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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37화 (37/225)

37화 일본에서 왔소이다 (7)

“글쎄······.”

역시 아예 새로운 땅에 가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유예를 주기도 어려웠다. 쓰시마의 상관은 다음 배가 올 때까지는 폐쇄할 예정이라, 여기에 내버려두기도 곤란했다.

“만약 쓰시마에 남으시겠다면, 도주에게 이야기해서 빈객의 예우로 지내실 수 있게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단조가 제 수하로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구요.”

“도주는 믿을 만한 사람이야?”

요시히메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적어도 그가 저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차라리 조선이라면 일본의 어느 다이묘가 그녀를 요구한다고 해도,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해 버릴 터. 그 점에서 나로서도 그녀가 조선으로 건너가는 게 가장 속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요시히메가 마음을 바꾸고, 쓰시마에 남겠다고 해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소 마사모리와 그 아들들은 모두 내가 인질로 잡아 둔 상태. 적어도 도주가 내게 해로운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마음에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사실 모르겠어.”

이해는 갔다.

선택의 마지막 기로에 섰으니, 망설임이 없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배려해 줄 수 있는 한계점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 한 번 더 채근했다.

“어디에 머무르실지는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요시히메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내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내가 너에게 시집가면 어떨까?”

요시히메의 걸음과 함께 훅 하니 화사한 향기가 밀고 들어왔다.

“네?”

그녀가 갑자기 돌직구를 날렸다. 아니, 돌직구가 맞는지도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일단 내가 해석한 바에 따르면, 아예 내게 몸을 의탁하겠다는 말이었다.

“너는 아직 마음에 두는 여인이 따로 있진 않잖아. 나중에 계실이든 첩으로든 내려앉아도 좋으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 그대로. 나는 지금 너에게 정략혼을 제안하는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정략혼이라니요. 저나 요시히메 님이나 그럴 입장이 되지 않잖습니까?”

전혀 뜻밖의 제안이었다. 애초에 정략결혼이라는 건, 서로에게 이익을 제공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 확실한 담보가 될 수 없었다.

“아니, 내 이야기를 들어봐.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요시히메는 자기 사촌들, 그러니까 미요시 나가요시가 죽고 난 다음의 당주 후보자들의 면면을 이야기했다.

“짓큐 숙부의 아들들은 성급한 면이 있지. 아타기 숙부는 아마 반역자로 처단되었을 테니까 그쪽이 잇는다는 건 말도 안 돼. 그나마 아버님께서 높이 보고 계셨던 아이가 소고 숙부의 아들인 시게마사인데, 걔라고 해서 당주의 자질이 갖춰진 건 아니야.”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가문의 세력을 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시히메 님께서는 스스로 드러내실 수 없는 입장이 아닙니까? 피차 위험부담만 커질 텐데요.”

애초에 요시히메는 도망 나온 처지였다.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부친인 나가요시의 위신에도 금이 갈 일이었다. 게다가 전 당주의 적녀라는 점 또한 가문 내부의 정쟁에서 으뜸패로 쓰일 위험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미요시 가문의 성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는 자신을 명분으로 내세워서 미요시 세력을 접수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요시히메 님의 말씀이 전부 맞아들어 간다 치죠. 그렇게 되면 요시히메 님에겐 뭐가 좋은 일이 됩니까?”

일방적인 이득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런 게 보인다면 십중팔구는 함정이고, 나머지는 허상에 불과할 터. 그녀는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보았고, 나 역시 마주 응시했다.

찻물이 끓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요시히메가 입을 열었다.

“유능하고 잘생긴데다가 어리기까지 한 남편?”

“농담하지 마십시오.”

고작 그런 이유라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그녀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뭐가 좋았냐고? 아버님 앞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에도 배짱이 두둑했고, 야심도 있고, 그런데 조심스럽기도 하잖아. 내 인생을 걸어 볼 만 하겠더라.”

말을 마친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돌아서 버렸다. 그러더니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내가 여자답지 않은 건 알아. 한동안 오라버니 행세를 해야 했으니까. 치아도 칠하지 못했고, 머리도 짧지. 그래도 내가 한 말에 거짓은 없어······.”

나는 오히려 그런 모습에 약간 호감이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단점이라고 여겨 왔던 듯했다. 자신이 가져올 이익을 조목조목 언급하는 모습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귀여울 정도였다.

잠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       *

1564년 여름을 앞두고 사카이로 돌아왔다. 작년 가을에 출발하면서 1년쯤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조금 이르게 복귀할 수 있었다.

항해에 참여했던 노예들은 처우를 개선하는 것으로 상을 내렸다. 차꼬를 풀어 주었고, 선단 내에서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적어도 그들은 항구의 숙소와 배 위에서만큼은 자유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해 주었다. 거기에다가 노예로 지내야 하는 기간을 1년 줄여주니, 그걸로도 노예들은 만족해했다.

마을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급해 보이는 건 없었기에, 돌아온 첫 날은 그냥 집에서 쉬기로 했다. 부모님과 해후를 나누고, 새로 생긴 동생도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 집에 이마이 소큐가 찾아왔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뜻하신 바는 모두 이루셨는지요?”

“네. 대성공이었습니다. 사카이는 어떻습니까?”

내 질문을 받은 이마이 소큐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카이의 일은 모두 순조롭습니다. 그런데 미요시 가문의 정세가 좀 복잡합니다.”

보나마나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저절로 몸이 화자를 향해 기울어졌다. 그만큼 신경 쓰이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겠군요.”

내가 우선순위를 결정하자, 무기상인이 입을 열었다.

“아타기 무네시게(安宅宗繁안택종번, 아타기 후유야스)가 슈리다이부를 살해하려다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역사대로 흘러갔다면, 아타기 후유야스는 곱게 자결할 기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요시히메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었고, 어딘가 또 다른 비틀림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가 맡았던 아와지시마(淡路島담로도)는 마츠나가 공이 접수했다고 합니다.”

이건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적어도 내가 요시히메를 보호하고 있는 한, 적대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알아야 할 정보는······.

“차기 당주는 누구입니까?”

“슈리다이부가 사망하기 전에, 조카인 시게마사(소고 시게마사, 十河重存십하중존)를 미요시 가문으로 복귀시키고, 당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건 내가 알던 대로이기도 했고, 요시히메의 말과도 일치했다. 시게마사는 나가요시의 형제들 중 넷째인, 소고 카즈마사(十河一存십하일존)의 아들이었다.

“아직 어리겠군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거대 가문의 당주로서 열다섯의 나이라는 건 부족함을 의미했다.

“의기도 있고, 학식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특히 유학을 배운 자들이 그 밑에 모여든다더군요.”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생기겠군요. 우린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요.”

기나이의 정세 중에서는 이 정도가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아직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니, 뚜렷한 격변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차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한 잔을 전부 비우도록 차시츠(茶室다실)는 고요했다. 그러다가 이마이 소큐가 검은 비단주머니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실은 마을의 인구가 생각만큼 늘지 않았습니다.”

내 대리인 역할을 할 무기상인이 돌려준 것은 내가 떠나기 전에 맡겼던 주머니였다. 떠나자마자 첫 번째 주머니를 열어 보고, 시기가 될 때마다 열어서 그에 맞게 움직이라고 주었던 물건이다.

사카이에 세웠던 공장과 기타 제반 시설들은 주변 인구의 유입을 이끌어내는 기능도 수행했다.

중세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사카이야말로 거의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도시화 사례가 될 터. 그 부작용 또한 심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걸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예측해서 대처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매 단계마다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적어 두었던 것이다.

“유키나가 님께서 주신 비단 주머니의 반도 열어보지 못했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일단 다행이라고 해 둡시다. 지금 이 마을의 가호, 아니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가호 단위는 사카이에서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뜨내기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혼자 사는 인구가 크게 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마이 소큐는 차 한 모금을 삼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지난 달에 세어 본 바로는, 칠천을 조금 넘겼습니다.”

역시 유입인구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역시 특별한 이유가 없으니, 사람들이 사카이에 들어올 동기도 부족한 듯했다.

그래도 당장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만약 기나이가 혼란해진다면, 인구는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될 터. 하지만 평화롭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군요. 생각보다는 적긴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일 겁니다. 조선의 철은 받아보셨습니까?”

“네, 어제 유키나가 님의 노예들이 전부 날라다 주었습니다. 실로 최상품이라 할 만한 것들이더군요. 그걸로 철포를 만들면 되겠습니까?”

무기상인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전부 조선소에서 쓸 공구로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습니까?”

“철포는 일본의 철로도 만들 수 있지만, 공구는 그렇지 못하니 말입니다.”

나는 소나무의 단단함과 가공에 필요한 도구의 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소큐는 안타까운 기색을 드러냈다.

“아깝군요. 그렇게 좋은 재료라면 철포를 만들기에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철포도 중요하지만 튼튼한 배를 마련하는 일도 급하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차차 물량이 늘어날 테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 외에도 많은 주제가 남아 있었다. 내가 사카이를 비운 시간만큼 쌓여 있는 일도 많았다.

이마이 소큐가 시제품으로 만들어 주었던 작은 철포가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소릉보(小稜堡)를 이용한 성곽이 어떤 식으로 지어졌는지까지.

밤이 새도록 수많은 대화와 토론을 하고 나서야 겨우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 2년하고도 반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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