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불화의 씨앗 (5)
상황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육만? 정말 육만이라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다케다 신겐은 이번 침공이 종종 있었던 경우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접한 정보는 그것이 착각임을 일깨워주었다.
“겐신, 그 자가 아무리 긁어모아도 삼만을 넘길 수가 없거늘, 대체 무슨 수로!”
“아시나와 다테, 거기에 안도(安東안동) 가문까지 합세했다 하옵니다.”
모두 동북면에 박혀 있던 무가들이었다.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우에스기 겐신은 생각보다 빠르게 복속시키고 심지어 그들의 병력까지 이끌어냈다.
처음에 약 일만오천이 묘코산을 넘어왔다고 했을 때는, 직할부대로도 넉넉히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실제로 두 차례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은 그게 가능했다.
지형의 유리함에 기대어, 큰 손실 없이 적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에스기 군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 어느새 삼만을 헤아릴 정도로 불어난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무사들에게 전령을 보내서 집결을 독촉하라. 너무 늦으면 위험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대치하고 있는 적의 규모는 삼만에 이르고도 계속해서 불어났다. 그때서야 의심을 품기 시작한 다케다 신겐은 닌자를 동원해 에치고를 샅샅이 살피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후방에 이만이 더 있음을 밝혀냈다. 시나노가 넓기는 해도 대부분이 산지라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인 카이와 합쳐도 삼만을 소집하는 게 한계였다.
“내가 속았구나!”
자신이 카이의 호랑이라면, 겐신은 에치고의 용이었다. 그만큼 둘은 별명조차 대구를 이룰만큼 맞수로 유명했다. 당연히 이마가와를 칠 때, 에치고의 정세를 꾸준히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에스기의 군세는 에치고를 넘어 동북면 전역에서 꾸역꾸역 들어왔다. 겐신의 영지 사정에만 집중하다보니, 미처 그 너머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기요스 성으로 구원을 청해라. 적은 육만이라고. 겐신이 동북면을 모두 복속시켰다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워도, 머리는 제법 돌아가는 자였다. 그도 사태를 파악한다면 잔재주는 부리지 않을 터. 하지만 그렇게 동맹에게 응원군을 요청해도, 앞일을 장담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안되겠다. 가와나카지마는 버린다. 시나노의 험한 지세에 의지해 막을 수밖에.”
신겐은 동맹의 지원이 늦어지거나, 혹은 기타 다른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시나노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 우선 아라토 성으로 물러난 뒤, 사자를 보내 겐신에게 담판을 하자는 전언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상당히 강한 어조를 담고 있었다.
- 간토 간레이의 정당한 자격으로 명한다.
내 휘하에 들어오라. 그리고 그 증거로 시나노를 내어놓고, 적남 카츠요리를 카스가 산성에 인질로 보내라. 그렇다면 가문의 보존은 허락하겠다.
이 서신을 받은 다케다 신겐은 낯빛이 시퍼래졌다.
잠시 고개를 숙이는 수치쯤이야. 그리고 시나노는 진즉 포기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신겐에게는 적남이 셋 있었는데, 하나는 일찍 죽었고, 둘째는 눈이 멀어서 후계자로 세울 수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다른 가문에 양자로 보냈던 셋째 카츠요리를 가문에 복귀시켰는데, 지금 우에스기 겐신은 그 셋째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기어이 끝장을 내려는 것이로군.”
당장 코앞의 병력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더 밀고 내려올 후속 병력까지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설상가상으로, 시나노의 호족들이 소집을 거부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그들도 대세가 어디로 기울었는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전쟁은 머릿수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상황은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순망치한의 이치를 아는 자. 하지만 그도 아사쿠라 가문과 싸우고 있다고 하니 지원군을 많이 보내 주지는 못할 터였다. 아마 오천쯤 오면 다행일까.
게다가 시나노의 호족들이 이탈하면서, 이만을 기대했던 추가 소집 병력은 삼천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그들의 군세가 저쪽에 더해질 걸 생각하면 병력 수의 격차는 훨씬 커진 상태였다.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수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군.”
다케다 신겐이 추측하기에, 우에스기 겐신이 안고 있는 약점이 하나 있었다. 결속력. 겐신이 직접 이끄는 부대는 본래 영지인 에치고 출신이 전부일 터. 우두머리의 목만 딸 수 있다면, 침공은 중단될 게 뻔했다.
그리고 신겐은 겐신의 성품을 잘 알았다.
“뒷일은 후대에 맡기고, 나는 마지막 풍류를 즐기려 한다. 카이의 무사들이여, 나를 따르겠는가!”
* * *
아시나 모리오키(蘆名盛興노명성흥)와 다테 하루무네(伊達晴宗이달청종)는 다케다 군의 진영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굳이 저걸 상대해야 한다니······.”
“간토 간레이의 뜻이니 따를 수밖에요.”
며칠 전, 적장이 서신을 보내왔다. 단 한번의 싸움으로 승패를 가리자는 내용이었다. 신겐이 지목한 장소는 스와 호수였다.
우에스기 군에 참가한 다이묘들은 모두 다케다 신겐을 비웃었다. 그리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스와 호수는 갈림길에서 카이로 난 길의 반대편이었다. 카이는 다케다 가문의 핵심 영지. 그곳을 짓밟아버리면 신겐은 갈 곳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간토 간레이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 말도 안 됩니다!
- 이대로 카이를 향해 진격하면 다케다는 끝날 겁니다.
그러나 겐신은 그들의 반발을 일축했다.
- 우리가 불리할 게 무엇인가. 카이의 호랑이가 자신의 명예를 내걸고 결전을 청해왔으니, 응당 따라주는 것 또한 무사의 명예.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케다 신겐의 숨통을 끊을 기회로다.
북방 연합의 목표는 난신적자들을 토벌하고,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 잡는 것. 고작 시나노 정벌이 끝은 아닐 터였다.
물론 동북면의 다이묘들은 그런 대의명분보다는 남쪽의 풍요로운 땅을 더 원했다.
그동안 척박하고 추운 환경은 곧 그들의 감옥이었다. 하지만 겐신이 내보인 감자 덕분에, 그들은 마음 놓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일으켰다.
그렇잖아도 동북면의 무사들은 서로의 항쟁에 지친 상태였다. 서로 혼인을 맺고 동맹을 체결했다. 그런 중에 들어온 우에스기의 제안은 지긋지긋한 북방을 벗어날 좋은 기회였다. 당연하게도, 욕망을 앞세운 자들은 소모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 겐신의 결정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다케다의 본거지를 빼앗는다 해도, 신겐 같은 명장에게 행동의 자유를 허락하는 건 위험했다.
명분과 합리성 모두 겐신이 앞섰기에, 모든 무사가 그 뜻을 따랐다.
그런 이유로, 지금 북방연합군은 스와 호수를 등진 다케다 군과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우에스기 겐신은 적진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역시 적비대를 이끌고 왔나.”
동북면의 무사들은 대부분 다케다 가문의 정예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도, 붉은 갑옷의 무사들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저게 다케다 가문의 적비대입니까?”
“그렇네. 역시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적비대의 명성은 승마를 이용한 기동성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전투력이 낮은 건 결코 아니었다. 원래 싸움은 말에서 내려서 하는 법. 신겐이 이끄는 적비대는 일본 최강의 부대 중 하나였다.
우에스기 군은 차륜전으로 다케다 군의 소모를 강요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케다 군의 위치가 너무나 좋았다. 좁은 협곡이라 측면이 차단되는 지형에서, 호수를 등지기까지 했다. 도저히 숫자의 우위를 살릴 수 없는 포진이었다.
처음에는 적비대를 얕본 몇몇 무사들이 선봉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적의 체력을 빼놓기는커녕, 사기만 올려주고 도망치다시피 했다. 그리고 나머지 다이묘들은 휘하의 병력을 아꼈다.
“간레이, 너무 피해가 크오.”
싸우면 싸울수록 오히려 다케다 군의 힘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 기세에 질린 동북면의 다이묘들은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내고 물러났다.
겐신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만든 건 결국 그 누구도 아닌 겐신 본인. 직접 나서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일 터였다. 비록 대군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기를 끌어올리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좋다. 내 직접 나서도록 하지.”
오랜 악연을 끝내기 위해, 우에스기 군의 총지휘관이 직접 앞으로 나왔다. 용(龍) 자가 쓰인 깃발. 에치고의 용을 상징하는 겐신의 돌격신호였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다케다 신겐 역시 눈을 빛내며 각오를 다졌다.
“드디어 목표가 나타났다! 모든 무사는 이 일격에 전부를 걸어라. 뒤는 돌아볼 필요 없다.겐신의 목만 취할 수 있다면 이 싸움은 우리의 승리다!”
각오의 무게는 겐신 역시 상대 못지않았다.
“드디어 카이의 호랑이를 잡을 기회가 왔다. 전군 돌격하라!”
다케다 군은 아껴놓았던 힘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오직 겐신을 죽일 수만 있다면, 이 싸움은 그들의 승리였다.
간토 간레이는 예상대로 거센 저항과 마주했지만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연합의 수장으로서, 이익에 매달리는 그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힘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게 결국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하는 행위였다.
“저기 겐신이 있다!”
그 한마디에 붉은 갑옷을 입은 모두가 달려들었다. 겐신과 그 친위대는 갑자기 몰려드는 적을 막으려 했지만, 목숨마저 도외시하는 공격을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마침내 다케다 신겐은 목표를 달성했다.
“겐신은 죽었다!!!”
그는 적장의 목을 잘라 사방에 내보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겐신은 죽었다. 이제 너희들의 우두머리는 없다. 그러니 어서 흩어져라.
목소리에는 그런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과연 뒤에서 지켜보던 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낭패가 아닌가.”
“어서 후퇴합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당장 신겐의 목숨부터 끊어야 하오!”
우에스기 군의 무사들이 모두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테 하루무네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돌격했다. 다테 가문은 동북면 혼맥의 중심. 그런 가문의 주인이 앞장서자 동북면의 무사들은 진정하고 다시 전열에 섰다.
이미 겐신을 참살하고 긴장이 풀린 다케다 군은 그에 맞설 기력조차 없었다.
신겐 역시 칼을 휘두를 힘조차 남지 않은 상황에서, 체력을 온존하고 있던 다테 군을 상대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각오는 했지만, 크윽······.”
그렇게 관동의 두 거인이 한날한시에 쓰러졌다.
카이의 호랑이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에치고의 용을 데려갔다. 하지만 의외의 변수로 그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하루무네의 활약으로 우에스기 군은 뿔뿔이 흩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뒤, 우에스기 진영의 무사들은 한데 모여 앞날을 논의했다.
전임 간토 간레이이자 겐신의 양부인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이대로 전쟁을 끝내자고 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모두들 돌아가셔도 좋소이다.”
하지만 다테 하루무네를 비롯한 동북면의 무사들은 오히려 계속 싸우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우에스기 가문을 맹주로 받들겠소. 새로운 간토 간레이를 세우고 상락을 계속합시다!”
“옳소!”
명목상으로는 우에스기 겐신의 뜻을 내세웠다. 하지만 실상은 탐욕만이 숨어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지금 돌아가면 다시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독을 먹으려거든 접시까지 핥아야 하는 법. 육만, 아니 이제는 시나노의 호족들까지 끌어모은 칠만오천의 군대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숫자였다.
임시로 우에스기의 가독을 맡은 노리마사는 욕망을 앞세운 동북면의 무사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했다.
후보는 둘. 하나는 겐신의 외조카이자 양자인 나가오 아키카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호조 가문에서 인질 겸 양자로 보낸 우에스기 카게토라였다. 순서만 놓고 보면 우에스기 성을 쓰는 카게토라 쪽이 우세했다.
하지만 동북면의 다이묘들로서는 생부가 멀쩡히 살아있는 카게토라보다는 기댈 곳이 없는 아키카게가 더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가오 아키카게를 입적시키시오.”
욕심에 눈먼 자들의 칼날 앞에서, 우에스기의 임시 가주는 무력했다. 무사들의 요구대로 나가오 아키카게를 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이름을 우에스기 카게카츠로 고쳤다.
이제 북방의 군세는 욕망의 깃발 아래 남하를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