자가 어찌 그리 많을 수가 있단 말이오이까?”
“군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면 그만이지요.”
“양혜왕편을 읽었다니 간단히 말하겠소이다.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취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였소.”
이이가 말하는 내용은 곧 유학, 그리고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바이기도 했다.
“농부는 농사를 짓고, 대장장이는 철물을 만들고, 도공은 그릇을 빚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재주로 이익을 구하지요. 선비가 아니기에 성인의 도를 익히지도 않았습니다마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주변을, 나아가서는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습니까?”
“흠, 그렇긴 하오만······. 나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이야기요.”
“굳이 이해하려 애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동안만큼은, 꾸준히 교역을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내 말을 들은 이이는 더 이상 논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