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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45화 (45/225)

45화 낙일, 그리고 여명 (8)

소이는 사카이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형상의 성벽은 기괴하게 느껴졌지만, 낮게 지어진 모습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해자가 공성에 장애물이 될 것으로 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라 했던가.”

그 또한 미요시 나가요시의 가신 중 하나였다. 벼락출세한 꼬마 상인 녀석의 이야기는 가신들 사이에서도 나름 유명했다.

“그 맹랑한 놈이 사카이를 장악했다더니, 애먼 사람들까지 지옥으로 끌고 갈 셈인 것 같군.”

토벌군의 목표는 원래 아와지의 스모토(洲本주본) 성이었다. 전략적으로 보면, 사카이는 수성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이는 당연히 고니시 유키나가가 바다를 건너 도망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어리석은 상인 놈들이 멋대로 일을 꾸미다가 설 건드려놓은 탓에, 마을 전체가 돌아선 모양이었다. 소이는 이 또한 나쁘다 여기지는 않았다.

덕분에 바다를 건너는 수고도 덜 수 있었고, 제대로 지어진 아와지의 스모토 성보다는 저 엉성한 성곽을 넘는 게 훨씬 손쉬운 일이 되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성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를 바라보았다. 미요시 나가요시가 일구어놓은 군대의 대부분은 고스란히 삼인중이 움켜쥐고 있었다.

비록 중추에 해당하는 무사들은 대부분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이끌고 달아났지만, 싸움이란 머릿수가 많을수록 유리한 법. 오랫동안 살아남은 아시가루도 숫자가 모이면 봉록을 받는 무사 못잖게 잘 싸웠다.

“오늘은 마을을 포위만 하도록. 그리고 시노하라 공은 접근해서 다시 한번 항복을 권해 주시게.”

“그리하지요.”

호명받은 장수는 시노하라 나가후사라는 자였다. 그는 원래 미요시 짓큐의 가신이었으나, 삼인중이 새로운 쇼군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총지휘관의 지시를 이행하고 돌아온 부장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보고를 올렸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성문을 열어 항복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저항할 생각인 듯합니다.”

“기어이 피를 봐야겠다면 그리해 주어야겠지. 오늘은 푹 쉬게 하고, 내일 전군을 휘몰아 공격한다.”

첩보에 의하면 적어도 이천 이상의 정병과 경비대라는 별도의 부대도 있다고 했다.

공격하는 입장에선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총대장 본인과 안면이 있었던 상인의 말에 의하면, 경비대도 족히 일만을 채웠다는 것 같았다.

성을 공격하려면 적어도 세 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고려했을 때, 결코 경시할 수 없는 규모라고 할 수 있었다.

사카이를 눈앞에 두고, 소이는 휘하의 장수들과 동맹을 불러 모아 작전을 논했다.

“해자는 제법 신경이 쓰이오만, 성벽이 저리 낮으니 정공법으로 치려 하오.”

전체 전력으로만 놓고 본다면, 그래도 이쪽이 우월했다.

원정을 나온 입장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함락시키는 편이 나았다.

“츠츠이 공은 적과 맞붙어 본 경험이 있으니, 혹여 주의해야 할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해 주시기 바라오.”

야먀토의 주인이 된 츠츠이 준케이는 원래 선봉으로 먼저 사카이를 향하기도 했고, 지금도 삼인중의 동맹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가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소이의 진영에서 유일하게 고니시 군과 맞붙은 경험을 지닌 자이기도 했다.

총지휘관의 권유를 들은 다이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지난 싸움을 떠올렸다.

허망하게 박살나 버린 이천여 군세. 그리고 적의 위압감에 얼어붙은 나머지 그대로 회군을 결정했던 당시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비참하기만 했다.

“한 가지만 당부를 드리자면, 절대 밀집 대형을 취해선 안 됩니다.”

적의 철포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발사음은 수십 회에 불과했는데, 적진에 접근하던 아군은 수백이 우수수 쓰러졌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적의 철포는 흡사 전설 속의 요괴, 오로치가 내뿜는 화염과도 같다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정신착란을 일으킨 자들이 내뱉은 헛소리 중 일부를 종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츠츠이 본인이 언덕에서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역시 믿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그 위력을 겪어 본 입장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조언할 수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병사들의 강철같은 대오야말로 전장에서 믿을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거늘, 츠츠이 공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혹여 미천한 상인놈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첫 전투랍시고 벌인 짓도 결국 아군을 현혹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싶소이다.”

소이는 총대장으로서, 좌중을 진정시키고 츠츠이 준케이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것뿐이오? 달리 조언하실 건 없으신지?”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던진 소이 본인마저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야마토의 다이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이견은 없는 걸로 알겠소이다. 각자가 맡은 자리의 공략에 힘써 주시오. 군의는 이만 마치리다.”

*       *       *

다음 날, 사카이를 포위한 군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고니시 군을 한번 겪어 본 다이묘의 조언은 무시당한 상태였다.

공성 측은 습관대로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방패를 앞세워 성곽에 접근했다.

쿠쿵······!

쿵······!

성벽에서 거대한 포성이 울려퍼졌다. 철포의 콩 볶는 듯한 소리보다도 훨씬 묵직한 폭발음이었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소리에 병사들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을 이끄는 무사는 소리만 요란할 뿐이라며 칼을 빼들고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휘리릭.

그리고 쇠사슬이 공격 측의 군세로 날아들었다.

“끄아악!”

“사람 살려!”

철쇄가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들이 믿고 있었던 방패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팔이나 다리가 한 짝씩 잘려 나간 경우는 차라리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 신체의 어느 부위일지라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상 멀쩡할 리 없었다.

제대로 갑옷을 갖춰 입은 무사도 압도적인 질량의 폭력을 버텨내지 못했다.

아무리 최신식의 갑옷인 도세이구소쿠(当世具足당세구족)이라 하더라도, 거대한 쇠채찍 앞에서는 가루가 될 뿐이었다.

츠츠이 준케이의 조언을 떠올린 어떤 무사는 병사들에게 산개를 명했다.

“모두 대여섯 보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나를 따르라!”

밀집 대형이 흩어지자, 포격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방어 측으로서도 화약을 마구 소모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선봉의 뒤를 따르던 자들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똑같이 부대의 밀집도를 낮추어 돌격했다.

해자에서도 눈먼 탄에 맞아 쓰러지는 자들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성벽 아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벽 아래의 사각지대라 생각했던 곳은 결코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컥······!”

“여길 대체 무슨 수로 쏜단 말인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자들은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보고 나서야, 탄환이 어디에서 날아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래된 무사들의 경험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숨을 곳을 찾아도, 성곽의 돌출부에는 몸을 숨길만한 장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들은 조공의 역할을 맡아 수비군의 화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제 역할을 다한 셈이었다. 사카이 마을의 성문은 아예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된 지 오래였다.

“성문이 코앞이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게야?”

“저걸 보십시오. 성문에 다가간 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 겁쟁이가!”

성문의 공격을 지휘하던 한 무사는 겁을 집어먹은 부하를 즉시 참해 버리고, 손수 파성추를 밀기 시작했다.

콰쾅!

성문 주변의 화포가 불을 뿜자 새알 크기의 쇠구슬이 우르르 쏟아졌다. 파성추는 형태를 남겼지만, 그걸 밀고 가던 사람은 시신조차 온전치 못했다.

본진에 가설한 망루에서 이런 전황을 지켜보던 소이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되겠군.”

그는 옆에 서 있던 츠츠이 준케이를 슬쩍 보았지만, 그 또한 참담한 기색을 감추지 않을 뿐, 달리 뾰족한 수는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공성를 중단하라.”

뿌우······.

퇴각 신호인 나팔소리가 들리자, 삼인중의 군대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고니시 군은 화약을 아끼기 위해 후퇴하는 자들을 순순히 보내주었다.

*       *       *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어. 고작해야 몇 명이 생채기가 났을 뿐이야.”

“쓰러진 시신을 가늠해 보니, 대강 오백에서 일천쯤 되는 것 같았소. 아마 중상을 입은 자들은 훨씬 많을 거요.”

스즈키와 마츠나가가 전과를 보고했다. 서전의 성과는 제법 괜찮았다.

요격전과 비교했을 때, 제법 많은 수가 살아서 돌아갔다는 건 아쉬웠다. 하지만 이쪽은 개활지고, 당시는 협곡에 몰린 적을 상대했다는 차이를 감안해야 했다.

삼인중의 군대에는 대포가 없었다. 약간 큰 구경의 대철포는 간간히 눈에 띄었지만, 그 위력은 유의미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철포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고, 적 병력 중에서 그걸 갖춘 자들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었다. 화살 정도는 방패나 여장 뒤에 숨는 걸로 피할 수 있었다.

이대로 접근을 허용하지만 않는다면, 무난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사슬탄이 의외로 전과가 좋은 편이었소이다.”

마츠나가는 회심의 신무기를 높이 평가했다. 내가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슬탄 하나가 적 수십이 밀집한 대오를 날려버리는 모습은 실로 처참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멀면 사슬탄이, 가까우면 산탄이 목표를 찢어버리는 광경에 적이 움츠러든 것도 한 몫했다.

첫 단추는 잘 꿴 셈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으로 적이 선선히 중재에 응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음 전투를 위한 휴식을 지시했다.

“적병의 숙련도가 높다 했으니, 야습을 감행할지도 모릅니다. 병사들을 교대로 쉬게 하고, 성벽에도 횃불을 환히 밝혀 경계 태세를 유지하세요.”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어도, 적은 굳게 포위를 지키고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째 되던 날, 적진에서 낯선 수레가 보였다.

“저거 쇠뇌 아니야?”

스즈키의 말대로, 삼인중의 군대가 꺼내온 것은 쇠뇌였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적군 중에서도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은 있는 모양이외다.”

마츠나가는 적의 계책을 대단히 흥미롭게 여겼다.

“설마 했지만 역시 상자노를 사용할 줄이야. 나 역시도 저게 실전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오. 아무래도 골동품을 복제한 모양이군.”

발리스타를 상자노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혹시 언젯적 물건인지 아십니까?”

“글쎄······.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을 거요. 옛날에는 나름 유용했다고 들었는데, 성들이 죄다 산에 지어지면서 도태되었다던가?”

사카이는 주변에 산이나 언덕이라고 할 만한 지형이 없었다. 상대는 온갖 지혜를 짜낸 끝에 고대 무기를 꺼내든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날아오겠습니까?”

“솔직히 나도 의문이외다.”

상자노가 날린 거대한 화살은 해자도 넘지 못하고 훨씬 앞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어서 날아온 것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상자노를 다루던 병사들이 각도를 더 높이자 성벽에 부딪혔다가 튕겨나갔다.

거리조절에 성공한 삼인중의 상자노는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내버려뒀다간 큰일 나겠군요.”

언제든 포격을 날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금방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표적에 닿지는 않았다.

약간만 더 멀리 쏠 수 있다면 맞출 수 있었겠지만, 당장 준비된 걸로는 그게 한계였다.

그걸 본 스즈키가 사거리를 늘릴 방법을 제안했다.

“화약을 조금 더 넣으면 어떨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은 되겠지만, 삼혈포가 어떤 꼴이 났는지 생각하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그보다는 더 좋은 수단이 남아 있었다. 나는 무기상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큐 님, 아무래도 그걸 써야겠습니다.”

“바로 꺼내 오지요.”

그가 병사들을 시켜 가져온 것은 내 키의 반보다 약간 긴 길이의 나무기둥이었다.

“화살······?”

“생긴 건 역시 화살인 듯하오만······.”

나와 이마이 소큐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새로운 포탄을 바라보았다.

“같은 구조일지라도 탄궁보다는 활과 화살이 더 잘 날아가지 않습니까? 그거에 착안해서 만들어본 물건입니다. 명칭은······. 대전(大箭) 정도로 해둘까요.”

물론 나는 탄궁 따위가 아니라 전생에 보았던 대장군전을 떠올리며 이 무기를 준비했다. 비록 대들보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지만, 지금 준비한 대전 역시 제법 큰 편이었다.

콰직!

사람들이 대전의 효용을 의심하는 동안에도, 적은 계속해서 상자노로 화살을 날렸다

“안 되겠소. 일단 쏩시다.”

이쪽도 대전을 날려 반격했다. 첫 발은 허망할 정도로 멀리 날아갔지만, 그 다음 발은 표적 가까이에 꽂혔다. 그리고 다섯 발째부터 명중탄이 나왔다.

이어지는 포격 역시 순조롭게 상자노를 하나하나 박살냈다.

“와아아아”

적이 준비한 무기가 망가질 때마다, 아군은 환호성을 지르며 적을 비웃었다.

자신들이 내민 수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상대가 다시 공격해오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지루한 대치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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