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우에스기 포위망 (5)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지금 오다 노부나가는 나와 맞대면을 청한 것이었다.
거절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쇼군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진면목을 볼 기회인 듯했다.
나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시지요. 마침 제가 교토에 저택을 하나 얻었는데, 오다 공께서 첫 손님이 되시겠군요.”
마침 우에스기 가문이 단절되었고, 그 저택도 빈집이 된 상태였다. 쇼군은 내가 미요시 가문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몰수한 저택을 하사했다.
사카이의 쿠보로서 중앙 정계와 엮이게 된 이상, 언제까지나 미요시 가문의 저택에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개수를 마치고 교토의 고니시 저택으로 쓰고 있었다.
“호오······. 그렇소이까? 원래는 내가 쿠보를 초대할 생각이었소만, 그런 경사가 있다면 방문하는 게 도리일 터. 기꺼이 방문하리다.”
오다 노부나가도 갑작스럽게 면담을 청한 이상, 내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다. 물론 어디에서 만나건 상관이야 없겠지만, 기세라는 걸 무시하기는 힘든 법. 누구의 집에서 대화하느냐는 제법 중요한 문제였다.
* * *
나와 오다 노부나가의 공통 분모를 찾자면, 당장 떠오르는 건 다도였다. 그도 차를 즐겼고, 나도 그런 편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차시츠로 가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낮은 정통성을 보충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고, 그 일환 중 하나가 다도에 몰두하는 일이었다.
나는 사카이의 상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 다도를 익혔고, 지금은 생활 속의 습관이 된지 오래였다.
차를 한 잔씩 나눈 뒤에, 손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쿠보는 소에키 선사나, 이마이 소큐와도 친분이 있으시다 들었소.”
비록 소에키는 마을을 떠나버렸지만, 그 둘은 내게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당대 최고의 문화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하필 오다 노부나가의 언급은 특별하게 들렸다.
만약 내가 무기상인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고 있었을 터였다.
오와리로 철포를 공급하고, 내 눈앞의 무사가 천하의 패권을 쥐도록 도왔을 터. 그걸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나는 지금 상당히 곤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같은 마을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유명인사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모른 척 넘어갔다.
“본래 이 사람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왕래가 뜸해지면서 소원해지더구려. 사카이로 돌아가시거든 안부나 전해주시오.”
피차 신경을 곤두세울 이야기는 그 정도로 끝냈다.
이어서 나와 오다 노부나가는 지난 전쟁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갇혀 있던 요가이 산성이, 실은 다케다 신겐이 공들여 쌓은 거라고요?”
“그렇다고 하더이다. 참으로 재밌는 일이 아니겠소. 그 둘은 천하에 다시없을 맞수였는데······.”
대강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그가 한 가지 주제를 끝마치면, 다음은 내가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참으로 성동격서의 묘리를 잘 살리셨소. 카스가 산성을 공격할 것처럼 꾸미다가 보급로를 습격하다니. 잘 새겨둘 일인 듯하외다.
“어차피 운명이 정해진 가문을 핍박해서 뭐에 쓰겠습니까? 중요한 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니 말입니다.”
나는 다케다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 사이에서 벌어진 역설적인 일에 웃음을 참지 못했고, 오다 노부나가는 내 무용담에 감탄했다.
한참을 그런 실속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오다 노부나가가 다실 한 켠에 놓여 있던 장식물을 가리켰다.
“혹시 쿠보는 바둑을 둘 줄 아시오?”
비록 내가 이 저택의 주인이기는 했지만, 아직 전 소유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저 바둑판 역시 그중 하나인 것 같았다.
“흠, 저건 원래 여기 있던 물건인 모양입니다. 바둑은 즐겨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두는 법은 조금 알지요.”
이 시대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것이 정말 드물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로 살면서, 그리고 지위가 오르면서 교양의 일부로 다소 익혀둔 상태였다.
“그렇다면 한번 제대로 배워보시겠소? 위기(囲碁)를 잡기라고 부르지만, 무사에게는 제법 도움이 되는 취미요.”
그러고 보니, 오다 노부나가도 취미가 바둑이라고 했던가. 처음보다 약간 들뜬 모습이었다.
“잘 두시는가 봅니다.”
“묘리가 무궁무진한데, 감히 잘 둔다고 할 수야 있겠소. 그저 즐길 뿐이외다.”
굳이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인으로서 접대하는 차원에서 바둑판을 꺼내왔다.
선을 가린 결과, 내가 백을 잡게 되었다.
바둑을 둘 때, 보통 네 귀퉁이를 선점하고, 그 다음은 모서리에 경계를 그으며, 마지막으로 중앙을 다툰다.
그런데 첫수는 상식과는 맞지 않는 지점에 놓였다.
나는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입니까?”
예전에 사극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첫수를 중앙에 놓고 천하인입네 하던 게 떠올랐다.
물론 실제로는 태합기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흉내바둑이었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성격상 그런 잔재주나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반응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지, 태연하게 답했다.
“선을 잡을 때는 항상 이렇게 둔다오.”
이후의 바둑은 상식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천하에 기인으로 알려진 다이묘는 첫수만 천원점에 놓았고, 나머지는 평범하게 두었다.
실력의 격차는 확연했지만, 시간 제한은 없는 상황. 덕분에 형세는 대등한 국면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포석이 대강 놓인 다음에는, 그 첫수가 불편한 걸림돌로 작용했다.
“허어······. 저 한 점이 이렇게나 압박이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나 역시 선을 쥐지 않았다면, 당연히 귀부터 놓았을 것이오. 어차피 바둑이란 번갈아가며 두는 법이니, 이왕이면 넓은 곳을 선점하는 게 좋다고 여기는 바요.”
반상의 외곽을 흑과 백이 똑같이 갈라먹은 상황에서는, 결국 세력을 어떻게 투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천원에 놓인 흑돌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창인 동시에, 침입을 견제하는 방패의 역할을 수행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하의 한복판······.”
“그렇소. 나는 천하의 중심에 서고 싶었소이다.”
그 한마디를 들은 오다 노부나가가 무심코 말했다.
계속 고민해보았지만, 저 공수 겸전의 요충지를 처리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화점보다 한 칸씩 바깥쪽인 삼삼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록 21세기의 나는 바둑에 문외한이었지만, 한 가지 법칙을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 사귀생은 필승이지.
- 왜? 가운데가 저렇게 넓은데.
- 보면 알겠지만, 모서리는 집을 짓기가 쉬워. 그리고 중앙은 한 군데라도 뚫리면 엄청나게 삭감되거든.
백이 흑의 집 안쪽으로 깊이 침투하자, 상대는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너무 깊이 들어오는 게 아니오?”
“중앙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은데, 그나마 넓은 자리잖습니까?”
나는 네 귀퉁이를 모두 차지하고, 가운데를 창으로 찌르듯 뚫어댔다.
실리와 세력,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는 없었다. 백이 안전한 집을 얻는 만큼, 흑의 장벽도 두터워져갔다.
승패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두다 보니, 문득 이 바둑이 나와 오다 노부나가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군을 포섭하고 천하를 차지하려는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땅을 넓히려는 대신, 실리를 챙기는 나. 그 모습이 고스란히 반상 위에 나타났다.
“흐음······. 어렵구려.”
상대가 푸념하듯 혼잣말을 하더니, 승부수를 띄웠다.
중앙에 뛰어든 내 대마 하나가 뿌리와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승패는 이 말의 생사에 걸려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쌈지떠서 살려야 했고, 노부나가는 파호(破戶)를 쳐서 죽이려 했다. 그러다가 패가 걸리고 말았다.
“이거야 원······.”
패. 양측의 돌이 한 점씩 맞물려서 서로 딸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규칙상, 이런 경우에는 따인 쪽이 다른 곳에 한번 두어야 다시 따낼 수 있었다.
어지간하면 돌 하나의 가치는 내버려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백 대마의 생사가 달린 상태였다.
그렇게 열중하고 있는 동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날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버티기가 어렵군요.”
나는 이걸 흑이 이긴 셈치고 그만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처럼 재미있는 판이 나왔는데, 허망하게 끝내서야 되겠소이까. 명인들은 승패를 가리기 위해서 사흘 밤낮을 매달리기도 했다니, 우리가 그렇게 못할 게 무엇이겠소.”
결국 바둑판 옆에 저녁상을 차려놓고 먹으며 두기로 타협해야 했다.
시간 제한이 없다는 점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쨌든 바둑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치열한 과정이 무색할 정도로, 엉뚱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생사를 다투던 내 대마에 패가 세 개가 걸렸다.
이런 경우는 삼패라고 한다. 다른 곳에 한 번 놓고 다시 따야 하는 원리상, 이 세 군데의 패를 교대로 놓기만 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
“무승부구려.”
“무승부군요.”
나와 노부나가는 입을 모아 탄식했다. 서로 머리가 터지도록 둔 바둑의 끝이 허망할 지경이었다.
“날이 너무 늦었으니, 이만 마치지요.”
더 두자는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정리해버렸다. 이미 달이 중천에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손님도 더는 뻗대지 않았다.
“그리 합시다. 제법 재미있는 바둑이었소.”
* * *
오다 노부나가는 아주 늦은 시간에 자신의 저택으로 귀가했다. 모두가 잠자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히데요시는 심부름으로 먼 길을 다녀온 상태였다. 당연히 피로한 상태였지만, 그는 자기 주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쿠보와 바둑을 두다가 조금 늦었다. 제법 잘 두더군. 다녀온 일은 어찌 되었나?”
“모리 가문에서는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습니다. 테루모토부터가 쿠보에게 호의적이었던지라······.”
그 말을 들은 오다 노부나가는 혀를 찼다.
지금은 다소 위축되었다고는 해도, 서국 제일의 세력은 모리 가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히데요시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의 협조는 어려운 듯했다.
“오토모 가문은 어떠했는가?”
“오토모 소린은 주군의 제안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가 마츠라토(松浦党송포당)라는 자들을 주선해주었습니다.”
보고를 듣던 노부나가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히데요시가 마츠라토와 만나고 돌아온 건 목표를 초과달성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쓰라토라면, 큐슈 서쪽의 해적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마츠라토의 우두머리가 말하기를, 수군을 재건할 돈만 마련해준다면 얼마든지 싸워주겠다고 했습니다.”
원래 마츠라 가문은 쓰시마의 소 마사모리와 연계하여 조선을 약탈해왔다. 그러다가 고니시 수군의 순찰대에 박살나버리고, 지금은 숨을 죽이며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이를 갈고 있었고, 오다 노부나가는 적절한 시점에 나타난 후원자나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대로 가져다 쓰도록. 성과만 가져오면 얼마를 사용해도 따지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