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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니시라니-30화 (30/225)

30화 조선을 만나다 (11)

이후의 협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쓰시마에 지어질 상관은 북섬의 히타카쓰(比田勝비전승)라는 곳이었다. 만 안쪽으로도 물이 깊어서 배가 드나들기 좋았고, 남향이면서 조선으로 가기에도 괜찮은 입지였다.

“공사가 완료되면, 하카타에서 쌀을 날라올 겁니다. 그 다음에 바다를 건널 예정이지요.”

나는 일꾼들이 상관을 짓는 걸 지켜보며 요시히메에게 설명했다. 요즘 들어 이런 경우가 많아졌다.

소에키는 건설을 감독하고 있었고, 스즈키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단조나 이치로는 아직 상대하기가 약간 껄끄러웠다.

마침 일행 중에서 가장 한가로운 사람이 요시히메였기에, 자연스럽게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럼 그때 조선에 갈 수 있겠네.”

선단의 출항 목적 중 하나가 그녀의 망명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제 말을 번복하는 거 같습니다만, 여기에 남으실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요시히메의 망명지로 조선을 언급했던 건, 내가 거기로 갈 명분을 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굳이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다른 선택지도 가능했다.

쓰시마에 지어질 상관(商館)은 실질적인 내 영지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우리와 풍습은 물론이고, 말도 다르지요. 원하신다면, 이 상관에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항해 중에 보였던 태도를 봤을 때, 그녀는 아직 마음에 망설임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내 의사를 물어보는 이유가 뭐야?”

그 말에 나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그야······.”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왜 요시히메를 여기에 두려고 하는가?

“여기는 사카이에서 무척이나 먼 곳이니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네요.”

“정말 그런 이유야?”

“일단은요?”

내 입으로 말해 놓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믿을 만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말이 옳았다. 따지고 보면 서로가 필요한 걸 주고 받는 거래 관계가 아니던가. 뭔가에 홀렸다가 깬 느낌이었다.

“아, 내가 인질인 거구나?”

“네?”

“그렇잖아. 단조를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건 이해해.”

그 말에 반박할 만한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망설이는 동안, 요시히메가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더 이상 가문의 사정에 엮이지 않아도 좋을 테고.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

*       *       *

늦가을에 쓰시마에 도착하고, 한겨울에 상관을 완공했다. 마침 설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소에키는 여기서 설을 쇠고 나서 건너가자고 했다.

“조선이나, 여기나 타지인 건 매한가지입니다만······.”

“그래도 아예 타국에서 명절을 보내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 땅을 밟아 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며칠 좀 더 늦어진들 대수일까.

설날, 병사들은 최소한만 남기고 자유를 주었다. 누군가는 신사를 찾아가 한 해의 안녕을 기원했다.

물론 그냥 남아서 조용히 쉬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모처럼 방에서 느긋하게 있는데, 소에키가 찾아왔다.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가 약간의 물품을 보내 왔습니다.”

그로서는 우리가 큰 손이나 다름없었으니, 선물을 준 것 같았다. 나는 소에키를 따라 물건들을 살폈다.

“대단찮은 것만 있을 줄 알았는데, 실로 대단하군요.”

나 역시 선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쓰시마 자체 산물이야 은이나 해산물에 불과했지만, 지금 도주가 보내 온 것들은 대부분이 조선에서 온 것들이었다.

일본의 중심인 기나이를 기준으로 잡아도, 모든 것들이 훌륭했다.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 선단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저마다 자기 눈에 들어온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 들고 구경했다.

“오오, 조선의 찻잔이······.”

“그거 막사발 아닙니까?”

소에키가 도자기 하나를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자, 스즈키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막사발이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찻잔의 완성일세. 부족함을 알아야 채우는 법도 익히게 되지 않겠는가.”

와비 문화라는 것이 그런 내용이긴 했다. 더구나 역사적으로도 소에키, 그러니까 센 리큐는 그 사상을 완성시킨 사람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니 지금의 태도도 이해는 갔다.

물론 내 눈에는 우윳빛 백자가 더 보기 좋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소에키의 취향은 존중하고 각자의 관심사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이건 뭐지? 나무 같기는 한데, 나무라고 하기엔 살짝 말랑말랑하고······.”

스즈키가 집어든 건 육포였다. 일본에서는 육식을 즐기는 문화가 없었다. 그러니 육포를 처음 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거 육포라는 건데, 고기를 간장에 절여서 말린 거야.”

“고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일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

물론 나 역시 조선의 물건은 이번 생에서 처음이었다. 하지만 잘 아는 걸 굳이 감춰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명색이 내가 주도한 상행, 상인으로서 상품을 잘 파악해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자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입에 넣어 질겅질겅 씹었다.

“호오······. 짭조름하기도 하고, 씹는 맛이 있는데?”

그 말에 소에키를 제외하고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하나씩 육포를 집어 들었다. 모두들 좋게 평가하는 모양새였다.

“선사 님은 드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좀······.”

역시 불문에 귀의한 승려라는 것일까. 결혼해서 자녀도 본 사람이 육식을 거부하는 건 어색했지만, 본인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딱히 강제하고 싶진 않았다.

한편, 요시히메는 은장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은장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이걸 은장도라고 해?”

흔히 은장도라고 하지만, 어떤 세공을 입히느냐에 따라 죽장도나 목장도, 골장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 그녀는 세밀하게 은이 입혀진 장도를 들고 있었다.

일본에는 없는 종류의 장신구였으니, 호기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은장도도 결국은 일상에서 편히 쓰는 도구에 불과했다. 커터칼이나 가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머리로는 나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입견이라는 게 의외로 무서운 구석이 있어서, 나 역시 후대에 생긴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놈의 월향이 뭔지······.”

“월향?”

아차 싶었다. 나도 모르게 이전 생에서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좋으십니까?”

“응. 이쁘게 생겼잖아. 아, 여기 달 그림이 새겨져 있네. 그래서 월향이라고 한 거야?”

다행히도 장도에 있었던 세공 무늬 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아, 네.”

“이런 거 하나 있으면 편할 거 같고. 하나 가지면 안 돼?”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말투가 나갔다. 그걸 상대가 모를 리 없었다. 요시히메가 내 말을 듣자 멈칫하는 것 같았다.

“아, 아뇨. 가지고 싶으신 걸로 하나 챙기시지요.”

아직 임진왜란도, 양차 호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물며 내가 떠올린 건 잘 쓰여지긴 했어도, 한낱 소설에 불과했다.

은장도에 덧붙여질 이미지 따윈 아직 있을 수가 없는 시대였다.

‘후우. 소설은 소설일 뿐, 몰입하지 말자.’

요시히메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은장도를 패용하고는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내 망설임이 멋쩍어질 정도로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의가 환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밖에서 병사 하나가 들어와 손님의 방문을 알린 것이다.

“소 마사모리라는 분께서 소에키 님을 찾으십니다.”

불청객이었다.

일단은 소에키가 그를 상대할 터였지만, 이미 일은 끝난 상태. 나라고 그자를 안에 들여놓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축객령을 내리죠.”

병사에게 그대로 손님을 돌려보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밖에서 마사모리가 악을 쓰는 소리가 났다.

“어째서 요시시게, 그놈을 돕는 거요! 놔라, 이놈들. 내 소에키 선사를 만나야겠다!”

소 마사모리도 칼밥 깨나 먹은 무사. 병사들은 그를 제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스즈키는 바깥 상황을 확인하고 오겠다며 나갔다가 들어왔다. 그러곤 내 쪽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둬 버릴까?”

“명색이 쓰시마 도주의 일족인데, 우리가 함부로 할 순 없지. 그냥 내보내.”

사이카슈가 나서자 일은 금방 해결되었다. 여전히 불청객은 악다구니를 부리는 것 같았지만, 우리에겐 개 짖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선물의 답례를 겸해서 쓰시마 도주의 거성에 들렀다. 그에게서 서계를 받아야 하기도 했고, 마사모리의 일도 이야기해 둘 필요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가.”

“저야 외지 사람이니, 쓰시마의 내부 일에 간섭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았네. 처결해두도록 하지.”

소 요시시게는 선선히 답을 주었다. 그도 역시 자신의 일족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

“아무래도 그 마사모리라는 자 말이야. 경시할 순 없을 거 같아.”

쓰시마 도주의 성에서 돌아오자, 스즈키가 우려를 표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상관에 병력을 좀 많이 남겨 둬야겠네.”

“그럼 한 번에 나르기 곤란할 텐데?”

노꾼은 병력과 별개로 친다 해도, 무장하지 않은 배를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물론 여기서 조선까지는 가까웠다. 그래도 이틀쯤은 타고 가야 하는 데다가, 행여라도 해적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도 곤란했다.

“어차피 상당한 물량이었어. 한 번에 들고 가도, 조선이 전부 소화를 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해.”

물소뿔은 무리해서라도 매입하려 들 것이 분명했지만, 나머지도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약간 덜어간 다음, 꾸준히 공급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배는 세 척만 움직이도록 하지. 나머지는 전부 상관을 지키도록 하는 게 좋겠어.”

“그럼 누가 여길 지키는 거야?”

소에키는 대외 교섭을 맡아야 한다. 스즈키는 선단의 싸움을 지휘해야 했다. 이리저리 가리고 보니, 남은 사람은 둘 뿐이었다.

수뇌부 격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요시히메, 그리고 단조 만이 남았다.

“나는 사람들을 이끌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주군의 그림자에 불과한 몸이니 참작해주십시오.”

단조는 자신이 상관을 맡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어? 그럼 내가 맡아야 하는 거야?”

나와 단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영 못 미더운 기색이었다. 특히 스즈키는 그녀에게 상관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못마땅한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차라리 단조 씨가 소에키 선사님으로 가장해서 건너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건 그거대로 곤란해.”

언뜻 들으면 나쁘지 않은 임시방편 같았다. 하지만 교섭이라는 게 서로 조건을 맞추고 합의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끝날 일은 아닌 법. 조선의 관료들을 구슬릴 만한 교양을 쌓은 사람은 소에키 밖에 없었다.

단조는 빈말로라도 학식을 쌓은 사람으로 봐주기 어려웠다. 만약 조선의 사람들이 본다면, 사신이라기보다는 시정잡배로 여길 가능성이 높았다.

*       *       *

상관의 책임자로 누가 남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정작 배가 뜨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다. 쓰시마 도주는 날이 풀려야 바람이 잔잔해질 거라고 조언해 주었다.

“겨울에는 북서풍이 강하게 부네. 그러니 봄이 오거든 출발하는 편이 나을 걸세.”

과연 그 말대로였다. 날씨가 풀리자, 풍랑도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요시히메 님. 그동안 상관을 부탁드립니다.”

내 부탁에 그녀가 눈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노력해 볼게.”

결국 상관을 지킬 사람은 요시히메로 결정이 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조도 남아서 그녀를 보좌하기로 했다.

그녀가 자기 오라버니의 대역을 맡으면서 쌓은 경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쓰시마를 뒤로 하고, 선단은 항구를 떠났다.

꼬박 이틀을 항해하고 나서 우리는 부산포에 도착했다. 중간에 검문을 받았지만, 쓰시마 도주의 서계를 내밀자 무사통과였다.

“여기가 조선인가.”

모두들 낯선 모습이 신기한 것 같았다.

“여기 사는 이들은 모두가 사족이거나 상인인 모양이군.”

지나가던 행인을 본 스즈키가 무심코 사람들의 신분을 가늠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복장으로나 행동거지로나, 그들은 사대부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그냥 노비거나 잘 쳐줘 봐야 농민 같은데.”

“무슨 소리야. 어딜 봐서?”

스즈키는 내 말에 반발했다. 어떻게 낮은 신분의 사람이 저렇게 잘 먹은 티가 나냐는 것이었다.

그 반박에는 소에키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워낙 당연한 이야기였기에, 굳이 인식을 고치려 애쓰기보다는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여기는 조선이니까. 일본하고는 다르다는 걸 명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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