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왜구 토벌 (1)
관동의 전쟁이 끝나고, 천하는 한동안 평화로웠다. 그러나 여전히 각지의 다이묘들은 병력수를 늘리고, 서로 대치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인구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성당학교를 확충해서 관료를 충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인재가 그렇게 단기간에 양성되는 건 아니었기에, 기존 졸업생들의 업무가 과중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내가 전반적인 총괄을 맡겼던 베드로 같은 경우, 흑륜(다크서클)이 빠지지 않아 너구리를 연상케 했다.
“과거라도 열어야 하나······?”
“그게 무엇입니까?”
일본에는 과거제도라는 게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성당학교는 유학이나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기에, 지금 베드로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관료들은 모두 성당학교의 졸업생들이 아닌가.”
“그렇지요.”
“과거제는 그런 과정을 두지 않고, 공개적인 시험을 열어서 채용하는 제도일세.”
수석 관료는 내 말을 듣고 반색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건 곤란합니다.”
의외의 인물이 반대하고 나섰다. 내 직속닌자 이치로. 그는 내 경호와 첩보 임무에만 신경쓸 뿐, 의견을 개진하는 일은 전무했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토박이조차도 믿을 수 없는 법인데, 사카이와 아와지에는 대부분이 뜨내기들입니다. 그들의 출신을 전부 알아내고 감시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성당학교에서 한 차례 걸러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잖아도 이 도시는 비밀이 많았고, 이치로의 말은 타당했다.
나는 베드로의 기대감을 산산히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는군. 당분간은 자네들이 수고해줘야겠네. 대신 성당학교의 규모는 좀 더 늘리도록 하지.”
“크흑······. 어쩔 수 없군요.”
한 차례의 만담이 끝나고, 베드로가 원래 자신의 용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부로, 사카이의 인구가 십만을 넘겼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장사는 시원찮은 모양이군.”
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네, 쿠보. 어찌된 일인지 교역량 자체가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오와리처럼 어딘가 또 금지령을 내린 건 아니었다. 다만 전체적인 교역량이 베드로의 말처럼 완만하게 줄어드는 모양새였다.
“어디 보세······.”
전국적인 추세를 놓고 보면, 미요시, 모리, 오토모, 이 세 가문의 영지만 꾸준한 상태를 유지했다.
장부를 살피던 중에 특이한 점이 하나 눈에 띄었다, 그런 중에도 조선에서 들여온 도자기의 판매량이 약간 늘어난 상태였다.
“대책은 내가 마련해보도록 하겠네. 자네는 이제 가 보게.”
수석 관료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이치로를 향해 돌아섰다.
“다른 지역의 상태를 조사해오도록. 주로 군비를 얼마나 늘렸는지, 병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알아오면 된다.”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한 달이 지난 뒤, 이치로는 정보를 취합해서 가져왔다.
“서국에서는 모리 가문과 오토모 가문을 제외한 모든 다이묘가 대군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세율을 구할까지 늘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역량이 줄어든 것도 이해하지 못할 영역의 일은 아니었다. 지금 그들의 영지 자체가 피폐해지면서, 경제 규모 자체가 쇠퇴한 듯했다.
“그럼 멀쩡한 상태인 두 가문은 지금 어찌하고 있다던가?”
“이 두 가문은 군사적 행동을 줄이고, 철저히 수세로 일관 중인 듯합니다.”
그들은 이 시기를 버티면서 배를 쨀 모양인 것 같았다. 상대가 날빌을 들이민다면, 그것도 한 방법이기는 했다.
“그리고 동국에서는 오다와 도쿠가와가 모두 교역 금지를 걸면서, 거래 자체가 힘들어진 상태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동맹이라기보다는 상전에 가까운 오다 노부나가와 발을 맞추고 있었다.
“도자기 거래가 늘어난 건 어찌 된 일이었나?”
“군을 이끄는 무사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토지를 분급하는 대신 다기를 수여하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무사의 공에 포상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토지 분급, 감사장 수여, 그리고 다기 등의 보물 하사. 토지는 한정되어 있고, 감사장은 남발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지금처럼 비대한 병력을 유지하자면, 결국 다이묘들은 마지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재밌는 일이군. 얼마나 갈까?”
여러 면에서 이 난세가 그리 길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 * *
만력 2년, 그러니까 서기 1574년이 되던 해, 조선의 서남해안에 왜구가 대규모로 침입해왔다.
각지에 산재했던 읍성의 대비가 철저했던 덕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조정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장 왜관을 폐쇄하여 왜인들의 교활한 책동을 엄히 징치해야 할 것이옵니다!”
“대마도에서는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라 하였소이다.”
“그 말을 어찌 믿소?”
“지금까지 번국의 법도를 깬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종의조가 분란을 일으킬 리가 있겠소이까?”
“결국은 탐욕스럽고 간사한 왜인일 뿐이외다!”
아직 동서로 붕당이 갈리지는 않았으나, 조정의 분위기는 이미 두 색으로 나뉜 지 오래였다.
양측 모두 사림에서 나왔다. 하지만 누군가는 현실정치를 추구했고, 또 다른 이는 성리학적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자들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상태였는데, 왜변을 기회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원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조선을 다녀간 이후로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 있었다.
지금 조선의 신하들 중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직접 마주했던 이준경과 기대승은 이미 작년에 세상을 뜬 상태였다.
오직 왕만이 당돌했던 한 소년을 기억할 뿐.
왜국과의 교역은 내수사를 통해 진행되었고, 그 이익은 모두 국왕의 내탕금으로 들어왔다.
중종 이래, 모든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성종과 연산군의 대비되는 치세 때문에, 그들의 심신은 끊임없이 신하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무조건 쳐내기도 어려웠거니와, 여차하면 반정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왕들의 오랜 지병이었다.
그러나 대마도와의 교역은 총통위의 부활을 가능케 했다. 동시에 내탕금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마음이 든든해지면서 옥체 또한 건강을 되찾았다.
“경들의 말은 잘 알겠다. 과인 또한 왜인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신의를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원리주의자들은 모처럼 왕이 자신들의 손을 들어주는가 싶어 반색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과인은, 예전에 만났던 한 왜인을 기억한다. 그는 지금까지 신의를 지켜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 믿는다.”
이번에도 어심이 어디로 향할지, 신하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음은 이어졌다.
“일전에 성종대왕께서 궐내에 구리 수로를 만드신 적이 있었다. 당시 대간들은 사치를 경계해야 한다며 간언했고, 결국 철거했다고 들었다.”
왕의 말에 신하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속으로 한탄하며 자신들의 선배를 부러워했다. 지금의 왕은 그때처럼 간언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만은 않고 있었다.
“과인이 듣기로, 지금은 여염의 백성들도 모두가 유기를 사용한다고 하더군.”
신하들은 옥음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이 나라에서 구리는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는 이야기지.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질문에 좌중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신하들은 구리의 가격이 내려간 것만 좋아했을 뿐,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왕은 그런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왜추 중에 원행장이라는 자가 있다. 그는 왜구의 단속과 충실한 조공을 약속했고, 지금까지 지켜왔다.
이번에 왜구의 피해가 적었던 까닭도 마찬가지. 그가 보내온 구리로 총통을 만들고, 유황으로 화약을 만들 수 있었기에 쉬이 물리칠 수 있었다.”
신하들은 어째서 왕이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눈치 챘다. 조선의 군주는 더 이상 반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인세력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다시 여론을 주도하여 왕이 자신들의 말을 귀담아듣게 만들 좋은 건수였다.
“하오나 전하의 하교대로라면 왜구를 단속하지 못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나이다.”
왕은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하여, 과인은 원행장에게 왜구의 토벌을 명하려 한다. 예조는 교서를 작성하여 올리도록 하라.”
* * *
조회가 파하고, 왕은 신하 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동부승지.”
“예, 전하.”
“경은 지금도 충정(忠正)공을 싫어하나?”
왕의 하문에 동부승지 이이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이와 이준경의 사이는 아주 나쁘기로 유명했다.
“아니옵니다. 신이 충정공의 말을 너무 늦게 귀담아들은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옵니다.”
노재상은 젊은 신진 관료를 붕당의 원인으로 지목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 비판을 들은 사람은 역으로 그게 뭐가 나쁘냐고 반발했었다.
하지만 붕당이 가시화된 지금은, 그 일이 모두 이이에게 후회로 남은 상태였다.
그 역시 사림의 일파로서, 성리학적 치도를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상황은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원리주의를 외치는 자들의 주장은 결국 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자연스럽게 이이는 그들과 멀어지며, 현실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왕은 이이가 반성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며, 진정한 재상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건, 많은 견문일 터였다.
“이번 사행에 경을 서장관으로 임명하겠다. 원래는 부사를 맡기고 싶었지만, 품계가 품계이니 어쩔 수 없지.”
“신은 몸이 미령하여 대임을 맡기가 어렵사옵니다.”
이번에도 이이는 칭병하여 물러나려 했다. 이미 마음이 관직을 떠나 있는 상태요, 동부승지도 겨우 맡았을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경은 기어이 기군망상의 죄를 지을 셈인가?”
“저, 전하!”
왕은 이미 이이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경의 행동을 보아하니, 조만간 또 사직을 청하겠군. 허나 과인은 윤허할 수 없다.”
이미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고, 그때마다 이이는 칭병으로 물러나기를 반복한 상태였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왕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번 사행만 다녀오라. 그러고도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과인 또한 경을 다시는 조정으로 부르지 않겠다.”
“전하께오선 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라. 그 다음에 이야기할 문제일 터. 만약 사행에서 느끼는 바가 없다면 과인 역시 경을 붙잡을 이유가 없노라.”
이미 동부승지는 자신의 업무를 맡아보면서, 부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왕의 명령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이는 문득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대체 대마도에 무엇이 있기에, 그리고 원행장이 누구이기에 왕이 이토록 마음을 쓰는 것인가.
결국 그는 이번 사행을 거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