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조선을 만나다 (10)
쓰시마는 일만 석의 작은 섬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두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원래 도주였던 소 가문의 본가는 강경파에 해당했다.
그들은 조선을 약탈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막상 조선이 세견선을 줄여 버리자, 그들은 힘을 잃었다.
가신들에 의해 옹립된 소 하루야스(宗晴康종청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소 요시시게(宗義調종의조)는 조선에 납작 엎드렸다.
그 덕에 가까스로 조선과의 교역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가 길어질수록 강경파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마사모리가 또 무사들을 충동질하고 있다고?”
“그렇다 합니다.”
소 마사모리(宗将盛종장성)는 종가의 후손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그는 자기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약탈을 통한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이기도 했다.
요시시게는 그를 숙청해서 분란의 씨앗을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일족의 숫자 자체가 너무나 부족했다.
“당분간은 지켜보기만 하게.”
이것이 요시시게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였다.
밖에서 하급 무사 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무슨 일로 그리 소란을 떠느냐?”
“나, 남쪽에서 왜구가 몰려옵니다!”
“뭐라? 자세히 말하라.”
잠시 숨을 고르던 전령은 자세한 내용을 설명했다.
“족히 삼, 사백 석은 넘을 만한 관선 스무 척이 곧장 쓰시마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관선을? 소조선을 잘못 본 것이 아니더냐.”
왜구는 주로 작은 선박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그래야 빠르게 치고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주는 자신이 받은 보고를 곧이곧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하나같이 대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다른 목적으로 이 섬을 왔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요시시게는 종가를 감시하던 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사모리가 외부와 연락한 적은 없나?”
“그런 징후는 없었습니다.”
마사모리가 불러들인 것도 아니라면, 저들의 목표는 쓰시마 자체는 아닌 듯 싶었다.
“따로 소집령은 내리지 않겠다. 성의 경계 태세만 갖추도록.”
요시시게는 도저히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선단이 어디 소속이며, 무슨 목적인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하지만 조선의 토벌대가 아닌 이상, 굳이 주민들을 대피시킬 이유는 없었다.
“설마 이 척박한 섬을 빼앗으려 하는 자들은 아니겠지.”
* * *
쓰시마의 석고는 일만 석이라고 했다. 에도 시대에는 십만 석 대우를 해 주지만, 어디까지나 통신사를 염두에 둔 정치적인 결정. 이 섬의 생산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병력수로 따지면 이백 정도가 적정선이다. 하지만 쓰시마는 규모나 환경적 여건을 고려하면 일천에서 이천쯤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작은 배들이 다가오다가 조용히 멀어지는 걸 보자, 소에키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검문 한 번 없군요.”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지도 모르지요.”
내가 이끌고 온 선단은 관선 스무 척이다. 이 정도면 석고 일만 석의 다이묘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일 터. 게다가 방향도 곧장 쓰시마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포구에 닿도록 저항 한번 받지 않았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서야, 도주의 부하로 보이는 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희 섬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우리 일행 중에서 얼굴 마담을 맡기로 한 소에키가 나섰다.
“나는 소에키라는 승려일세. 슈리다이부의 명을 받들고 조선으로 가는 길인데, 쓰시마 도주를 뵙고 싶네.”
“그러시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주군께 아뢰고 답을 받아오겠습니다.”
굳이 시비를 걸 이유는 없었기에, 소에키는 고개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표했다. 그러자 상대는 부리나케 포구 뒤편의 성으로 달려갔다.
반 시진쯤 지났을까 싶자, 그가 다시 나와서 도주의 말을 전했다.
“주군께서 여러분을 성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포구 뒤편이 바로 쓰시마 도주의 거성이었다. 섬의 주인이 거처하는 장소답게 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지만, 일본 본섬의 다른 성에 비해서는 작았다.
대접 역시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쓰시마 도주 본인의 옷차림부터가 초라했기에, 딱히 홀대받는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내가 이 섬의 주인인 소 요시시게라는 사람일세.”
쓰시마에 상륙하기 전, 나는 소에키와 말을 맞춰 두었다. 아무리 일국의 다이묘라고 해도, 지금은 난세. 일부러 강경한 태도를 보여 주라고 했다.
“소에키라 하오.”
“그래, 나를 찾았다고 했나. 용건을 말해 보게.”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는 소에키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쓰시마에 잠시 배를 머무르게 하였다가 조선으로 건너가고자 하오. 그러니 길을 빌려주시오.”
“조선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달라?”
소에키의 말을 들은 쓰시마 도주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런 일을 굳이 내게 말할 필요가 있었겠나. 굳이 그대들의 길을 막을 생각은 없네. 다만······.”
쓰시마 도주는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이까?”
“을묘년 이래로 조선의 경계가 삼엄한 편일세.”
요시시게는 이쪽을 왜구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소에키가 거기에 반박하려 했지만, 내가 옷자락을 살짝 당겨서 말렸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도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보고 싶으니, 우리가 진짜 왜구인 척해 주십시오.”
소에키는 내 귓속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도주에게 말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바인 것 같소만. 여독을 풀어야겠으니, 포구에 머무르게 해 주시오.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진 않으리다.”
“원하는 대로 하시게.”
* * *
그날 밤, 우리 선단의 숙영지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스스로를 소개하기를, 소 마사모리라고 했다.
“소씨라면 역시 쓰시마 도주의 일족이 아닐런지요?”
선사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내 판단은 조금 달랐다.
“그런 자가 야음을 틈타서 외부인을 찾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어찌 할까요?”
“우선 만나 보시되, 어떤 말이 나오든 확답을 주지 않는 걸로 하지요.”
소에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님을 들어오도록 했다. 만에 하나라도 자객일 가능성이 있어서, 단조가 숨어 있는 상태였다.
밤손님은 척 보기에도 눈에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쪽에는 아쉬운 것이 있었는지,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난 전전대 도주였소.”
그가 스스로 밝힌 정체는 다소 뜻밖이었다. 가끔 당주가 은거하고 젊은 후사에게 지위를 물려주는 경우는 더러 있긴 했지만, 지금 말하는 뉘앙스는 그런 방향이 아닌 것 같았다.
“호오······. 그렇소이까? 어쩐 일로 과객을 찾으셨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도와주시오.”
그는 자신의 내력을 설명했다. 조선의 외압으로 인해, 도주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이야기였다.
“전대 도주, 그리고 그 자리를 이은 요시시게는 찬탈자요. 나야말로 진정한 이 섬의 주인이란 말이오.”
소에키가 그를 상대하며 적당히 맞장구쳐 주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쓰시마의 정세를 따져보았다.
“조선 놈들은 유약한 주제에 토산은 풍족하오. 그러니 한번 배를 띄워 병사들을 보내면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소.”
마사모리는 조선을 약탈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 도주인 요시시게는 어떻게든 평화를 유지하려는 쪽인 듯했다.
“이 섬의 무사들 중 많은 이가 내 편이오. 그러니 선사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이 섬은 본래의 주인을 찾을 수가 있소.”
“그리 한다면 소 공은 뭘 줄 수 있소이까?”
“선사께서 슈리다이부의 명으로 조선에 간다 해도, 저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그러니 쓸데없이 허리를 숙이지 마시고, 나와 같이 한탕 해 봅시다.”
그는 소에키에게 자신이 뱃길을 잘 안다고 호언장담했다.
“소 공의 이야기는 잘 알겠소. 일단 돌아가서 때를 기다리시구려.”
미리 의논한대로, 얼굴마담을 맡은 승려는 좋은 말로 달래서 손님을 돌려보냈다. 그가 간 뒤, 나는 치솟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소에키는 의아해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네. 저 자를 만나 본 건 아주 잘한 선택인 것 같았습니다. 내일 다시 도주에게 접견을 요구하시지요. 그 자리에서······.”
* * *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쓰시마 도주인 소 요시시게에게 사람을 보냈다.
금방 수락의 답이 돌아왔다. 그도 이쪽의 용태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 같았다.
주객이 서로 예를 표한 뒤, 소에키가 먼저 치고 나갔다.
“어제 소 마사모리라는 자가 방문했소.”
과연 우리의 예상대로였다. 쓰시마 도주는 안색의 드리운 그늘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일국의 주인다웠다. 섣불리 입을 여는 대신, 우리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런가?”
“안심하셔도 좋소. 그가 원하는 바와 이쪽의 목표는 한없이 다르니 말이외다.”
“역시 그대들은 조선에 조공을 올리러 가는 길인가?”
소에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금 다르오.”
“약탈도 아니고, 조공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 볼 일이 있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장차 조선과 교역을 하려고 하오.”
그 말에 요시시게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 조선은 일본인의 출입을 엄히 통제하고 있네. 그리고 교역량조차 줄이고 있지. 가 봐야 뾰족한 수가 없을 걸세.”
“아니, 방법은 있다고 하오만, 그걸 도주께서 가지고 있다 들었소.”
“그게 무슨 말인가?”
쓰시마 도주는 소에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할 차례였다.
“제가 설명을 드리는 게 좋겠군요.”
“그대는 누구인가?”
“고니시 유키나가, 포구에 머무르고 있는 선단의 주인입니다.”
요시시게는 못 믿겠다는 듯이 소에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소에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믿을 수가 없군. 혹시 이 사람을 놀리는 거라면 그만두게.”
“그런 건 아니올시다. 고니시 님께서는 제 주군이 맞으십니다. 다만 연치가 어리셔서 제가 대외 교섭을 맡았을 뿐이지요.”
반공대를 하던 소에키가 공대로 어투를 바꾸자, 쓰시마 도주의 태도도 불신에서 반신반의로 변했다.
“그런가······. 좋네.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지금 쓰시마의 물산은 조선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땅도 이곳이라, 쓰시마는 자연스럽게 조선에 매달리게 되었지요.”
내 말을 듣자 요시시게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이군. 그런데 어찌 그대들의 해법이 내게 있다는 것인가?”
“제가 쓰시마 대신 조선과 교역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뭐라? 그대도 말했듯이, 조선과의 교역이 이 섬의 유일한 살길이네. 어찌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게야!”
도주는 불같이 화를 냈다. 만약 포구에 정박해 있는 스무 척의 관선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칼을 뽑았을지도 모를 기세였다.
“진정하시지요.”
“날강도 같은 행태를 내가 참으리라 보는가?”
“물론 대가는 드릴 겁니다. 세사미 대신 제가 해마다 미곡을 일천 석씩 드리지요. 그리고 쓰시마의 물산을 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선이 쓰시마 도주에게 하사하는 세사미는 가장 많을 때조차 이백 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반으로 줄였을 시기였다. 그러니 일천 석은 눈이 뒤집히고도 남을 양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상대는 떡밥을 물었다.
“그 조건이 뭔가?”
“여기에 상관을 세울 터이니, 쓰시마에서 나는 모든 물산을 제가 독점적으로 거래하게 해 주십시오.”
언뜻 보면 이쪽이 손해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여기에는 은광이 있었다. 쓰시마는 주로 조선과 교역했기에, 은의 국제적 가치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그야 어려울 것 없지. 하지만 내가 뭘 믿고 그대들에게 목숨줄을 내어 놓아야 하는가?”
역시 쓰시마 도주는 마사모리처럼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조선은 지금까지 꾸준히 세견선을 보내주었네. 하지만 그대들은 다르지 않은가?”
한마디로 신용을 어떻게 쌓을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그 말은 옳았지만, 차근차근 쌓아 올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일시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다.
“10년 치를 한 번에 드리지요.”