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낙일, 그리고 여명 (5)
전투는 아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저항하던 마지막 적병을 마저 찔러 넘기고, 나도 바닥에 대충 주저앉았다.
아군 진영에서 마츠나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참으로 인상 깊은 전투였소. 어찌하여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것이오이까?”
“말씀드렸다 해도 믿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내 말에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포에 칼을 꽂아서 창처럼 쓰리라곤 생각도 못했소. 게다가 마지막의 그 대철포는 대체 무엇이오이까?”
그의 눈에는 총검과 나팔총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았다.
“원래는 수전에서 쓰던 무기였는데, 이런 지형에서도 제법 괜찮았던 모양입니다.”
“지형도 지형이지만, 아주 시기적절한 발포였소.”
실전에서 보고 느낀 바도 비슷했다. 적이 가까이에서 최대한 밀집했을 때, 나팔총은 최적의 무기였다.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실례지만, 뒷정리를 좀 부탁드립니다.”
“아아, 걱정 마시오. 깔끔하게 치워 놓으리다.”
가까스로 마츠나가에게 부탁한 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천막이 보였다. 잠들어 있는 동안 여기로 옮겨진 듯했다. 그런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나도 아마 그 소리에 잠을 깬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니, 포로 하나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네놈들도 무사의 명예를 안다면, 당장 할복하게 해 달란 말이다!”
“어허, 포로면 좀 얌전하게 있어.”
스즈키가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묶인 자는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옛 사이카슈를 불러냈다.
“대체 왜 저런 거야?”
“츠츠이 군 1진의 대장이었다고 하는데, 무사로서 할복하게 해 달라고 저 아우성이야.”
할복이라는 말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대충 재갈 물려서 조용히 시켜. 패배했으면 조용히나 있을 것이지, 무슨······.”
“그게 말이야, 패군지장에게는 할복을 허용하는 게 관례야.”
우스운 이야기였다.
저마다 족보를 뜯어고치고 하극상을 벌이는 와중에, 관례 따위를 지킨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떤 작자인지나 보기 위해, 나는 포로가 갇힌 막사로 들어갔다.
“네가 츠츠이 군의 대장인가?”
“그렇다! 내가······.”
그가 누구인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시끄럽게 굴더군. 그렇게 죽기를 원하면 얌전히 있어라. 계속 소란을 피우면 차꼬를 채워서 격군 노예로 부려 주지.”
노잡이로 쳐박아 버리겠다는 협박을 듣고서야 적장은 겨우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 푹 쉰 거나 다름없었을 텐데, 다시 피로감이 몰려왔다.
“후우······.”
다시 밖으로 나와 한숨을 내쉬는데,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보였다.
“일어났단 이야기를 듣고 왔소. 전장의 정리도 모두 끝났소이다.”
제대로 된 결과를 듣기 위해, 다시 군막에 모였다.
동서의 말에 의하면, 전과는 사살 약 일천에, 포로가 구백이었다. 살아서 도망친 자는 육백쯤 되노라고 했다.
“그 정도면 대승이군요. 그런데, 아군의 피해는······.”
스즈키 시게히데가 나섰다.
“그건 내가 말할게. 중상자 하나에 경상자 여섯.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적은 피해야.”
“중상자는 언제 다친 건데? 백병전 중에?”
“그게 좀······.”
질문을 받은 옛 사이카슈는 상당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나로서는 그런 태도가 오히려 의문이었다. 이미 대승을 거두었는데 거리낄 게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삼혈포가 터졌어.”
기어이 우려했던 일이 터진 듯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건 진즉 이야기했어야지. 자물쇠가 풀린 거야?”
개발 단계에서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철포는 사격할 때마다 내부의 폭발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삼혈포의 구조는 단순하지 않았다. 결국 육혈포로 시작했던 걸 삼혈포로 줄이고, 잠금장치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도 역시 근본적인 해법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직접 보는 편이 나을 거야······.”
스즈키는 말을 흐리며 망가진 철포의 잔해를 내밀었다.
약실이 튕겨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켜 주던 잠금장치는 채워진 모습 그대로 그슬려 있었다. 마저 살펴보니, 약실을 끼우는 축이 꺾인 상태였다.
내가 문제점을 찾는 동안, 스즈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재료가 원인인 것 같아. 다음 번 제작은 조선산 철로 하면 안 될까?”
확실히 생각지도 않은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면, 재료를 바꾸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은 될 터.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기엔 너무 먼 주제였다.
“흐음······. 그건 일단 나중에 돌아가서 이야기하자고. 다른 삼혈포의 상태는 확인해봤어?”
“그건 아직.”
나는 스즈키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는 대신, 옆에 있는 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서 삼혈포를 받아들고, 그대로 분해해서 살펴보았다.
역시 상태는 심각했다.
“이 삼혈포도 축에 금이 갔어.”
“안 돼······!”
스즈키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로서는 이거에 매료되다시피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라 할 만했다. 물론 최초 고안자인 내 속도 타는 듯이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기보다는, 사고를 방지하는 게 급선무였다.
“삼혈포는 전부 회수하고, 병사들에게 예비 철포를 지급하도록 해.”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오늘의 일이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밖에서 마츠나가의 부장 중 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신자에몬, 무슨 일인가?”
“단죠(단죠쇼히츠의 약자, 종4위하 弾正少弼탄정소필, 마츠나가 히사히데) 님. 부디 제 제자를 살려 주십시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주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네, 대체 뭘 하는 겐가. 자세히 말해 보게.”
“이번 싸움에서 아군에 포로로 잡힌 자들 중에 제가 가르친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재주를 지녔으니, 한 번만 구명의 기회를 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다른 진영에서 싸우는 상황이라니.
“그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세. 포로의 생사여탈권은 잡은 자에게 있는 법이고, 자네 제자를 생포한 자는 내가 아니라 고니시 공이지.”
히사히데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부하가 다시 내 앞에 와서 고개를 숙였다.
“이치노스케 님, 감히 청을 올립니다.”
부탁하는 기세가 너무나 절박하게 느껴졌다.
“일단 들어는 봅시다. 그런데, 귀공은 누구시오?”
“소장, 야규 신자에몬 무네요시(柳生유생 新左衛門신좌위문 宗厳종엄)라 합니다.”
“야규?”
이름은 생소했지만, 성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일본 쇠고기 상표는 아니고······.
내가 긴가민가하는 태도를 보이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대신 설명해주었다.
“내 수하에 있는 이들 중 하나인데, 검에 능하여 신카게류의 면허개전까지 받은 사람이외다. 전장에 나오기 전에는 야마토에서 도장을 열어서 사람들을 가르쳤소.”
야규라는 가문과 신카게류의 명칭이 결합되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렇다면 일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유명한 검호가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타지마노카미(종5위 但馬守단마수)는 도쿠가와 막부의 검술사범. 시대 차이를 감안하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자가 장본인이 아니라 선조일 가능성도 제법 높아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카게류의 면허 개전을 받은 검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 귀공의 제자가 내 포로로 잡혀 있다고 하셨소?”
“시마 카츠타케(島勝猛도승맹)라는 아이인데, 츠츠이 가문에 출사한 몸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스즈키가 귓속말로 아는 정보를 이야기했다.
- 아까, 할복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던 장수네. 스스로를 시마 사콘 카츠타케라고 했어.
정작 나는 그자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야규 무네요시가 카츠타케라 불렀을 때도,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시마 사콘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시마 사콘?”
“혹시 아십니까?”
물론 안다는 건 역사 속 인물로서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아까 본 것도 있어서 적당히 둘러댔다.
“아까 진중에서 소란스럽게 굴기에 잠시 본 적이 있소이다. 마치 죽음을 갈구하는 태도였소만······.”
내 말에 야규 무네요시가 다시 바닥에 고개를 들이받다시피하며 숙였다.
처분은 이 전투가 끝난 다음에나 결정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제법 재미있게 돌아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살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최대한 배려해 보리다. 그런데, 대체 어떠한 자였기에 야규 공이 구명을 나선 거요?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비일비재하잖소.”
“비록 나이는 어리나, 무사의 귀감이 될 만한 아이입니다.”
할복하고 싶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걸 생각하면, 그 평가가 맞을 것도 같았다. 내가 보는 관점과 다른 무사들의 시야는 다를 테니까.
하지만 무사의 귀감이 될 만하다는 평가를 뒤집어 보면, 풀어줘 봐야 적진에서 활약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흐음······.”
“부탁드립니다!”
야규 무네요시가 다시 머리를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찧으며 내게 절했다. 마츠나가는 그 모습을 보며, 다소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 친구가 이런 성격이 아닌데······.”
일단 야규 무네요시는 좋은 말로 돌려보냈다.
그가 군막을 나가자, 그의 주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오. 그 삼혈포라는 건 결국 하자가 있는 무기가 아니오이까?”
“그렇지요.”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츠나가는 아군. 지금 내 속을 긁거나 모욕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닐 터였다.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장차 단병접전을 피할 길이 없는 듯한데, 고니시 공 휘하에도 뛰어난 무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삼혈포를 먼저 언급한 다음, 은근히 꺼낸 말 속에 뼈가 있는 것 같았다. 자기 부하의 청을 들어달라는 간접적인 지원사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옛 말에도, 앞장서서 적을 베고 깃발을 뺏는 건 주장의 역할이 아니라고 했다. 이번에야 내 세력이 미약하니 직접 나서야 했지만, 언제나 그럴 순 없었다.
스즈키도 출신이 사이카슈라서 그런지, 단병접전에 능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런 점에서 마츠나가의 말은 옳았다.
“그가 수하로 들어오겠다면야 저 역시 반길 일이겠습니다. 하지만 무사의 귀감이라는 자가 쉽게 소속을 바꿀는지요?”
“신자에몬이 그자의 스승이라니, 설득하긴 어렵지 않을 거요. 그리고 무사의 귀감이라······. 결국 무사라는 족속도 봉록을 잘 주는 주인을 찾게 마련이더구려.”
그도 지금의 세태에 상당히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기 부하의 마음을 챙겨주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설득은 야규 공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말해 두리다.”
* * *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철포수를 앞세워 계곡 너머로 진군을 개시했다. 언제까지고 이 계곡에 묶여있을 수는 없었기에, 결판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스즈키는 못내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정말 그 계책이 먹힐까?”
“통하지 않으면 다시 입구로 물러나서 퇴각할 기회를 노려야겠지.”
아군의 작전은 일종의 허장성세였다. 어제의 참패를 경험한 츠츠이 준케이가 알아서 물러나기를 바라며, 조금씩 전진해 압박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겁쟁이 준케이는 앞으로 나와라!”
“츠츠이 군을 철포밥으로 만들어 주겠다!”
상대에게 간간히 모욕을 가하며, 아군은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전진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군이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적은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이쪽에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자, 아예 등을 보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계곡의 반대편 입구에 도착했을 때, 츠츠이 군은 저 멀리 자신의 본거지를 향해 퇴각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요?”
내 질문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시원스레 답했다.
“츠츠이 준케이도 나름대로 야심이 있는 자요. 섣불리 자기 휘하를 소모하려고 들기보다는 차라리 셋츠로 가서 본대와 합류할 거라 생각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도 돌아갑시다.”
복귀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대승을 거두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 이만하면 엉덩이가 무거운 에고슈의 거상들을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막 후지이데라(藤井寺등정사)를 지났을 때,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오오, 무사했구나!”
“아버지, 대체 무슨······. 당신도 무슨 일로 나온 거요?”
아버지와 요시히메를 비록한 가족들이 여기까지 마중을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일행을 둘러보니, 가족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다. 이마이 소큐와 그의 사형제도 눈에 들어왔다.
소에키가 앞으로 나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