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일본에서 왔소이다 (3)
아직 조선 국왕의 모후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당장 동래 부사가 윤원형의 일파인 소윤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왜관으로 기대승이 내려왔다는 건, 여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원래대로라면 한양 도성에 올라가서 밝힐 참이었지만, 지금 나서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기대승이 뒤에 달고 온 역관도 우리의 말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우리의 대화를 통역하면서도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인은 삼호전 원장경의 아드님이신 삼호전 원의흥(미요시 요시오키)께 입적한 원행장(源行長)이라 합니다.”
나 역시 4대 본성 중 하나인 겐지(源氏원씨)를 자처할 자격은 있었다.
“소인이 이번 사행의 책임을 맡았으나, 부득이하게 종역 선사를 대표로 내세웠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신분을 속였는가?”
“일부러 속이고자 하는 바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중간에서 보고가 누락된 것이 아닌지요?”
조정의 관리는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비록 그가 어떤 언행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강직한 기세는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처음 미요시 나가요시 앞에 섰을 때를 떠올리며 가까스로 버텼다.
다행히도 그때처럼 살기는 느껴지지는 않은 덕에, 나는 겨우 말을 꺼냈다.
“조선에서도 명에 사신을 보낼 때, 비슷하게 인선을 정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조정의 정승이나 종친, 혹은 부마를 정사로 세우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저희 또한 상국에 예를 다하기 위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기대승은 내 말을 듣자,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불신이 섞인 시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납득한 기색도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하지만 그대들이 위사(爲使, 가짜 사신)가 아닐 거라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준비해둔 서계를 내밀며 말했다.
“일행 중에 대마도 도주의 수하가 있습니다. 스스로가 말하기를, 조선의 도성에도 왕래한 적이 있다 하니, 확인해 보십시오.”
“불러들이게.”
그의 허락을 받고 유즈야를 불러들였다. 다행히도 기대승이 데려온 역관은 유즈야 야스히로를 알아보았다.
홍문관 수찬은 확인절차가 끝나고서야 내 말을 조금 듣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을 풀지 않은 채였다.
“그대의 말에 어긋남이 없는 듯하니 믿지 않을 순 없군. 하지만 이렇게 나이가 어린데 사행이라니······.”
“소인이 비록 연치는 어리나, 저희 주인의 뜻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한 미숙하나마 조선의 말에도 재주가 있어 사행을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관계를 따지자면, 나야말로 위사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가짜 사신 여부는 상대를 등쳐먹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할 터. 적어도 내 의도는 진짜였다.
“흠······.”
그는 나와 소에키, 양쪽을 계속 번갈아 보았다.
“소인이 조선으로 건너와서 풍문에 듣기로, 수찬 어른께서는 퇴계 선생과 세상의 이치가 어떠한지 문답을 주고받으신다 들었습니다.”
“그대가 그걸 어찌 아는가?”
“이 일대를 영남이라 한다 들었는데, 가장 학식이 높은 분이 퇴계 선생이시라 들었습니다. 유명하신 만큼, 그분에 관한 소문도 빨리 퍼지는 모양이지요.”
내가 준비한 말에 기대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풍문거핵이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대충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래서?”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수찬 어른께서는 퇴계 선생보다 훨씬 젊으시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 선생께서는 수찬 어른의 비판을 내치지 않으셨는데, 어찌 수찬 어른께서는 소인을 나이로만 평가하십니까?”
퇴계 이황과 기대승이 벌인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은 현대에도 유명한 일화였다.
무엇보다도, 유림이라는 이름이 지닌 고루한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황과 기대승의 나이 차이는 20년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나이와 무관하게 토론을 벌였다.
기대승은 이황의 이론을 비판했고, 이황은 그걸 수용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다듬었다.
지금쯤이면 한참 둘이 서신으로 토론을 벌일 시기였다.
홍문관 수찬은 나를 맹랑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았고, 나 역시 마주 응시했다. 결국 눈을 먼저 돌린 건 상대편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천장을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 바다 건너에도 인물이 있었군.
그렇지. 퇴계 선생께서는 새파란 후학의 말도 받아들이셨는데, 정작 내가 그 존중을 받고서 다르게 행동한다면 소인배가 아니고 무엇이랴!”
다행히도 내 판단은 옳았다. 그는 나를 사신단의 총책임자로 인정했다.
* * *
다음 날, 홍문관 수찬은 우리가 가져온 물건들을 확인했다.
“수우각(水牛角, 물소뿔)에, 구리와 유황이라······. 이전에 왜추들이 보낸 물목과는 조금 다르군.”
“조선의 활에는 물소뿔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상국에 왜구를 단속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함이지요.”
“그런가.”
기대승은 드러내놓고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내가 가져온 것들을 반기는 기색이 있었다.
그는 동래 부사나 부산 첨사가 빼돌리지 못하게 목록을 작성하고, 창고에 봉했다. 옆에서 지켜본 윤행은 그걸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대들은 모두 짐을 꾸렸는가?”
“물론입니다.”
우리는 선단의 수뇌부를 포함해서, 열 사람 내외만 도성에 올라가기로 했다. 나머지는 왜관에 남았다.
가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기대승은 내게 일본의 정세를 물었고, 나는 미리 정해 놓은 대로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설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국의 집정은 삼호전인가?”
“아직 그렇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지방의 역도들이 저마다 한 조각 땅에 차지하고 대드는 형국인지라······.”
“그대들이 가져온 물목을 보아하니, 그가 얼마나 조선에 정성을 다하는지 알겠더군.”
거의 외교적 수사에 가까운 말들이 오갔다. 기대승은 동래 부사처럼 호들갑을 떨며, 쉽게 언질을 주는 실책은 저지르지 않고 있었다.
나로서도 상대방에게 크게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상대는 훈구와 연관이 없는 거나 다름없는 순수 사림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렇다고 몰락이 예정되어 있는 윤원형에게 끈을 댈 수는 없는 일. 내게 필요한 상대는 사림이면서도, 오랜 경륜으로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이 있는 자여야 했다.
“조선은 평화로우니, 상국의 조정에는 인재가 가득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는가?”
내 말을 들은 기대승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금만 자극을 주면 바로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퇴계 선생 같은 분이 초야에 계실 정도라면, 조정에서 국사를 돌보는 이들은 얼마나 뛰어나신 분들이시겠습니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
안타깝게도 홍문관 수찬은 떡밥을 완전히 삼키지 않았다.
“수찬 어른께서는 조정에서 어떤 분을 가장 존경하십니까?”
“존경? 신하된 몸으로 어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저 위로는 전하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민초를 살필 뿐이네.”
역시 그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언급했다.
“조정에서 가장 경륜이 뛰어나신 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경륜이라······. 그나마 좌의정 대감이 그런 편이시지. 사사롭게는 남당 선생이라 하는 분인데, 정승 중에서는 가장 청렴한 분이시군.”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남당이 누군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윤원형을 지칭하는 건 아닌 듯했다. 기대승이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니 훈구는 아닐 터. 그럴 만한 사람이면······. 아마도 이준경 같았다.
벼슬도 적당했다.
삼정승 중에서는 영의정이 일인지상 만인지하라지만, 사실상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오히려 실무적인 면에서 가장 높은 권한을 지닌 쪽이 바로 좌의정이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기대승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우리는 가까운 역참으로 들어갔다. 홍문관 수찬이 마패를 내밀자, 그들은 선선히 방을 내주었다.
역참의 기능은 공무 중인 사람의 편의를 보장하는 것. 조정의 관리와 일본에서 온 사신은 역참을 이용할 자격이 충분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드십시오.”
역졸들의 우두머리인 찰방이 직접 나와서 접대했다.
찰방은 종6품, 홍문관 수찬은 정6품이니 한 끗 차이다. 하지만 중앙의 관료와 외직 중에서도 한직에 속하는 자리의 차이는 컸다.
게다가 상국의 위엄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힘 좀 쓴 것처럼 보였다.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차림이 나왔다.
내 앞에는 쑥과 냉이를 비롯한 봄나물 무침, 그리고 쇠고기가 들어간 무국에 노루고기포가 올라왔다. 밥은 당연히 고봉밥이었다.
스즈키는 나와 같은 상을 받았다. 소에키는 승려라는 점을 배려해서 고기 대신 두부가 들어간 식단이었다.
스즈키는 다른 사람들의 상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내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질문했다.
“우리가 사신으로 방문해서 이런 상을 받는 건가?”
우리를 따라온 병사들은 고기가 없는 장국에 역시 고기반찬이 하나, 그리고 나물반찬이 둘씩 올라온 3첩 반상을 받고 있었다.
짐꾼들의 앞에는 간장과 장국, 그리고 젓갈이 놓였다. 그릇에 담긴 밥의 양은 다른 이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내 호위를 맡고 있지만, 그도 사이카슈 수장의 아들이다. 당연히 신분의식이 없을 수 없었다. 스즈키는 노예에 불과한 짐꾼들이 고봉밥을 받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설마 저자들도 우리와 같은 반열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걸.”
스즈키가 수다를 떠는 모습이 기대승의 관심을 끌었다.
“그대의 호위가 신이 난 모양이군.”
“조선의 상차림이 훌륭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인들에게까지 좋은 식사는 과분하다고 하는 군요.”
기대승도 우리 쪽 짐꾼들의 밥상을 쓱 훑어보았다.
“저게 좋은 식사라고?”
“이 친구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사실 이 시대의 일본인이라면, 나보다는 스즈키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할 터였다.
“일본국에서는 대체 어떤 식사를 하는가?”
“오랜 전란 때문에 풍족히 먹지 못하는 편입니다.”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자네들의 짐꾼들의 신분이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에서 노비들이 먹는 것과 비슷한 편이네. 자네 호위에게도 그렇게 전해주게나.”
“그렇게 하지요.”
스즈키에게 기대승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소에키도 우리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역시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처음 조선에 도착했을 때, 고니시 님께서 말씀하신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산포에 도착한 직후, 나와 스즈키는 행인을 보며 그들의 신분을 추측했던 적이 있었다. 나를 제외한 일행 모두는 그들이 최소한 사족의 끄트머리나 상인쯤 될 거라고 착각했다.
그 오해가 이제야 바로잡힌 것이다.
“저는 큐스쿠도가 한계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소에키는 제자들에게 맡기고 온 식당이 생각난 것 같았다.
큐스쿠도에서는 공장의 직공을 비롯한 사카이의 주민들에게 대량 생산으로 값싸고 적당한 양의 식사를 제공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고봉밥을 퍼주지는 않았다.
“선사님. 말을 아끼시지요.”
그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할 말과 감춰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한 듯했다. 역관은 여전히 기대승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직 조선에 사카이의 상황은 극비로 해야 할 일. 함부로 말하고 다녀선 곤란했다.
“이런······. 소승이 실수할 뻔했습니다.”
한양 도성까지 꼬박 엿새의 여행길은 약간의 실수를 제외하면 무사히 끝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한강에 다다랐다. 이제 조선의 수도가 지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