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일본에서 왔소이다 (2)
왕은 윤원형이 행동하기 전에, 이미 믿을 만한 신하 둘을 대전으로 불러들였다.
삼정승 중에서 실권을 쥔 자는 좌의정이다. 그리고 홍문관은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에 해당한다.
국외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왕이 좌의정과 홍문관에 소속된 관리를 부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부산포에 삼호전(三好展, 미요시 나가요시)의 사신을 자처하는 자가 와 있다.”
“그러하옵니다.”
왕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다.
“그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일전에 다녀간 전산전이 사칭에 불과하다고 한다.”
명이 주변국에 그러하듯, 조선 역시 여진과 일본을 교역량의 조절로 통제했다.
동래 부사가 장계를 올린 바에 의하면, 일전에 다녀간 왜인은 그 통제 방식에 우회로를 뚫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국으로서의 위신은 둘째치고서라도, 왜구의 견제라는 목적이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옥음을 들은 좌의정은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사실상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소인이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왜인의 술수를 살피지 못하였나이다.”
“그것이 어찌 경의 책임이겠는가?”
전산전의 사신이 다녀갔을 때, 이준경은 을사사화의 여파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였다. 그는 을묘왜변에서 공을 세우기 전까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홍문관 수찬인 기대승도 마찬가지. 그는 정계에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왕은 이들을 부른 것이었다.
“수찬은 일전에 영의정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지 않던가?”
기대승은 사림 중에서도 강성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같은 사림인 이준경조차도 그를 기묘사화로 몰락한 조광조에 빗대 ‘소기묘’라고 부를 정도였다.
왕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하문한 것이다.
그리고 기대승은 왕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영의정이 소신과 부교리의 복권을 청한 건, 권신들 간의 이전투구를 위함입니다. 하물며 관직의 임면은 온전히 전하께서 정하신 바. 소신이 그에게 은의를 느껴야 할 이유가 없나이다.”
왕은 기대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는 모두 윤원형의 당여(黨與, 파벌, 패거리)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조사를 맡기기가 난망하여, 경을 내려 보내는 것이다. 삼가 살펴서 감춘 것이 없도록 하라.”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 * *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한양까지 파발이 가는 데 나흘 정도가 걸렸다.
지금 우리는 조선에서 변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니, 편도로 엿새쯤 잡으면 결정하는 시간까지 해서 보름 뒤에 답이 올 것 같았다.
“왜국의 정세는 참으로 복잡기괴하구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 일행은 수시로 동래 부사에게 불려 갔다. 던져 놓은 사안의 경중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예상대로 동래 부사 윤행은 탐관오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왜관에 딸린 녹사들의 평도 좋지 않았고, 왜관에 머무르고 있었던 일본인 상인들에게서도 긍정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우리 앞에서 자기 직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동래의 사정에도 능통했던 유즈야는 동래 부사의 변화에 냉소적이었다.
-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지요.
나 역시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보통 탐관오리를 무능의 대명사로 여기지만, 그들만큼 눈치가 빠른 자들이 또 있을까.
그가 동래 부사로 있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을묘왜변 때문에 쓰시마가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다시 변란이 일어날 염려는 없는 상황. 왜관에서 얼마나 떡고물이 떨어졌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왜국의 정세가 어지러워진다면?
여기야말로 최전선이 될 터. 아마 윤행은 다른 고을로 도망치듯 옮겨갈 가능성이 컸다.
역시 동래 부사는 수시로 소에키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일본의 정세를 세세히 캐묻곤 했다.
“대내(大內, 오우치) 씨가 망했다는 말인가?”
“아직까지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는 소에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모리원취(毛利元就, 모리 모토나리)는 철두철미한 자이니, 멸망이 머지않았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허어. 백제의 제사가 끊어졌구려.”
정말로 오우치 가문이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조선 입장에서는 조금이나마 연결고리가 있는 다이묘를 선호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토색질만 밝히던 탐관오리. 그의 말이 조선 조정의 입장을 대신한다고 보긴 어려웠다. 그냥 개인의 세평으로 생각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그리고 세천(細川, 호소카와) 씨는 아국의 집정으로 있었으나, 실정을 거듭하여 나라를 안정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을묘년의 변란이나 가짜 사신이 오가는 사태조차 막지 못하였지요.”
“그, 그렇다면!”
소에키가 과장을 조금 보태어 전국시대를 설명하자, 동래 부사는 진땀을 흘렸다.
아마 윤행이 아닌, 다른 사대부가 이 이야기를 들어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터. 일본의 내부의 정세가 불안해지는 건, 조선으로서도 최악의 사태를 연상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고려 말기의 혼란을 딛고 일어선 나라였다.
당시 국제 정세는 원나라의 쇠퇴로 인해 세기말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고, 일본에서는 남북조가 갈라서며 왜구가 창궐했다.
말로야 고려가 천명을 잃어 태조가 조선을 건국했다지만, 결국은 한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천하의 개막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다행히 저희 주군이신 삼호전 원장경(三好展 源長慶, 미요시 나가요시)께서 덕을 잃은 호소카와 대신 질서를 세우고, 왜구를 단속하려 하십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오.”
“허나 늑대 같은 자들은 여전히 속에 칼을 품고 있는데, 저희의 세가 외로우니 조선의 은혜에 기댈 수밖에 없지요.”
소에키는 나와 미리 의논한 대로, 상대의 뺨을 치다가 어르고, 어르다가 치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와 마주한 탐관오리의 표정이 휙휙 변해 갔다.
동래 부사와 면담할 때마다, 속에서 치미는 웃음기를 참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 * *
“동래 부사는 참으로 알기 쉬운 자였습니다.”
그것이 소에키가 왜관의 책임자를 두고 한 평가였다. 하지만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를 아는 입장에서, 이쪽이 원하는 대로 교역을 틀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의 도성에 올라가서도, 일이 이렇게 쉽게만 풀릴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군요.”
“어차피 우리는 아는 대로 말할 뿐이 아닙니까.”
물론 그것이 이쪽의 가장 큰 무기였다.
조선 측이 아무리 용을 쓰고 반증을 찾아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명분이라는 측면에서만큼은 내가 앞서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흠······.”
조선에는 언제나 역사적인 트라우마가 존재했다.
21세기에서는 중후기의 참극였던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의 양차 호란을 주로 손꼽는 편이다. 하지만 전기라고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고려 말기, 원나라 중심 질서의 붕괴와 일본 남북조 시기의 혼란.
전자는 상업 중심 사회의 붕괴와 홍건적으로, 후자는 고려 전역에 창궐했던 왜구로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기색을 비치자, 소에키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근심이라기보다는 고민이나 수읽기에 가깝겠지요.”
지금 내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건, 조선과 어떻게 교역을 트고, 확대시킬까였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가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별다른 건 아닙니다. 다만 조선의 내력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소에키는 내가 왜구의 단속을 명분으로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조선이 어떤 나라라는 건 몰랐다.
사실 그게 이 시대 사람들, 특히 여말선초의 국제적 혼란과는 무관했던 일본 출신으로서 조선을 보는 관점의 한계이기도 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철저히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편이지요.”
“그들이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 승려는 자기 가문의 사업을 도맡았던 상인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내 말을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구매한다는 사고방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소에키 님은 신용만으로 물건을 매매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무슨 말씀이시온지······.?”
“말 그대롭니다. 오래 거래를 트고 지낸 상대에게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라 칩시다.
당장 소에키 님의 수중에 현금이 부족하거나, 혹은 그 반대일 때, 나중에 돈을 주고받겠다는 약속만으로 상품을 거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 설명을 듣고서야 그는 내가 무엇을 물어보았는지 알아차렸다.
“그런 적이야 없지는 않지요.”
“만약 소에키 님께서 돈을 받아내셔야 할 상대가 망해 버린다면, 어떻게 됩니까?”
“애초에 그럴 상대에게는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만, 불가피한 경우라면 제 안목이 부족했던 탓이겠지요.”
지금 대화의 주제는 원시적인 어음, 그리고 신용 거래의 개념과 닿아 있었다.
“만약 그런 사태가 일본이나 조선 같은 국가 단위를 넘어서, 온 세상에서 벌어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상업이 훨씬 더 증대하게 되면 가능한 일이지요. 은자조차도 들고 다니기 무거울 정도의 거래를 한다면 말입니다.”
내 말을 듣자 소에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물 화폐의 불편함이라면, 상인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인 한두 사람의 파산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까?”
“일본을 제외한 온 세상을 정복했던 몽골인들은 상업을 장려하기 위해서, 국가가 신용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원나라가 망하면서 죄다 의미가 없어져 버렸겠군요.”
내 말을 들은 승려는 몇 단계의 연결고리를 건너뛰었지만, 그의 말은 큰 틀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굳이 세세한 부분의 설명은 건너뛰기로 했다.
“조선의 태조, 그리고 사대부들은 그 당시의 혼란을 수습하고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그러니 조선이 외국과 교역하지 않고도 국체를 유지할 수 있게 경제 구조를 구축했겠지요. 이를 박박 갈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물건을 사고팔 때, 물물거래로만 하는 겁니까?”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금은의 유통이 적다는 걸 제외하면 우리와 비슷하지요. 쌀과 목면을 근간으로 거래한다는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서, 소에키는 턱을 쓰다듬었다.
“목면을 쓴다면, 우리는 충분한 양이 있었잖습니까?”
사카이의 직조공장으로 일본 내 목면의 시세가 급변할 정도였으니, 이 승려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일본은 이제 막 상업 진흥의 싹이 틀까말까 한 상태였다면, 조선은 이미 파산을 경험했다가 일어섰다는 차이가 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조선은 적어도 국가의 운영과 민생 면에서만큼은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만약 목면을 먼저 들이민다면, 거절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런 나라를 상대로 장사하자고 제안을 해야 할 판이니, 특수한 상품을 준비하는 게 당연했다.
“목면은 조선이 우리를 믿기 시작하면, 그때 차차 밀어넣어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당장은 눈을 뒤집고 달려들 물건을 내놓는 게 상인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물소뿔은 그렇다 쳐도, 구리와 유황이 그런 물건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알맞게 대화가 마무리된 시점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스즈키가 들어왔다.
“조선의 도성에서 관리가 내려왔대.”
“혹시 직급이 뭔지 들었어?”
“글쎄, 홍문관 어쩌고 하던데?”
스즈키는 전해듣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홍문관’이라는 단어로도 상대의 위치는 대강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조선의 조정이 이쪽의 말에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높으신 분이야?”
“글쎄. 여기까지 내려온 걸 보면, 실무자에 가깝겠지. 그래도 나중에는 고위직으로 오를 사람일 거 같은데.”
우리는 마당으로 나가서 조선의 관리를 맞이했다. 그는 홍문관의 수찬이라는 것 같았다.
“그대들이 삼호전의 사신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얼굴마담을 맡은 소에키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내가 통역을 맡았다.
“일본국 삼호전 원장경의 사신은 어명을 받으라.”
내용은 간단했다. 이 교서를 가져온 자가 우리의 신원을 다시 확인할 것이며, 그의 판단에 따라 사신으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서의 전달이 끝나고, 우리는 홍문관 수찬과 마주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수찬 어른의 존성대명을 들을 수 있겠는지요?”
“나는 기대승이라는 사람일세. 자는 명언을 쓰고 있네.”
의외로 시작부터 거물이 나타났다.
나는 소에키에게 눈짓을 했다. 이 자리는 그를 대리인으로 세우지 않고, 직접 나서겠다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