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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34화 (34/225)

34화 일본에서 왔소이다 (4)

기대승은 일본에서 온 사신단을 동평관에 머무르게 하고, 곧바로 왕을 알현했다.

“경이 올린 장계의 내용은 잘 읽었다. 도성으로 올라오는 길은 별일 없었는가?”

“정사(正使)인 원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이 말하기를, 가져온 물목 이상의 수량을 해마다 정기적으로 올리겠노라 하였나이다.”

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장계에 의하면, 이미 구리가 수만 근에 유황도 비슷한 양이었다. 게다가 물소뿔도 한동안 명나라에 손 벌릴 필요가 없는 숫자였다.

이미 가뭄에 단비나 다름없는 공급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하니, 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세히 말해 보라.”

“그것이······.”

홍문관 수찬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왕이 한번 더 채근하자,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전하를 뵌 다음에 원하는 바를 아뢰겠다 하였나이다.”

“그런가? 알았으니 물러가 쉬도록 하라.”

기대승의 역할은 부산포의 지방관이 장난치지 않게 감시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볼일이 끝난 왕은 신하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전까지 조선에 입조한 왜추의 사신들은 보잘것없는 토산물 약간을 가져오기만 했다. 그러고는 값진 미곡, 무명 따위를 요구해서 받아갔다.

그에 반해, 원장경의 사신이라는 자는 여러 면에서 관례를 깨는 모습을 보였다.

바라는 것이 없다면, 입조할 이유도 없었다. 저들이 조선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왕은 내시에게 명을 내렸다.

“좌의정에게 입궐하라 이르라.”

잠시 시간이 지나고, 왕의 명을 받은 이준경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왜추의 사신이 지금 동평관에 와 있소.”

“그렇사옵니까?”

옥좌에 앉은 이는 자신의 앞에 선 신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형의 뒤를 이어 옥좌에 오른 이환에게, 좌의정 이준경은 외숙보다도 믿을 만한 신하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사림. 왕의 충신이라기보다는 천명을 받든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당장 수족으로 쓰기에는 그만한 자도 없었다.

“수찬이 말하길, 사신은 답례로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오.”

오래 봉직한 신하는 왕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신이 동평관으로 찾아가 그들의 뜻을 알아보겠나이다.”

“모처럼 왜인이 나라에 긴히 필요한 물품을 가져왔으니, 자세히 살피도록 하시오.”

*       *       *

동평관은 왜관보다 넓고 편안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굳이 시비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 일행은 얌전히 하회를 기다렸다.

밖이 잠시 소란스럽더니, 좌의정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바로 마당으로 나가서 그를 맞이했다.

방문객은 여러모로 만만치 않게 생긴 자였다. 탐욕의 기색도 없었고, 기대승 못지않은 강직함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눈빛이 심후하여 속을 읽기 힘들 것 같았다.

늙은 생강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하다 싶었다.

“그대가 삼호전 원장경이 보낸 사신인가?”

“그렇습니다. 원장경의 손자로 입적한 원행장이라 합니다. 주군의 명을 받아서 조선에 입조(入朝)코자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지.”

그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나는 전하의 은혜로, 과분하게 좌의정을 맡고 있는 이준경이라는 사람일세. 전하께서는 지금 시간을 내시기 어려운지라, 대신 내가 그대들을 맞이하도록 하셨네.”

“그렇습니까?”

“듣자하니, 그대들은 이전에 입조했던 왜추의 사신들과는 조금 다르더군. 돌려 말하지 않겠네. 무엇을 원하는가?”

처음부터 돌직구가 날아왔다.

실무적인 권한만 놓고 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조선의 재상이다. 게다가 왕명을 내세운 걸 보니, 뒤에는 지금의 국왕이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조선의 간관들에게 말이 들어갈 여지를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대감께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 말을 듣자 상대의 눈썹이 꿈틀했다.

“맹랑하군.”

이준경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역관을 내보냈다. 말이 통하는 상황에서 굳이 듣는 귀를 늘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주변을 모두 물리쳤으니, 하고 싶은 말을 해 보게.”

역시 정승 자리를 투전판에서 딴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대승의 말을 들어보면, 결국 이 사람도 사림에 속하는 인사. 과연 내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떻게든 왕에게 직접 확답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본국에서는 실정이 발생했을 때, 관련된 신하에게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곤 아예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조선이 왜국으로 보이는가?”

조선의 정승은 기세를 올려세웠지만, 나로서도 할 말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걸로만 판단하자면, 별 차이는 없겠더군요.”

“뭐라?”

다행스럽게도 도성으로 오는 길은 정보 수집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기대승은 말을 아낀다고 상당히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간단한 단서로도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소윤은 예정보다 일찍 몰락할 것처럼 보였다.

“만약 제게 확인하셨던 것의 반만큼이라도 하셨더라면, 가짜 사신 따위가 농간을 부릴 여지는 없었을 겁니다.”

“그게 뭘 어쨌다는 건가?”

“위사가 설칠 무렵에는 지금 조선의 영의정이신 분께서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셨다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엄연히 전하께서 계시는데, 일개 신하가 모든 걸 결정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척, 상대의 속을 확 긁어 놓았다.

“말이 과하구나. 사신은 건드리지 않는 법이라지만, 일개 왜추의 수하가 상국을 능멸하고도 살기를 바라더냐?”

이제 상대는 대놓고 하대하며, 을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만약 내가 들고 온 제안이 무산되어 버린다면 왕이나 사림이나 타격을 받게 된다.

국왕은 왕권을 강화할 기회를 상실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굴러들어오는 전략물자를 걷어차 버린 사림을 소윤이 내버려둘 리 없었다.

다른 신진 관료들은 몰라도, 좌의정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 지금은 살짝 밀어붙여도 좋을 때였다.

“왜구와 위사가 바다 건너에서까지 설치는 건 빈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이제 와서 제 무례함으로 덮으려 하시다니요.

정승이라는 분이 이렇게 철면피이신데, 어찌 이 나라에서 성현의 말씀이 살아 있다고 하겠습니까?”

말문이 막혔는지, 좌의정은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저라고 상국의 대신께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저희를 믿지 못하는 만큼이나, 저희 또한 조선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전하께 직접 아뢸 수밖에 없지요.”

이준경은 내 말을 듣고 별 대답 없이 돌아가 버렸다. 그 기세가 상당히 흉흉했는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에키와 스즈키가 들어와서 내 기색을 살폈다.

나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별일 아닙니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에는 조선의 국왕전하를 알현할 수 있겠군요. 아, 스즈키 너는 언제든 철포를 쓸 수 있게 해 둬.”

“언제든 만전이지. 그런데 누굴 쏘려고? 방금 나간 정승?”

철포는 무기다. 타국의 도성에서 함부로 사용한다면 큰일이 날 터였다. 그걸 아는 스즈키는 내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게 아니라, 아마 시연을 해 보여야 할 것 같아서.”

*       *       *

다시 이틀이 지났다. 언제쯤 부르겠나 싶었는데, 국왕이 직접 동평관으로 찾아왔다. 해가 떨어진 뒤의 미복 차림이었다. 뒤에는 별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따라붙은 상태였다.

“내게 직접 이야기를 해야겠다 했나?”

“그러하옵니다.”

안광에 힘은 있었지만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 몸의 건강이 나빠서라기보다도, 마음고생이 심한 사람의 행색이었다.

“꽤나 재밌는 친구더군. 여러모로 호기심을 자극했어. 그게 의도라면 성공적이라 칭찬해 주겠다.”

“망극하옵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보라.”

나는 조선의 국왕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일종의 거래 제안서였다.

“직접 보시고 상량하시옵소서.”

왕은 전부 읽은 다음에 입을 열었다.

“철을 달라?”

“그러하옵니다.”

“그간 일본국에서는 철과 도검을 토산물로 올리지 않았던가?”

가끔 칼을 진상했다는 내용은 본 적이 있었지만, 일본에서 철을 가져왔다는 기록은 생소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토산물이기에 가져왔을 뿐, 본국의 철은 불순물이 많아 품질이 떨어지옵니다.”

“그러한가?”

“예. 제가 온 곳의 철은 감히 상국의 것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옵니다.”

상대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대들이 왜구를 단속하겠다고 하나, 철을 내어주긴 어렵다.”

“무기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온지요?”

내 질문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리와 유황을 가져왔는데도 믿지 못하시나이까?”

“그것이 철만 하겠는가.”

영락없는 블러핑이었다. 지금쯤이면 판옥선이 진수된 지도 한참 뒤일 터. 화약무기를 사용한다는 걸, 감추기 위한 술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총통에는 구리가 들어가고, 화약을 제조할 땐 유황을 섞지 않습니까.”

“그걸 어찌 아는가!”

내 지적에 조선의 국왕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왜구들이 사용했던 화약은 명나라에서 노획한 물건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화약은 이미 본국의 전장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사옵니다.”

“조선의 왕을 능멸하려는 것이냐? 왜구들이 사용한 화약은 명의 것이 아니던가.”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블러핑을 시도하는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직접 보여 준다면 더 이상 부정하지는 못할 터. 마침 스즈키에게 만전의 준비를 갖추게 지시했으니, 언제든 보여 줄 수 있었다.

“마침 화약무기와 그것을 다루는 자를 데려왔으니,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리하라.”

나는 스즈키를 불러들였다. 사이카슈는 철포와 탄약을 갖춰서 나왔다.

“이것이 일본국의 총통인가?”

“그러하옵니다. 본국의 추장 대부분이 이러한 무기로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있나이다.”

왕은 빈 철포를 받아들고는,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화약도 직접 확인했다.

“이 가루는 틀림없이 화약이군. 총구의 크기가 작으니 총통에 비해 위력이 낮을 듯 한데······. 지금은 한밤중이니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겠지.”

조선은 화약 무기를 없어서 못 쓰는 나라였다. 상대는 그런 나라의 국왕답게 철포의 위력을 금방 가늠해냈다.

“이걸 철포라 하였는가?”

“그러하옵니다. 명나라에서는 조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도 들었나이다.”

“그 말이 옳다. 열성조께서는 화약의 유출을 경계하셨건만, 이미 소용없는 짓이었군.”

왕은 말없이 내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고, 다시 철포를 뜯어보았다. 열심히 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비율을 조금 바꾸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온지······?”

“네가 가져온 물목에 상응하는 철은 당장 마련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번에는 도자기의 비율을 높여서 답례품을 내리겠다. 그리고 모자란 건 다른 물품으로 충당하지 않겠느냐?”

거래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확정은 되지 않은 상황. 조선이 어떤 제안을 하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가 될 터였다.

“무엇을 내리려 하시옵니까?”

“생사와 무명, 그리고 미곡을 더하겠다.”

국왕이 내놓은 것들은 전통적인 답례품에 해당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무명과 미곡은 의미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는가?”

“이 일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신다면, 상국에서 물품을 마련해 주실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겠사옵니다.”

유교 국가에서 왕이 결정한 사안, 그리고 선왕의 행적은 그대로 현대의 헌법과도 같은 무게를 지닌다. 나는 이참에 대못을 박아서 확정을 짓고 싶었다.

“허허.”

상국의 주인인 자신에게 이렇게 당당한 요구를 하는 나를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웃는 왕이었다.

잠시 수염을 쓰다듬던 왕이 입을 열었다.

“좋다. 내일 명을 내릴 것인즉, 입궐토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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