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왜구 토벌 (2)
내 나이도 어느새 18세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이 생겼다.
요시히메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맸다.
내 스스로가 지닌 의학적 지식은 한계가 있었다. 루이스 프로이스를 불러다가 넌지시 상담해보기도 했지만, 의미를 찾긴 힘들었다. 지금의 서양 의술이라고 해봐야 내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미개한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독한 증류주를 구하긴 어렵지 않았다.
- 아주 독한 술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불이 붙을 정도는 되어야겠지.
- 아쿠아 아르덴스를 찾으시는 모양입니다. 다행히 말씀하신 만큼의 물량은 있으니 가져가시지요.
유럽 상인들은 처음 교역을 틀 때, 몇 가지 상품을 주력으로 삼아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독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적어도 증류주는 60도는 되어야 인화성이 생긴다. 그리고 소독 효과도 그 정도는 되어야 나타나기에, 불이 붙는다는 걸 일종의 지표로 삼았다.
그렇게 위생에 공을 들인 덕에 요시히메는 건강히 출산 과정을 넘길 수 있었다.
“오오오······. 그래, 벤텐마루야. 금을 준들 너를 사며, 은을 준들 너를 사랴.”
아명은 벤텐마루(弁天丸변천환). 온갖 이름을 고심하다가 결국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목록을 보고 그중 하나를 골랐다.
- 쿠보의 힘은 바다에서 나오니, 물을 다스리는 변재천의 가호를 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불교식 이름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명을 두고 굳이 특이한 이름을 고를 필요는 없겠다 싶어, 그대로 정했다.
내 일상도 변했다.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 아이를 직접 돌보았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버릇이 나빠질 수도 있고, 남들이 쿠보를 업신여길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내는 내가 아이와 시간을 보낼 때마다 종종 타박하곤 했다.
요시히메는 무가의 여식으로 태어나서 그들의 관습대로 하기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굳이 체면을 지킨답시고 아이와 거리를 두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려면 어떻소. 부모가 자식을 귀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평소처럼 벤텐마루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유즈야 공이 쿠보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뜻밖에도 쓰시마 도주의 가신이 사카이를 방문했다. 올해는 이미 다녀갔으니, 굳이 다녀가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이야기는, 화급을 다투는 주제를 가져왔음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 쓰시마가 침공이라도 당했나?”
“쓰시마가 아니라, 조선에 왜변이 일어났답니다.”
유즈야 야스히로는 조선 측이 나를 찾는다고 했다.
“조선에 왜구가 침입했다고 합니다. 사신이 말하기를, 약조를 지키라고 채근해왔습니다.”
“쓰시마에는 변고가 없지 않았던가?”
도주 본인은 물론이고, 쓰시마의 상관(商館)에 숨어 있는 이가류 닌자에게서도 어떤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만약 소 요시시게가 딴 마음을 품었다고 해도, 감시망은 이중삼중으로 쳐 놓은 상태. 그걸 벗어난 행동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유즈야도 쓰시마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조선의 사신이 가져온 전리품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그는 깃발 하나를 내밀었다.
뽕잎이 펼쳐진 문양이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만 할 뿐, 어디라고 확연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마츠라 가문의 깃발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군관과 협조하여 심문해본 결과, 역시 히젠 국 출신이 많았습니다.”
유즈야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것이 왜구 일파 중의 하나인 마츠라토(松浦黨)의 상징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 그렇군. 쓰시마 항로가 막혀서 우회라도 한 건가?”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으나, 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신들은 쿠보를 만나야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중입니다.”
과연 협상용으로 압박을 가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와서 패악을 부리는 거로 봐야 할까.
그들을 만나지 않고서는 어느 쪽일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신단의 구성은 어떻게 되는가?”
“정사로는 조선의 종친 중에 하성군이라는 자가 왔습니다. 그리고 부사에 이이, 서정관에 정철이라는 사람들이 따라왔더군요.”
“하성군에 이이, 정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셋 중 하나만 왔어도 흥미로운 일인데, 사신단 핵심 인원이 전부 조선시대의 탑스타라고 해도 좋을 자들이 아닌가.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유즈야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대강은. 인편에 소문으로 조금 들은 바가 있네.”
어쨌거나 조선이 다른 나라이기는 해도, 나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유즈야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어쨌든 잘 알겠네. 그런데 통신사로 온 자들이 쓰시마에만 머무르겠다고 하던가?”
보통 통신사는 쇼군이나 덴노에게 보내는 사절이었다. 당연히 곧장 교토로 오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대로라면, 지금의 사신단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 질문에 쓰시마 도주의 가신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성군이 나름대로 사정을 잘 아는 듯했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바다를 건너 교토로 가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쓰시마에서 기다리겠답니다.”
“알겠네. 잠시 기다리고 있게.”
* * *
원자가 태어난 이후, 하성군은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기로 했다.
왕의 총애를 받았을 때, 그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제 새 원자가 태어나고, 왕은 아주 건강해졌다. 혜장대왕의 행적을 따를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원자가 장성하기 전에 보위를 이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다행히 왕은 종친의 일원으로서, 여전히 하성군을 총애하고 있었다. 그는 부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원행장, 아니 소서행장이라 했던가. 그가 몇 년 늦게 왔더라면, 내게도 기회가 있었을지······.”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을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순회세자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왕의 명이 그리 길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내수사의 일을 돌보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후계자로 낙점했던 하성군이 자연스럽게 인수인계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원자가 태어난 이후, 상황은 대단히 복잡해졌다.
왕은 여전히 하성군에게 중임을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을 누가 잇느냐로 놓고 본다면, 절대적으로 원자가 유리했다.
어쩌면 옥좌에 앉은 그의 숙부도 그걸 꿰뚫고 있었기에 여전히 그를 신임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부사로 붙은 이이가 하성군에게 말을 걸었다.
“파도소리가 좋아서 잠시 듣고 있었소. 부사의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 들었소만, 혹여 뱃길에 몸을 해치지는 않았소이까?”
“염려해주신 덕에 무탈한 듯합니다. 하온데······.”
하성군이 보기에, 이이는 궁금한 것이 아주 많은 모양이었다.
서장관 정철은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시 짓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이이는 착실하게 하성군을 따라다니며 대마도의 사정을 관찰했다.
“무엇이 궁금하시오?”
“제가 보기에는 아귀가 맞지 않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하성군 대감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대마도가 조선의 세견미로 연명한다는 건, 대다수의 사대부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이의 눈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구리와 유황을 받고, 생사와 철, 도자기를 가져간다. 그 어디에도 세사미두의 이동은 없었다.
“이는 대명률을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해금령 말이오?”
“그렇습니다.”
아직 이이는 단순한 선비에 불과했다. 그는 왕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명이 조선에 무엇을 해주었소이까?”
책봉을 내리고, 조공 이상의 사여품을 하사한다. 그리고 사나운 북방의 여진족을 공동으로 견제한다. 당장 이런 답변이 나와야 했으나, 그렇게 쉬이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부사 영감은 종계변무 문제를 기억하시오?”
하성군의 말에 이이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적어도 조선의 신하된 자라면,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명은 사서와 법전에 조선 왕실의 조상을 잘못 기재했다. 그리고 그걸 바로잡는 일에 미진한 태도를 보여왔다.
지금의 국왕은 물론이고, 종친인 하성군에게도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대통을 잇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영역을 떠나서, 조상과 관련된 일이 아니던가. 사대부로서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물론 조선이 명으로부터 받는 게 적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조선이 정말 천자의 위엄으로 국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소이까?”
“하오나······.”
“그렇다고 하여 태조대왕께서 명나라 태조의 일가거나 공신이라서 이 나라를 분봉받은 것도 아니고······.”
주변에 눈이 없다고는 하지만, 하성군은 거침없이 말했다.
“혹여 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조선에 재조지은이라도 내려주면 또 모를 일이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요. 종계변무 문제가 그러하듯, 목줄이나 채우려 들겠지.”
이이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스스로도 비슷한 경험을 겪기도 했고, 하물며 왕실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던가.
“해금령도 마찬가지요. 조선의 바다가 막히면, 결국 명에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겠소이까. 천자와 천조의 신하들이 바라는 것도 결국 그거요.”
“혹여 전하께오서도······?”
“그렇소. 내 보아하니, 어심은 부사에게 있는 모양이구려. 서장관은 생각 없이 유람이나 다니고 있으니······.”
서장관의 업무는 사행길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마도 곳곳을 유람하며 시를 남기는 정철의 행동은 나름대로 자기 업무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내용에 술맛이니 일본 기생이니 따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사인 하성군은 그 행태를 내버려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도 어쩔 수 없이 방치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하성군의 말을 들어보니, 다른 의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번 사행의 핵심은 그대가 될 거요. 그러니 서장관은 그냥 시나 짓게 합시다.”
“대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하성군은 주위에 누군가가 있는지 살피며, 계속해서 왕실과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동부승지인 이이의 업무는 공조(工曹)와도 관련이 있었기에, 이이도 부산에 많은 공방이 세워졌음은 알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부산포 일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도요와 철장이 세워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부산에서 만들어진 물품들은 모두 소서행장에게 가는 것이었군요.”
“그렇소.”
모든 전말을 알게 된 이이는, 조회에서 왕이 말한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화약과 화약을 다루는 법은 국가의 중대사였다. 그 원료도 마찬가지. 함부로 남에게 넘겨주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소서행장은 구리와 유황이 아주 중요한 재료임을 알면서도 꾸준히 조선으로 보내오고 있다고 했다.
“소서행장이 여느 왜인과 다르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이번 기회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