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일본에서 왔소이다 (1)
쓰시마 도주가 붙여준 통역관은 유즈야 야스히로(柚谷康広유곡강광)라는 자였다. 그는 도주의 심복인데, 자기 주군을 대리해서 조선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했다.
- 조선어에도 능통하니 자네들을 잘 도와줄 걸세.
유즈야는 부산포의 관리들과도 안면이 있어서, 신원확인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행에게조차 내보일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조선에서 언어 사용만큼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대의 한국어는 현대의 것과 약간 달랐다.
집중해서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정도. 내 조선어 실력은 딱 그 수준이었다.
물론 유즈야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기에, 상당히 놀란 것 같았다.
“조선의 말을 배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건너오기 전에 책으로 독학한 바가 있네.”
“어떻게 익히셨는지는 모르지만, 조금만 고치시면 조선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일본인이 왜관에 들어오면, 이곳의 관리에게 상세한 내용을 알려야 했다.
나는 유즈야를 따라다니며, 그가 조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주의 깊게 들었다.
“어디서 왔으며, 어떤 물건을 사고팔지 확인해야 하오.”
“이분들은 이가주와 축전주의 태수이자 삼호전 수리대부이신 원장경(미요시 나가요시) 님의 명을 받아 오셨소. 이를 조정에 알려 주시기 바라오.”
유즈야는 우리 일행의 실무자로서, 왜관에 배치된 녹사를 상대했다.
“모처럼 왜국의 추장이 조공을 보낸 모양이구려.”
“그렇소.”
일본인으로서 조선에서 교역을 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왜관에서 사무역을 벌이는 것이다. 절차 자체는 그리 까다롭지 않지만, 거래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다. 게다가 지방관의 토색질에 당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나머지 하나는 지금처럼 조공의 형식을 빌려다가 국가 단위로 거래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판로를 뚫기가 까다롭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했다.
“부사께 아뢰도록 할 터이니, 며칠 기다려 보시오.”
지금까지 우리를 상대했던 녹사는 서리에 해당하는 하급 관리였다. 그로서는 조공의 왕래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만한 권한이 없었다.
다음 날, 동래 부사가 찾아왔다. 그는 스스로 소개하기를 윤행이라 했다. 이름을 듣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자에게는 필요한 것만 말씀하시고, 최대한 이쪽의 사정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원래대로라면 가져온 물목을 슬쩍 보이면서 상대의 몸이 달아오르게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작전변경이 필요했다.
나는 문쪽을 슬쩍 돌아본 뒤 입을 열었다.
“지금 조선에는 윤원형이라는 외척이 있는데, 무척이나 탐욕스럽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찾아온 동래 부사는 그의 일족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끈을 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의 현상만 놓고 보자면, 소에키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꽃은 자기 색으로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법. 앞날을 아는 입장으로서는 그렇게까지 윤원형에 무게추를 얹을 필요가 없었다.
연도 상, 윤원형의 누이이자, 왕의 모후인 문정왕후, 지금은 성렬대비일 그녀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21세기의 한국에서도 꽤 널리 알려졌다.
“그자는 국왕의 모후와 남매지간입니다. 그 이외에는 어떤 뒷배도 없지요. 그러니 늙은 대비가 죽는다면, 역시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될 겁니다.”
내 말을 듣고 난 뒤, 소에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면 국왕을 만나는 데 진력해야겠군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소에키가 동래 부사와 마주했다.
“그대들이 처음 부산포에 들어오면서 대마도 도주의 서계를 보였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다시 원장경이라는 자의 명의를 대니, 어찌 된 일인가?”
“제 주인이신 원장경(미요시 나가요시)께서 조선을 속인 전산전(畠山殿)을 토벌하셨습니다.
그 공으로 다른 추장들의 위에 서셨기에, 앞으로 대마도 대신 직접 조선과 통교하며 왜구를 단속하고자 합니다.”
“전산전이 조선을 속였다?”
전산전은 다름아닌 하타케야마 가문을 의미했다. 한때, 그들도 일본의 실권을 장악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기간도 길지 않았고, 지금은 한낱 다이묘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미요시 가문은 기나이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하타케야마와 롯카쿠(六角육각) 가문의 연합을 물리친 바 있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사칭한 원의현이라는 자는 죽은 지 수백 년이 넘는 고인인데, 어찌 그의 명의로 사신을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일본사에서 원의현, 그러니까 미나모토 요시카타라는 이름을 쓰는 자는 수백 년 전에 죽은 무사 하나뿐이었다. 물론 센고쿠시대 다이묘의 이름은 수시로 바뀌는 편이니, 내가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원씨는 4대 본성 중 하나이니, 다른 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당장 롯카쿠 가문도 겐지(源氏원씨)인데다, 의현(義賢, 요시카타)라는 이름의 당주가 존재했다. 마침 하타케야마 가문과도 연관이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게 지금 조선에서 의미가 있을까?
하타케야마, 롯카쿠, 모두 조선에 사신을 보내 사실을 따질만한 힘은 없었다.
아니, 그들이 지금 내가 벌이는 일을 알 수나 있으면 그거야말로 대단한 일이 될 터였다.
설령 원의현의 명의로 조선을 드나든 자가 진짜 사신이었다고 해도 찍어누를 자신이 있었다.
소에키의 말을 듣자, 동래 부사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탐관오리라고 해도, 조선의 관료. 이는 그의 탐욕과 무관한 일이었다.
“알겠소. 조정에 장계를 올리리다. 따로 할 말은 없소이까?”
“물소뿔을 비롯한 토산품 약간을 가져왔으니, 조선의 물산과 교환하기를 원합니다.”
“물소뿔?”
유황이나 구리는 재화로도 더러 쓰였지만, 물소뿔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간혹 약재로 쓰긴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 그 본질은 전략물자였다. 역시 일개 지방관이 건드릴 수 있는 품목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왜인에게 물소뿔을 수입한 전례가 있었기에, 동래 부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내용도 장계에 같이 적어 놓겠소.
* * *
동래 부사가 올린 장계는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일전에 조선을 드나든 왜국의 사신이 가짜였다는 소식은 한양 도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지금 왜관에 와 있는 사신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자가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렸다고 했다. 어쩌면 한갓 서인에 불과한 자가 농간을 쳤을지도 모를 만한 사태였다.
당시의 책임자는 명종을 대신해 국사를 돌보던 성렬대비(문정왕후). 하지만 국왕의 모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외척으로서 국사를 농단했던 권신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 자성전하를 잘못 보필하여 일을 그르친 윤원형을 내치시옵소서.
윤원형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간관들이 들고 일어서는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동래 부사가 적당히 가려서 장계를 올리기만 했어도.
어차피 왜국의 정세라는 건, 하극상과 조변석개가 수시로 일어나는 복마전이 아니었던가.
“에이, 동래 부사는 어찌 그리 둔한 자란 말인가.”
“그렇게만 보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간들이 내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날뛰는 게 보이지 않는가? 그 왜놈이 사기를 치고 다닐 적에, 국사를 돌보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살폈어야지!”
단순히 외척인 것만으로 조정을 쥐락펴락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면, 왕비의 외숙인 이량처럼 쫓겨나기도 하는 법. 윤원형은 자신이 지닌 동물적인 감각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까지 올라온 자였다.
그리고 그 감각은 지금 윤원형 자신의 몰락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걸, 측근들은 모르는 모양새였다. 그들은 앞뒤 분간도 할 줄 몰랐다.
“자성전하께서 나서 주신다면······. 으억!”
어이가 없는 주장에 윤원형은 벼루를 집어던졌다.
“누님께서 오늘내일 하시는 판에, 이런 일에 신경을 쓰시란 말인가? 썩 나가게!”
그렇잖아도 윤원형은 자신의 뒷배가 사라졌을 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림과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당장의 판세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안 되겠다. 입궐할 것이니, 채비를 갖추도록 해라!”
아직은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누이가 살아 있을 때, 어떻게든 봉합을 해야 했다.
윤원형은 대전으로 들어서다가 멈춰서야 했다. 안에서는 이미 좌의정과 한 젊은 간관이 나오고 있었다. 비록 마음에 드는 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는 애써 친근감을 보였다.
“좌의정 아니시오? 마침 수찬도 같이 있었구려.”
“전하께서 찾으셨기에.”
좌의정 이준경, 그리고 그 뒤의 간관은 모두 사림 출신이었다. 당연히 훈척인 윤원형과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부류에 속했다.
다만 윤원형은 그들에게 비빌 구석이 하나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전하를 뵈러 가시는 길이 아니셨습니까?”
그들의 태도는 냉랭했다. 하지만 아쉬운 쪽은 윤원형인 만큼, 그들에게 마음대로 행동하기 어려웠다.
“아,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나.”
영의정의 살가운 태도에 이준경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 뒤의 홍문관 수찬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인은 바쁘니 용건만 말씀하시지요.”
“이보게, 수찬. 내가 전하께 경의 복권을 청하지 않았던가.”
“관리의 임면은 온전히 주상 전하께 있사온데,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젊은 관리는 윤원형의 말을 싹둑 잘랐다.
작년 가을 무렵, 윤원형은 영의정으로서, 우의정인 심통원과 연명으로 두 관리의 재등용을 청한 적이 있었다.
왕비의 외숙인 이량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역공을 받아 삭탈관직 당한 자들. 그 중 하나가 바로 지금 마주하고 있는 홍문관 수찬, 기대승이다.
그때는 외척이라는 입장에서 뜨는 해나 다름없었던 이량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기대승은 강성 사림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지만,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이량을 물어뜯을 만한 공격수로 적격이기도 했다.
정치라는 게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 하지 않던가. 지금 윤원형은 사림과 사소한 인연이라도 붙들어야 했다.
“아니, 이 사람. 너무 차갑구만. 영의정께 너무 무례하게 굴지는 말게나.”
이준경이 젊은 간관을 타일렀지만, 그것이 오히려 윤원형의 속에 불을 지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지 않던가.
더구나 좌의정은 너구리처럼 능글맞게 굴면서, 고개만 뻣뻣한 사림을 조정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은 더 바짝 숙여야 할 때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윤원형의 의도를 전혀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대감, 제가 어명을 받은지라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나중에 따로 담소를 나눌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지요.”
“아, 아니······.”
홍문관 수찬은 영의정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