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낙일, 그리고 여명 (7)
적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지휘관 역시 그 이름값이 가볍지 않았다.
소이 역시 삼인중의 일원. 게다가 전대 당주와 오촌 관계이기도 했다. 교토를 장악한 세력의 이인자가 직접 내려왔으니, 저들의 각오가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아직 방어태세를 온전히 갖추지는 못했지만, 적이 사카이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나는 이마이 소큐를 불러다 소모품부터 점검했다.
“화약의 준비는 어떻습니까?”
“양은 넉넉하고 보관도 잘 되어 있습니다. 석 달은 너끈히 쓸 수 있을 겁니다.”
그와 창고를 돌면서 재고를 파악했다. 소큐의 보고대로, 화약의 수량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삼혈포는 결국 쓸 수 없습니까?”
최초의 회전식 약실은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랬던 만큼, 삼혈포의 첫 실전 결과가 상당히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
“네. 실전은 시험해볼 때하고는 또 다르더군요.”
나와 스즈키는 결국 어떤 것이 확실한 원인이라고 확정짓지 못했다.
다만 나를 포함한 지휘관부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과하게 긴장한 나머지, 최대한의 속도로 탄을 퍼붓다가 그리 된 것이 아닌지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하지만 삼혈포가 없이는 화력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겠지요. 함선에 달린 화포를 약간 끌어올 생각입니다.”
이미 쿄타로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해둔 상태였다.
공성전에서는 방어측이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격차가 너무나도 컸다.
적은 숱한 전장을 경험한 이만가량의 정예병, 그리고 이쪽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 일천에 불과했다. 첫 실전을 치른 내 직속 부대를 합쳐도 이천이 실질적인 전력이나 다름없었다.
경비대의 나머지 인원은 사실상 보조 역할이라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 같았다.
그나마 수군이 해적들을 토벌하면서 나름대로 숙련된 편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를 성곽에 배치시켜서 부족한 숫자를 채웠다.
마침 병사들이 대포를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본 이마이 소큐가 내게 질문했다.
“하지만 화포는 크기가 커 봐야 사람을 상대로는 화약 낭비가 아닙니까?”
“그나마라도 가져다 써야 할 판이니까요.”
* * *
모든 준비를 마쳤다. 적은 이제 하루면 닿을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했다. 모든 인력에게 교대로 휴식을 취하게 하고, 나 역시 차시츠(茶室다실)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다른 이들을 찾아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마땅한 상대를 찾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와지로 대피한 지 오래였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찾아가거나 부르기 곤란했다.
이마이 소큐는 여전히 바쁠테고, 스즈키 시게히데는 차를 즐기지 않았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자기 휘하 부대를 단속하느라 바쁜 모양새였다.
그나마 적당한 사람이 소에키였지만, 그가 나를 기피하는 기색이라 영 껄끄러웠다. 이치로의 첩보에 의하면, 두문불출한 상태로 조용히 지낸다고 했다.
홀로 차시츠에 앉아 있는데, 요시히메가 불쑥 들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상공께서 홀로 차시츠로 가셨다기에,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 싶어서 따라왔어요.”
다도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차를 마시는 도리,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사교의 수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참선하는 승려나 다인도 아닌데, 혼자 차시츠에 앉아있는 모습은 다소 궁상맞게 보일 수도 있었다.
“어? 딱히 그럴 건 없었는데. 이왕 차시츠에 들어왔으니까 차라도 마시겠어?”
이 시대의 다도는 승려와 무사의 전유물. 숱하게 차카이(茶會다회)를 다녀 보았지만, 여자들이 참석한 경우는 전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워낙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와 동석하는 게 문제될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대접하는 주인의 입장으로, 요시히메를 손님의 자리에 앉히고 차를 준비했다.
손수 화로에 불을 지피고 찻물을 끓였다.
“솜씨가 좋으신데요.”
“그러고 보니 당신과 차를 마신 적은 없는 것 같네.”
“저도 나름대로 문화인으로 명성을 얻었던 시절이 있는 걸요.”
아침식사는 이미 마쳤으니, 약식으로 차만 냈다. 그녀는 호로록 소리를 내며 자신의 찻잔을 비웠다.
요시히메의 태도는 아주 깔끔한 예법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그녀가 의외의 질문을 했다.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어?”
“차가 잘 우러나지 않고 물과 따로 노는 걸 보니, 상공께서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신 거 같아서요.”
그녀의 지적은 예리하게 느껴졌다.
“사실 지난 반란이 마음에 걸려서.”
요시히메도 나를 포함해 동지들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그녀의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그쪽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피했지만.
“역시······. 와타다 오리시로라는 분이 상공께 등을 돌렸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은 내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내가 배신자라고 하더군.”
“상공의 생각은 어떠셨는데요?”
나는 곧바로 답하는 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가 성급하게 구는 대신, 대화라도 요청했다면 좋았겠지만······. 애초에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는 게 마음에 걸려. 정말 일말의 여지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나도 모르게 그녀 앞에서 속내를 풀어놓았다. 요시히메는 내 말을 듣고 뜻밖의 답을 냈다.
“어떤 길을 가시든, 상공의 뜻만 바로 서 있으면 그만이 아닐까요?”
그녀도 무사 가문, 그것도 다이묘의 일족이었으니, 무사들이 평민과 같은 지위로 끌어내려지는 걸 탐탁잖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배은망덕한 자들이라느니, 모조리 쓸어버리고 자기 부친의 뒤를 이어달라느니 하는 말이 나와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내 뜻을 긍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런가. 그렇군.”
와타다 오리시로가 배신한 뒤로, 세상에 다시 나 혼자 남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막막함이 가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점심 무렵이 되어 차시츠을 나섰다.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려 했는데, 하인이 방문객의 존재를 알렸다.
“마츠나가 단죠가 오도시요리 대리께 뵙기를 청합니다. 야규 무네요시라는 장수도 같이 왔는데, 어찌할까요?”
나는 그들을 들여보내라고 했다.
그동안 반란을 수습하느라 제대로 시간을 낼 겨를이 없었다. 당연히 시마 사콘의 처분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 집무실로 들어온 마츠나가는 가만히 뒷짐을 진 채,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온 야규 무네요시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하려 했다.
“이치노스케 님······.”
“무슨 용건으로 오셨는지는 알겠습니다. 시마 사콘의 일로 오셨겠지요?”
내 질문에 야규가 한층 더 고개를 숙였다. 긍정의 표시 같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석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포로가 몇 가지 조건을 지켜줘야겠습니다.”
포로의 스승은 내 말에 납득했는지, 수긍하며 구체적인 내용을 질문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그의 석방은 소이의 군대를 격퇴한 뒤로 미루겠소. 여전히 츠츠이 가문은 적이기 때문이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적에게 이쪽의 사정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면, 전쟁이 끝난 다음에 풀어주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유능한 적장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포로가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야규 공이 그의 신변을 책임지시오. 탈출하거나 사람을 해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아이는 약속을 어길 만한 성품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소장의 목을 내놓겠습니다.”
야규의 답에는 음절 하나하나마다 그의 혼이 담겨 있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눈치를 보니, 이미 이야기가 끝난 듯했다.
하지만 야규의 주군과 나는 상하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 처벌을 요구할 수는 있어도, 내가 책임자의 목까지 받는 건 상당히 껄끄러울 것 같았다.
“그럴 필요까진 없소. 다만 문제가 생긴다면, 야규 공이 직접 포로의 목을 가져오시오.”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 야규에게 직접 포로를 가둔 뇌옥의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받아들고 집무실을 나갔다.
히사히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 부하의 억지를 들어주셔서 참으로 고맙소이다.”
“별 말씀을요. 마츠나가 공의 그릇을 믿고 수락한 것이니, 공의 어깨가 가장 무거워야 할 겁니다.”
“하핫, 그렇게 되오이까? ”
동서와 잡담을 나누는 중에 야규가 시마 사콘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동안 치료는 잘 받았는지, 약간 다리를 절기는 했어도 제 발로 걷고 있었다.
그가 나쁘지 않은 대우에 감사를 표했다. 나는 별것 아니라고 답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 봉록은 얼마나 받았나?”
“삼천 석입니다.”
보통 명성을 얻은 장수는 봉록을 석고 오천에서 일만 정도까지도 받는다고 했다. 시마 사콘이 아직 이십대 중반이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우대받는 편이라고 봐도 좋았다.
“상당히 유능한 장수였군. 만약 내가 오천 석을 주겠다고 하면 이쪽으로 올 생각이 있나?”
내 제안을 들은 시마 사콘은 고개를 저었다.
“고니시 공께서 상당한 호의를 베풀어 주셨지만,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깃발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패군지장이 되어, 모시던 주군께 등을 돌릴 수는 없지요.”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비록 거절당했지만 나름 기분은 괜찮았다. 역시 의리는 있는 자인 듯했다.
“과연······. 내가 충성스러운 장수에게 무리한 걸 요구한 것 같군.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새로운 제안을 꺼내려 하자, 누군가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봉록을 일만 석으로 주지.”
내 제안을 듣자 당사자보다도 옆에서 듣고 있던 두 무사가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대에서 다이묘로 인정받으려면 두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다. 하나는 쇼군에게 직접 영지를 받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석고 일만 석을 채우는 것이었다.
지금은 쇼군이 유명무실해진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내가 제시한 봉록은 그대로 다이묘를 자처해도 무리가 없을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안을 받은 시마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은 생각으로 답을 기다리는데,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문가로 가서 눈짓으로 나를 불러냈다.
그는 집무실 안쪽의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크기의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고니시 공이 아와지의 다이묘가 되었다 해도, 석고는 겨우 육만을 채울 뿐이오. 아무리 시마 사콘이 뛰어난 장수라고 하지만, 봉록을 일만씩이나 주겠다니······. 가능한 일이긴 한 거요?”
“물론 토지를 줄 수는 없겠습니다만, 해마다 일만 석의 미곡은 지급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마츠나가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석고라는 건, 반드시 봉록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외다. 토지를 받으면 거기에 딸린 백성들의 지배권까지 받는 건데, 고니시 공의 제안에는 그런 게 없잖소?”
마츠나가 히사히데 역시 무사의 일원. 당연히 무사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을 잘 아는 자였다. 그런 그의 말에 의하면, 영지라는 건 곧 지위와 위신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만 석짜리의 토지가 해마다 일만 석의 세입을 내어놓지는 않잖습니까? 늘 풍년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다만, 흉년이라도 들면 영주 스스로도 곤경에 처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야 그렇소만······.”
그도 자신의 영지를 경영했던 기억을 떠올렸는지 금세 내 말에 수긍했다.
“물론 스스로가 어디에 가치판단을 두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는 있을 겁니다.”
토지를 받은 영주가 된다는 건, 곧 그 땅에 얽매인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스스로가 직접 다스리건, 유능한 대리인을 두건,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주군에게 소집령이라도 받는다면, 자비로 병력을 조직해서 참전해야 했다.
적어도 월급쟁이의 장점은 상황 여하에 관계없이 기본급이 보장된다는 것이 아니던가.
마츠나가도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미요시 가문의 중신이 된 자수성가형 인물. 그도 일개 하급무사 시절과 다이묘의 지위를 모두 경험한 자였다.
그런 만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금방 이해한 것 같았다.
“흠, 듣고 보니 그렇게 나쁜 이야기는 아닌데······. 만약 내가 고니시 공 휘하로 들어가면 얼마나 줄 수 있겠소?”
나는 시마 사콘을 수하로 들일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거물이 내 주장에 혹하는 모습을 보였다.
“야마토의 다이묘께서 제 부하가 되시겠다는 말씀을 다 하십니까?”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하지만 의외로 마츠나가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어차피 내 영지도 츠츠이 가문과 싸우느라 초토화된 지 오래요. 돌아가 봐야 재건할 생각을 하면 사실 골치가 아프더구려.”
“흐음······.”
마츠나가 히사히데 같은 무장을 휘하로 둔다는 건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받을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섣불리 휘하에 들이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무게감이 있었다.
당장 관위부터가 종7위하와 정5위하, 그러니까 내가 아는 대로만 열 등급이나 차이가 났다.
내가 부담스러워한 걸 눈치챘는지, 그가 말을 덧붙였다.
“당장 답을 주지 않아도 좋소. 이 전쟁이 끝나면, 고니시 공도 그에 걸맞는 관위를 받을 테니 너무 고민하지는 마시구려.”
마츠나가와의 대화를 마무리짓고 집무실로 돌아오니, 소속이 다른 스승과 제자는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흠흠.”
나는 헛기침으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려는데,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나머지 방문객들을 잡아끌었다.
“혹여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니, 이 사람들에게는 내가 잘 설명해 두리다.”
마츠나가는 내게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을 쏟아내고는 그대로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수십 장의 이력서를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