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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47화 (47/225)

47화 낙일, 그리고 여명 (10)

휴전에 합의하고 두 달 뒤, 미요시 요시츠구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사카이로 들어왔다.

“쇼군을 뵙습니다.”

지금의 쇼군은 자신의 이복형이 참살당한 뒤, 얼떨결에 승계한 자였다. 하지만 그도 명색이 무가의 동량이라는 것인지, 나름대로 기품과 재기가 엿보이는 편이었다.

그리고 가신에게 쫓겨난 당주. 미요시 요시츠구도 일세의 걸물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전임자였던 미요시 나가요시에 비하면, 교활함보다는 강직함이 더 드러나는 인물 같았다.

둘의 사이는 의외로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자네가 사카이의 오도시요리로군. 관위는 니시이치노스케라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나름 내게 친근감을 표했지만, 미요시 요시츠구는 그저 지친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가신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다가 남의 힘으로 겨우 돌아온 셈이었으니, 그만큼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통 쇼군인 요시아키와 미요시 요시츠구는 자기 자리를 되찾아 교토로 복귀하기로 했다.

삼인중이 옹립한 아시카가 요시히데는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은 채, 처형으로 운명이 정해졌다.

정작 사태를 주도한 당사자들은 각자가 석고를 감하는 대신, 다른 처벌은 받지 않기로 했다.

츠츠이 준케이는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그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영지를 매입하여 야마토국 전체를 지배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그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자신의 옛 주군에게 사직서를 내고 내 휘하의 장수로 들어왔다.

그와 그의 수하들, 그리고 시마 사콘은 조금씩 봉록을 올려받았다.

대신 토지가 없어서 사라진 의무만큼 급여의 일부를 공제하기로 했다.

무사가 주군의 소집에 응할 때는 자신이 직접 군비를 들여야 했고, 영지의 개발이나 부하를 먹여살리는 비용도 전부 토지 소유자의 몫이었다.

그런데 내 휘하에서는 그럴 일이 없이 온전히 봉록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만큼 반납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실수령액은 전체 봉록의 약 오분의 일 정도가 되었다.

졸지에 내가 세련된 형태의 병농분리를 구현하게 된 모양새였다.

“골치아픈 일이 줄었군.”

모든 것이 결정난 다음,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그렇게 평가했다.

“그렇다 해도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를 것 같았습니다만······.”

토지는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자산이라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 상당한 반발을 예상했는데, 그 휘하의 모든 무사들이 선선히 받아들였다.

내가 그 부분을 물어보자, 신선한 답변이 돌아왔다.

“호랑이 새끼는 호랑이여야지, 가죽을 뒤집어쓴 개새끼가 되어서야 되겠나?”

후대의 지위는 스스로 유지하게 해라. 그게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부하들을 설득한 논리였다. 자수성가한 다이묘가 할 법한 이야기 같았다.

그중에서도 야규 무네요시가 좋아하는 게 눈에 띄었다. 검술도장에 온전히 신경을 쏟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던가?

마을에 신카게류의 도장이 생겨서 나쁠 건 없었기에, 나로서도 대환영인 일이었다.

*       *       *

이제 모든 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미요시 요시츠구가 조용히 찾아왔다.

“미요시 이치노스케.”

그는 나를 고니시가 아닌 미요시라고 불렀다.

“자네를 다이로(大老, 고위 가신)로 세울 참이네. 그렇게 불리기엔 연치가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자네 정도의 수훈자라면 반발은 적겠지.”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내 휘하로 소속을 옮긴 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여전히 삼인중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 나를 대항마로 세우려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한 가지를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미요시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사카이의 대표 자격으로서 미요시 가문의 내전을 중재했던 것일 뿐, 공식적으로 전대 당주의 사위임을 내세웠던 적은 없었다.

여전히 요시히메는 미요시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고, 본인도 굳이 가문에 복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와지 섬? 어차피 내전 중에 내가 힘으로 차지했다고 해서, 막을 자가 있었을까.

“제가 다이로직을 수락하면, 다음은 삼인중 대신 저와 사쿄다이부의 내전입니까?”

“그건······.”

예상 밖의 답을 들었기 때문인지, 요시츠구는 멍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올라간 어조를 낮추고 은근하게 말했다.

“전대 당주셨던 슈리다이부(미요시 나가요시)는 물론이고, 사쿄다이부께 위협이 되었던 자들이 누구신지 생각해 보시지요. 저는 그런 자들과 같은 위치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네 부하가 아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속뜻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당주의 가신이 될 생각이 없었다. 당주 자리도 마찬가지. 무사라는 족속은 상당히 피곤한 존재였다.

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골치 아픈 일에 얽매이느니, 각자 갈 길을 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츠나가 히사히데처럼 뜻이 맞는 사람이 나오면, 그들과 같이 갈 의향은 있었다.

미요시 요시츠구가 어떤 길을 택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제 내게 강요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혈족에게 뒤통수를 맞으셨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습니까?”

나는 반쯤 빈정거림을 섞어서 이야기했지만, 요시츠구로서는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아타기 무네시게의 최후는 잘 알려진 편이었다. 원 역사에서는 억울하게 자결했지만, 지금은 반역을 꾀한 배신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의 당주에게 반기를 들었던 삼인중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거야 원······. 차기 미요시 당주는 어떤 자일까 싶었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군.”

밖에서 들려온 말소리가 긴장의 끈을 싹둑 끊어 버렸다.

말을 내뱉은 자는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불쑥 들어왔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 형의 죽음으로 쇼군직을 승계한 자. 그는 밖에서 나와 당주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쿄다이부는 자네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고 은거할 참이었지. 아직 기회는 있네. 어찌할 텐가?”

“제 생각은 변함이 없사옵니다.”

내 말을 들은 쇼군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평민은 무사가 되기를 원하고, 무사는 영주가 되기를 바란다. 영주는 다이묘의 자리를 꿈꾸고, 다이묘는 천하를 호령하고자 한다.

이런 세상의 이치로 보면, 나라는 존재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미요시도 겐지(源氏원씨)의 일원인데, 그걸 걷어차 버리다니······. 이런 인사는 또 처음이로세.”

물론 조선에서는 그렇게 명함을 내민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바다 건너의 먼 나라는 내가 겐지가 아니라 미야케(宮家궁가, 황족)를 자처했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의 내 자리는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특수한 혈통에 의한 권위 따위는 무의미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원하는 건 뭔가?”

쇼군에게는 내가 바랄 것이 없었다.

내 지위는 이미 굳건해졌고, 사카이도 미요시나 쇼군의 손을 벗어난 지 오래. 뭔가를 더 받아봐야 불필요하기만 했다.

“무엇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 질문을 듣자 요시아키는 하늘을 쳐다보며 웃어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웃음기를 가라앉힌 그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그렇게 되물은 쇼군은 일필휘지로 문서 하나를 써내려갔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인(朱印)을 찍어 수결한 뒤, 내게 내밀었다.

“자네는 오늘부터 사카이의 쿠보(公方공방)일세.”

“그게 무슨······?”

일본의 각종 벼슬과 역직은 가문의 격에 따라 받을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쿠보라는 자리는 쇼군의 일족, 그러니까 아시카가 가문이나 그 방계만이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내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역대 쿠보들 중 상당수는 쇼군이 직접 임명한 게 아니지. 그저 쇼군의 자리를 탐낸 자들이 중간에 거쳐 갈 계단으로 삼았을 뿐이야.

하지만 이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 쇼군인 이 몸이 직접 임명한 거다.”

“반발이 거셀 겁니다.”

“이 몸은 신경 쓰지 않는다. 자네도 그 정도는 견디도록. 괘씸한 언사를 했으니 벌도 받아야 균형이 맞지 않겠나.”

그런 걸 처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냥 나를 쿠보로 임명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에 불과했다. 쇼군은 이미 생각을 굳힌 것 같았다.

“명가라는 자들은 모두 이 몸을 돕기는커녕 외면하기만 했다. 그나마 도움을 준 것이 오다  노부나가, 그리고 자네였지. 재밌는 일이더군.”

가까운 피붙이일수록 경쟁자가 될 뿐, 결코 친족으로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 교토에서 도망 나와 천하를 떠돌던 요시아키는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비록 내가 요시아키를 위해서 중재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결과에 주목한 것 같았다.

“옛 법도나 붙들고 불가하다, 무리다 짹짹거릴 놈들은 짹짹거리라고 해. 그들이 막부에 보태준 게 뭐란 말인가.”

나는 그걸 수락하려다 문득 와타다 오리시로를 떠올렸다.

그는 내가 아와지노카미(종5위하 淡路守담로수)가 된 걸 의심했다.

아마 쇼군의 일족만이 받을 수 있다는 쿠보직을 얻는다면, 또 누군가가 내 행보를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무사들과 같은 족속으로 비치게 될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 불쾌했다.

“쇼군,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는 흔쾌히 내 말을 듣겠노라고 했다.

“소인이 개인적으로 쿠보를 받는 게 아니라, 사카이의 오도시요리를 쿠보로 끌어올리면 어떻겠사옵니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나는 그에게 오도시요리처럼 쿠보를 신분에 관계없이 선출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미 쿠보직이 쇼군이 되기 위한 과정 취급을 받는다면, 아예 그 위치를 평민도 될 수 있는 지위로 끌어내리자고 한 것이다.

혈통을 믿지 않게 된 쇼군은 내 주장을 주의 깊게 들었다.

“흠······. 나쁘지 않군.

하지만 삐뚤어지게 보는 자들은 평민도 쇼군직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할 걸세.”

“역대 쇼군 중에서 덴노의 어좌를 탐내던 자들은 어찌되었사옵니까?”

덴노는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미야케와 4대 본성을 분리시켰다. 그 조치는 21세기까지도 유효했다.

내 이야기는 그 이치를 쿠보에도 적용시키자는 것이었다.

“쇼군과 쿠보를 영영 분리시키자는 말이로군.”

“그렇사옵니다.”

쇼군과 미요시 요시츠구는 납득할 만한 답을 얻고 돌아갔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미래의 어느 대원군과는 다른 의미로,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을 생각을 내보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한 말에 의하면, 그 시범이 될 자들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다.

나와 오다 노부나가. 다른 이들을 더 끌어들일 수도 있겠지만, 당장 나온 이름은 이 두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짐을 하나 떠안은 기분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쇼군은 그를 중히 쓰겠다 했지만, 그 역시 야심에 불타던 영걸 중의 하나였다.

“기어이 이렇게 되고 말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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